7080 세대의 포크송 가운데 ‘해바라기’가 부른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우리 가는 길에 아침햇살 비치면 행복하다고 말해 주겠네
이리저리 둘러봐도 제일 좋은 건 그대와 함께 있는 것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이 노래는 연인이 서로 사랑 고백하며 많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대는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고 서로에게 고백하기 좋은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족들이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더불어 사는 이웃사람들이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행복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정 안 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정말 소중한 행복을 주는 아름다운 동행자였습니다. 함께 1-2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자!! 여기 바울이 누구를 만났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나옵니다. 지금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고 고린도로 들어왔습니다.
아덴에서의 전도 역시 그다지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철학적으로 전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비웃으며 조롱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말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 때, 그 마음에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바울이 아덴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고린도라는 도시에 들어오게 됩니다. 막상 고린도에 들어섰지만, 이 도시는 우상과 음란과 사치가 버무려진 죄악의 도시입니다. 이 세속에 찌들고 병든 죄악의 도시 한 복판에 서 있는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당시 그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느냐면 18:8-9절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보세요. 그가 얼마나 두려움에 빠져 절망 가운데 있었으면 주님이 한밤에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셨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을 믿어주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 앞에 복음을 들고 정말 열심히 살았지만, 몇 번의 문제를 만나는 동안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감을 갖게 되었고, 그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비단 바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여기 모인 우리 역시 얼마든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에 그 당당하던 모습도 그 멋있는 비전도 다 잃어버린 채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그 당시 어떠한 상태였는지를 훗날 당신이 개척을 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한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그는 편지 속에서 옛날에 고린도 도시에 들어갔을 때의 일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고전 2:3절에 보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아무리 읽어도 너무나 솔직하고 처절한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상처를 가진 바울이 이 낯선 도시의 한 복판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 역시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소아시아 본도에서 출생한 유대인 부부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로마에서 제법 장사를 해서 안정된 삶을 누렸는데 어느 날 글라우디오 황제가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에 사는 모든 유대인의 추방령입니다. 당시 상권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로마 추방 명령이 내려지자 이들 부부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로마를 도망쳐 나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돼서 ?겨 나온 것입니다. 이들 부부 역시 고린도 도시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장막 치는 일이었는데 이들과 동일한 일을 했던 사도 바울과 쉽게 사귀게 되고 여기서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곳에 1년 6개월 머물면서 그들은 복음 앞에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성경은
첫째로 바울의 동역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롬16:3절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여기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권적인 사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동업자라고 말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숭고한 목적을 위해 함께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동역자라 는 뜻은 무엇일까요? 동역자를 영어로 ‘fellow woker' 혹은 'helper’라고 합니다. 돕는 사람, 측근에서 손을 서로 맞잡은 사람을 동역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함께 살아갈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고 이 땅을 떠나갈 때까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그 아름다운 동행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십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다 잃고도 한마음이 되어 바울이 가는 곳마다 동행하며 그의 사역을 도왔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를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롬16:4절에 보면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 부부가 얼마나 바울을 사랑하였는지 바울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바울이 어떤 사람이길래 이 부부가 자기의 목이라도 내놓을 만큼 헌신의 자리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져서 모든 주변의 교회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감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정말 위대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바울은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10:7-10절에 보면 ‘보잘 것 없는 외모에, 약한 건강에, 말까지 시원치’ 않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독선적인 부분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목회자를 어느 교회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런 바울을 이들은 받아들이고, 그의 열심을 존경하고 그의 목회와 선교를 도운 것입니다.
갈 4:14-15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면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시험을 줄 수 있는, 다르게 말하면 교인들이 목회자인 바울을 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런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고, 자기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신뢰하고 받아주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쩌다가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계획하고 결단해서 시작된 인생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친히 이 땅에 보내신 ‘사명자’들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못하고 죽으면 한이 남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했어도 그 일을 못했다면 결코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자는 사람 목에 칼이 걸린 것이고, ‘명’은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사명이란 목숨 걸고 해야 할 일이고,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버린 사람, 사명을 피해서 도망가는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완수한 인생은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사명 하나 때문에 이 부부는 거친 세상에서도 바울을 도와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세상에 고난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난은 고통입니다. 고난은 아픔입니다. 고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에 쉽게 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고난은 우리로 더 좋은 곳을 향해 가게 하는 징검다리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고난은 우리로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고 그것들을 내려놓게 만듭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이전에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고난도 결코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한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19: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가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바울 곁에는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정신이 사도행전 교회 성도의 의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누가 이들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이 바울이나 아굴라 부부는 세상적으로 말하면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재산 빼앗겼죠.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입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이후에 시온의 대로처럼 사역의 길이 열렸나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들의 만남은 땅의 소유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위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기에 서로를 인정하며 사명을 붙잡고 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진정 한 동행자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 셀痴羚杵�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동행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도우며 동행 하시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와 동행하시기 위함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작자 미상의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꿈을 꿉니다. 자기의 지나온 과거의 모습이 해변 모래 위에 발자국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기의 발자국과 주님의 발자국이 사이좋게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발자국이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자기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입니다. 불만스런 목소리로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내 인생의 여정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 주님은 어디가시고, 내 발자국만 찍혀 있습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세히 보아라. 그것은 너의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나는 너를 사랑하며, 너를 결코 떠나지 않는단다./ 네 시험과 고통의 순간,/ 네가 한 짝의 발자국밖에 볼 수 없는 그 순간,/ 그것은 바로, 내가 너를 안고 걸었던 때란다."/
오늘 이 아침!! 그 주님이 내 일생 다가도록 동행하신다는 데 무엇이 염려가 되고 무엇 때문에 상처를 끌어안고 아파하십니까? 이제 내 인생의 진정한 동행자가 되시는 주님께 나의 삶을 맡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발걸음마다 함께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힘들고 험난한 여정이 많았지만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독수리와 참새가 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아십니까? 참새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날기 때문에 계속해서 날개를 흔들어야 합니다. 반면 독수리는 바람의 기류를 타며 납니다. 그래서 처음 얼마 동안만 힘을 쓴 후에, 날개를 펴고 기류에 몸을 맡기며 우리하게 비행합니다. 참새는 날개치며 공중에 떠 있는 모습조차 안쓰럽게 보입니다. 하지만, 독수리가 활공하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낼만큼 아름답습니다.
나방과 나비의 차이를 아십니까? 나비는 태양으로부터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습니다. 반면에 나방은 자기 힘으로 에너지를 얻습니다. 나비는 아침이 되면 가만히 앉아서 젖은 날개를 말리며 햇볕을 받습니다. 그러고 나면 힘을 얻어 우아한 자태로 하늘을 날아 오릅니다. 하지만, 나방은 오직 자기 힘으로 날기에, 날기 한참 전부터 힘을 다해 파닥거리며 에너지를 충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힘겹고 안쓰럽습니다.
이 아침, 여러분은 참새입니까, 아니면 독수리입니까? 나방입니까? 아니면 나비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알지만 그분의 무한한 자원과 힘을 공급받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는 것 자체가 힘이듭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혼자 힘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쉽게 절망을 합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들은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남들이 모르는 평안과 넉넉함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나방처럼 홀로 몸부림치겠습니까? 위로부터 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은혜의 날개 아래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바울과 여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지난날에 빼앗기고 잃은 것에 대해 아파하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실패자요, 패배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함께하는 그 동행의 기쁨이 있나요? 정말 내 한목숨을 송두리째 드려도 아까움이 없는 그런 동행인가요? 여러분!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함께 나아가기를 원하는데 누가 이들의 앞길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역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 일에 우리가 바로 내가 드려질 생각은 없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