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의 유명한 매체인 뉴욕타임스(NYT)의 보도에 따르면 서방 기자들이 가장 꺼려하는 보직은 중국의 베이징과 인도의 뉴델리 특파원이라고 합니다. 자국(自國)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가서 생활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긴 하지만, 특별히 중국의 베이징과 인도의 뉴델리에 특파원으로 나가는 것을 꺼리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공해 때문입니다.
베이징의 황사나 공해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국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일어나는 재해 가운데 하나가 공해와 황사입니다. 중국은 현재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이 값이 싼 석탄입니다. 중국의 전력 60%이상이 석탄을 태워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공장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으로 인해 중국의 대기오염이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거기에다가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사막화가 가속되면서 거기에서 시작된 황사 또한 심각합니다.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도의 뉴델리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뉴델리 특파원으로 간 한 기자의 진술에 의하면, 뉴델리에 도착해서 비행기의 문이 열리는 순간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도 강한 화학물질이 타는 냄새가 기내로 밀려들어왔고, 뉴델리에 사는 동안 1년 내내 그런 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베이징이나 뉴델리에 특파원으로 생활하는 동안 집안의 방마다 공기청정기를 설치해보지만 공기오염으로 인한 고통은 멈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공기오염과 공해가 심각한데도 서방의 기자들이 베이징에 가야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회사에서 그곳으로 파견을 했기 때문입니다. 특파원들의 자조 섞인 하소연처럼, 월급쟁이들은 근무여건이 좋은 지역을 자기들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가라고 하면 어디든지 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는 대로 가야 합니다. 아니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그 길이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갔습니다. 때로는 그 길이 자신이 가고 싶지 않는 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가라 하셨기에 갔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도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두 번째 전도 여행의 마지막 순간과 3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 때가 그 배경입니다. 때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도시를 다녔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 바울이 얼마나 많은 지역을 다녔는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대략 선교 학자들은 5000km를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다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도 많은 시간이 걸릴 거리입니다. 요즘 같아도 큰마음 먹고 떠나야 하는 그 먼 길을… 배 타는 것, 걸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이동 수단이 없었을 그때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엄청난 길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하나의 사역을 위해 아주 독특한 행동을 합니다.
1. 머리를 깍았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여기 ‘머리를 깍았더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머리를 언제 깎으십니까? 사람이 머리를 깎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 멋을 내기 위하거나 또 취업 때 중요한 면접을 앞두게 되면 용모를 단정히 하기 위해 머리를 깍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기분 전환을 위해 헤어스타일 바꿀 때도 있습니다. 공부만 하기로 결심한 학생들도 머리를 짧게 깎아서 자기의 결연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한번은 우리 막둥이가 재수를 할 때 머리를 빡빡 밀고 온 적이 있습니다. 무, 이야기 안해도 다 알지 않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 머리를 깎는 다는 것은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주 보지만, 노사 간의 갈등이 일어날 때, 자신이나 단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삭발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 민수기에는 ‘나실인의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실인이란 -인생에서 특정한 시간을 구별해서 그 기간 하나님을 위해서만 살기로 헌신한 사람…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나실인으로 자기 머리에 칼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살기로 결심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민 6:2) 나실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은 일정한 율법의 절차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 중에는 머리에 관한 것도 있었습니다. 민 6:5절에 보면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그리고 민6:18절에 보면 기르는 것만 아니라 깍는 규례도 나옵니다. “자기의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자기의 머리털을 밀고…” 그렇다면 머리를 기르는 것도, 머리를 자르는 것도,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헌신을 결단하는 각오의 표현이었습니다.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온 바울이 오랜 여행 중에 흐트러진 용모를 다듬으려고 머리 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18절에 “…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헌신을 약속했던, 서원을 했던 그 맹세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지난 날 어떤 서원을 했는지 성경은 침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았던 그의 태도는 바로 서원한 것을 지키려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바울의 2차전도 여행’의 끝자락입니다. 바울의 2차전도 여행은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끝나게 됩니다. 23절에서 바울이 다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로 향했던 것은 새로운 여정을 위한 준비입니다. 복음을 위해 살았던 그는 전도 기간에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순간을 겪어왔습니까? 그런데 그 길을 또 가려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결단이 아닙니까?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이후로 그는 그동안 앞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한번쯤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름 그동안 내가 생각을 했던 경험이나 어떤 지식을 가지고 세상의 이치를 결정을 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이 때로 잘못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등산 전문가들이 산에서 조난을 당하거나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윤형방황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산행을 하다 길을 잃은 사람이 13일간을 방황하다 구조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12시간씩을 걸었지만 구조대에 발견되었을 당시 그가 걷고 있던 길은 처음 걷기 시작한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6킬로미터 안에서 원형을 그리며 계속 맴돌기만 했던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도 실제로 눈을 가리며 똑바로 걷지 못합니다. 20미터 정도를 걸으면 4미터 정도의 간격이 생기고, 계속 걷게 되면 결국 큰 원을 그리며 돌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윤형방황’(輪形彷徨)이라고 합니다. 자기라는 좁은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더 넓은 것을 보지 못하고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높은 곳을 올라 다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요즘도 리더십을 위해 쓰여진 책 가운데 꾸준히 읽히는 책 가운데 밥 포드의 「하프타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가운데 “성공추구에서 의미 찾기로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만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인생의 신기루 같은 성공은 인생의 모든 가치를 파괴시키고 우리를 허무 속에서 떨게 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결산이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에 내 삶을 바치며 살아 왔느냐 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느냐, 내 이름이 남느냐, 그런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과 기회를 발견하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일 대문에 내 인생은 보람 있었고, 신바람 나고, 놀라운 인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평생의 보람 있는 가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깍고 이제 새로운 사역을 위해 그가 했던 일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1. 