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테니라는 목사님은 “갓 캐처스” 책에서 부흥을 태동시키는 힘을 ‘배고픔’이라고 정의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기대하며 사모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모하고 기대하는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먼저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 아침 함께하는 본문은 제3차 전도여행의 장도에 오르게 됩니다. 안디옥에서 불과 한 달 남짓 쉼의 시간을 가진 후 여독이 풀리기도 전 그는 다시 전도 여행길에 오른 것입니다. 바울의 제2차전도 여행 여정의 가장 핵심적인 선교 전략지가 고린도였다면 제3차전도 여행의 핵심적인 선교 전략지는 에베소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어주시고 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심 앞에 그 심령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열정을 누구도 꺼뜨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여기 에베소에서 약 3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이 도시의 복음화에 전력투구합니다. 바울 당시 에베소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으며 인구가 한때 30만에 달하는 곳이었습니다. 로마 당시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신 로마로 불리웠습니다. 무려 2만 5천명을 수용하는 대 극장, 체육관, 음악당과 거대한 쇼핑상가와 대 목욕탕 시설이 있는 도시로 세계의 많은 여성들이 에베소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후 수시로 에베소에 들러 보석과 화장품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석주 127개가 동원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테미 신전에서는 매년 5월에 세계의 호사가들을 불러 모으는 아테미 여신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도시의 겉모습일 뿐 이미 영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버린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복음인 것을 확신했고 그래서 자신의 고귀한 인생의 시간을 이 도시에 투자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성령의 충만함에 힘입어 세 가지 중요한 사역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바울은 주의 제자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씀 사역, 이것이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바울에게는 여러 가지 놀라운 은사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치유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의 치유능력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오늘 본문은 기록하기를 “희한한(놀라운) 능력”(11절)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2절에서는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갔다”(11-1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치유사역, 이것이 에베소에서 행한 바울의 두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세 번째 중요한 사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축사(귀)사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다시 읽어보면,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능력이 얼마나 희귀한지, 바울의 손수건이나, 그가 텐트를 만들 때 입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들에게 얹으면 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악한 귀신들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12절). 그런데 그 당시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 지역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신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많은 우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자연히 에베소에는 마술을 하는 사람들, 주문을 외우는 주술가들, 그리고 소위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들(Exorcist)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모든 종류의 악한 세력들과 능력대결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믿은 자들의 영적 점검입니다. 이 에베소에는 이미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들은 성령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 물어보았습니다. 바울의 질문은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도전적이고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냥 예수 믿으면 되는 거지 무슨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이 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그 중심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가 오늘 이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예수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각 자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성령 충만함을 요청하는 말입니다.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새 생명을 얻는 것이고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즉 죄를 이기는 능력, 마귀를 이기는 능력,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받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우리 속에 있는 새 생명을 키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평생 한번이면 족하지만 성령 충만은 거듭거듭 받아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하는 것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2절에 보면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묻습니다. 3절에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고 할 때는, 그냥 믿어서는 안됩니다. 순간적인 감정으로만 믿어서도 안됩니다. 말로만 믿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정말로 예수 믿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증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1장 13-14절을 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님의 인치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치심이란 말은 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보증한다는 말입니다. 인증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성령님이 보증을 하고 인증을 해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셔야만 그 믿는 것이 진정으로 믿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약해진 것 같습니다. 마치 면역력이 약해진 사람들처럼,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흔들립니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으면 이 힘든 일을 이겨나가기 위해서 믿음이 더 강해져야 하는데 믿음이 더 약해집니다.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그냥 마귀한테 귀한 것들을 내어 줍니다. 바쁜 일이 있으면 신앙생활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됩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지칩니다. 짜증스러워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점검해보야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내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님이 왜 오셨습니까? 우리들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하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무기를 주십니다.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마음과 육체까지 치유하시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교만한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거친 사람이 온유해집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이 절제하고 인내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우리의 성품까지 변화시킵니다.
두 번째로 말씀이 약하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그리고 나중에 보니까 10절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강론을 하는 일들을 두 해 동안 했다는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여러분, 초대 교회의 제자훈련은 단지 고급지식을 나누어주는 그런 사역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임재 앞에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지를 피를 토하듯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배우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17-20절을 보십시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여기 보십시오. 바울이 증거 한 말씀 앞에 에베소 전체가 영적인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은 오만이나 되는 엄청난 마술 책들을 가지고 와서 불사르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 책을 최고의 경전으로 여기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삶은 마술에 달려 있었고 그들이 마술에 종사하고 있는 한, 그 책은 그들의 마술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책을 중심으로 가치가 형성되고 사람들의 삶이 그 책에 구속받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그 책이 가르치는 바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니까 자신들이 붙잡은 이 마술 책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치 있게 생각해선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두 무가치하게 여겼습니다. 에베소 고장 한가운데서 하늘로 치솟는 불길과 함께 타오르고 있는 그 마술 책들과 함께 이교도적인 그들의 모든 삶도 같이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신 우상 숭배의 종말이며 여호와의 인정함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의 종말이며 복음의 승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 에베소 교회에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을 보십시오. 무엇이 이 오만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헬라인들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떨며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예수의 이름을 떨리는 음성으로 찬송하게 만들었습니까? 에베소 사람들로 하여금 평생에 생업처럼 여겨 오던 마술책을 불사르며 여호와를 노래하게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자복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만들었습니까?
에베소 사람들로 하여금 허탄한 일을 버리고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17절에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란 말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영적인 실재 앞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만드는 복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은 교회 안에 이러한 영적인 실재를 다룰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교회를 권세 있게 만듭니다. 부흥이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와 구별되는 신적인 권세를 가진 공동체임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개인에게 있어서나 교회에게 있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위대한 영적인 부흥을 맞이하고 권세를 가진 공동체로 나타날 때 세상은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부흥이 아니고는 결코 교회가 영적인 권세를 회복할 수 없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언제나 플로렌스에서 있었던 '허영의 화영식'이라고 불리워지던 종교개혁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사람은 기롤라모 사보나롤라 였습니다.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그는 말씀과 함께하는 영적인 권세를 설교 속에서 혁혁히 드러내 보여 주었던 종교개혁 이전의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말씀 선포를 듣고 플로렌스의 시민들은 회심하였으며 도시 전체는 그 설교자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의 설교는 하누 간 동안 그 도시의 가장 커다란 뉴스거리였습니다. 건달들은 사라지고 감옥은 텅텅 비었으며, 부랑아들의 유행가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꾸었습니다. 백성들은 그 동안 몰두해 오던 허영과 사치를 버렸고 음탕과 광란의 상징이던 사육제의 행사는 그쳤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가발과 가면, 세속적인 책들과 음란한 그림들을 태웠습니다.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며 골목고록 다니며 마차를 끌고 집집에서 이런 쓸데없는 것들을 거두어들였습니다. 플로렌스 시민의 관심은 세속적인 것에서 멀어졌습니다.
헛된 것들은 거두어졌고 세속적인 책들과 음란한 그림, 유치한 가면과 유행하던 가발 같은 것들을 불태우기 위하여 모았습니다. 거두어들인 물건을 팔각형의 피라밋 모양으로 쌓았습니다. 둘레가 72미터이고 높이가 18미터였다고 하니 그 산적함은 마치 산더미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각성한 이 백성들은 찬양을 부르며 종을 치며 여기에 불을 붙였습니다. 때는 1497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플로렌스의 '허영의 화형식'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부흥은 교회를 권세 있게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부흥이 아니고는 세상을 항해 교회가 영적인 권세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부흥을 경험한 교회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위대한 능력으로 세상을 근본적으로 이렇게 고치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을 맞이한 시대에 그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영적인 권세를 소유하게 되었을때 그들은 오늘날의 평범한 교회가 수백 년이 걸려도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선교의 업적들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수많은 회의와 토론이나 많은 물질로도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이 세상의 변화를 그들은 변화된 교회 속에 내재하는 영적인 권세를 통하여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부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부흥(revival), 교회의 부흥, 민족의 부흥이 무엇입니까? 숫자가 늘어나고 예산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고는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고백과 함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부흥의 시작입니다.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인생에 부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흥도, 민족의 부흥도 없습니다. 여러분 최근에 성경을 읽다가 멈추어 서서 감격하며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무릎 꿇고 기도해 본 적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 신앙은 어느새 메말라 버린 것입니다.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깨달음이 더 이상 없고 삶에 변화도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세속의 대명사로 불리원지는 이 에베소 한복판에서 우상 서적과 음란 서적 그리고 온갖 퇴폐적인 것들이 검은 연기로 불에 타 하늘로 치솟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다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바 된 소수의 헌신된 제자들과 함께 주의 능력을 붙잡고 일어섰을 때 그들의 말 한마디에 사탄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고 그들을 사로 잡던 모든 온갖 더러운 영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지금이 바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할 시간이요, 지금이 바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시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사신 우상 숭배의 종말이며 여호와의 인정함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의 종말이며 복음의 승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엄청난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나를 써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