인정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울이 겐그리아에서 서원한 후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바울에게 좋은 인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떠나지 말고 이곳에 더 머물러 있으면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허락지 아니하고 에베소를 떠났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은 따뜻한 사랑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의 간청을 거절한 이유는 그가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으며 하나님께 서원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서원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여호와의 장막에 유하며 성산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시 15:4). 지키지 못할 서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 경우는 그냥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서원 후 응답을 받았다면 지켜야 합니다. 나는 서원을 잊고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서원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차지한 후유증으로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그가 벧엘 광야에서 노숙하게 됩니다. 그날 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나를 지켜 주십시오.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십시오.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세 가지를 간구한 뒤 그렇게 해주시면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돌기둥을 세운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서원기도였습니다(창 28:20∼22). 하나님은 야곱의 기도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란 생활 20년 동안 지켜주셨고, 갑부가 되게 해주셨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서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딸 디나는 성폭행을 당했고, 아들들은 세겜 주민을 대량 살상하는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 외에도 입다의 서원(삿 11:29∼31), 한나의 서원(삼상 1:10∼11) 등 사례는 많습니다. 대부분 서원기도는 위급할 때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응답이 절박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입다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암몬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나님이 암몬과의 싸움에 승리를 주신다면 이기고 돌아올 때 맨 먼저 내 집 문에 나와 영접하는 자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가 암몬을 이기고 개선할 때 맨 먼저 나와 영접한 사람은 입다의 무남독녀였고 그는 서원대로 실행했습니다. 한나의 경우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뒤 사무엘을 낳았고 젖 뗀 후 곧바로 드렸습니다. 서원은 반드시 이행할 것을 전제로 한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함부로 서원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고 일단 서원한 것은 이행하는 것이 신실한 신앙의 징표입니다.
사람끼리의 약속도 지키는 것이 건강한 인격인의 자세입니다. 약속을 무시하고 파기하고 없었던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믿고 사귀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의 간청을 단번에 거절한 것은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에 새 힘을 얻고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서원하며 머리까지 깎았는데 사사로운 인정에 매여서 중요한 일에 시간을 누출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에베소 사람들의 간청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원을 위한 바울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훌륭한 신앙인은 언제든지 NO와 YES 가 분명해야 합니다. NO와 YES를 분명히 하려면 때로 순교를 각오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순교란 죽고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때로 손해도 각오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손해가 두려워서 분명히 NO 하여야하는 경우에도 YES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우에 발생하는 모든 손해는 하나님께서 천배로 갚아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서원을 위한 바울의 신앙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21절에 보면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가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마디로 바울은 자기가 좋은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즉 바울의 생각으로는 에베소에 더 남아서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좋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있다면 내 주장, 내 생각, 내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그 고민을 아시나요? 왜 흐르는 땀이 피가 되도록 그렇게 통곡하시며 울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라고 하는 가장 가혹한 처형방법에 의해서 처절하게 죽어가야 하는 그 길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처럼 ‘할 수만 있으면’ 그 길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앞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순종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랑의 여러분!
이제 결실의 계절의 계절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신정아 씨 인터뷰 기사가 나왔습니다. 예일대 박사라고 학력을 위조해서 대학 교수도 하고 광주비엔날레 예술 감독도 했고, 고위공직자와 스캔들도 있었죠. 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과정들을 쭉 피력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터뷰를 한참이나하고 맨 마지막에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정아씨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도대체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라는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분이 자신의 과오를 함축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해선 안 될 사랑을 했고, 돈으로 학위를 사려 했다. 땀 흘려 한걸음씩 가야하는데 잘못된 지름길을 선택했다. 성실하지 못했고 내 인생관이 잘못돼 있었다.” “죽도록 창피했다 죽도록 반성했다… 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 저는 그 인터뷰를 보면서 본인이 말했던 그 잘못된 지름길을 추구했던 그런 인생관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저는 그 인터뷰 기사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허무한 길을 걷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호소하는 듯한 소리로 들려졌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닙니다. 이오니카 선교사로 떠났다가 꽃한번 피지 못한채 순교한 짐, 엘리어트의 이야기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우리 교회에서 한생을 믿음으로 사신 분들이 이젠 거동조차 못하며 병상에 계시는 분들 7명의 병원과 집에를 심방했습니다. 불과 5년 전만해도 그렇게 당당했던 분들인데... 이젠 병상에 누웠거나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정말 가여운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내 얼굴을 꼭 끓어 안고 뽀뽀를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결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 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머리를 깍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정에 이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며 또 길을 갑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잠깐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러나 꿈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꿈을 향해 결심하시고 성령의 인도와 그 능력을 붙잡고 내게 주어진 기회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