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 목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목표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그 삶은 의욕이 넘치고 또 장애물이 있어도 쉽게 뛰어 넘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슨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삶이란 것은 그 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잘못 치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한번 공이 엉뚱한 곳으로 가면 그 다음 골프 경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렇습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경우에 따라 산만해지기도 합니다. 최신 유행이나 따라 다닙니다. 다니면서 값싸게 얻은 인스턴트 해답이 만고 불변의 진리인양 맹신합니다. 그리고 이 일 하다가 안되면 저 일을 하고, 전략도 없고 목표도 없고 일정한 우선순위도 없어 보이게 행동합니다. 결국은 작은 일을 붙잡으려고 큰 일을 놓쳐 버리는 참 안타까운 인생을 살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을 걸 만한 목표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나는 오늘 죽어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목표가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또 어떻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가지고 사는 한 사명자를 만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밀레도에서 바울이 장로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그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으로 비장한 심정으로 자신이 3년의 세월을 에베소에 머물면서 증거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17-19절에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는 자신의 희생의 경험을 한마디로 <모든 겸손과 눈물>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의 소명을 위해 또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희생 중에 희생은 자신의 자존심조차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희생을 당할 때 그것이 일회성의 고난이나 희생이라면 한번만 꾹 참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것은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일찍 산 순교자였던 안이숙 여사가 옥증에서 먼저 순교하러 형장으로 나가는 분들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죄송하다고 하자 그들은 그녀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우린 죽으면 그만 영광에 들어가겠지만 자네는 살아서 고난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우린 걱정 말고 부디 자네 자신을 위해 기도를 쉬지 말게나.”
바울이 본문에서 회상하는 에베소 사역의 고백을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19절을 다시 읽어 보면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는 실로 오래 참음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다만 하나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바울이 비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의 의미는 예루살렘에 가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23절에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가를 말입니다.
바울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 40명을 중심으로 ‘바울 살해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환난이 기다린다 하여도, 내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결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로마에 갈수만 있다면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까짓 것 환난이나 결박당하는 것쯤은 개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은 담대함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성령에 매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여”라는 말은 원어로는 “데데메노스”라는 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한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 결박해서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오히려 자기가 성령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복이 심하게 됩니다. 때로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내 생각, 내 경험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가는 도중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갑니다. 성령께서 다 잘 아시고 나를 위해 최선의 길로 이끄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히 11:8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을 떠날 때 이야기입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가는 동안 어떤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가라는 명령만 받고 길을 나섰다는 것입니다.
창 12:1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이 고향에서 길을 떠나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보여 준 땅이 아니고 보여 줄 땅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후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가면서 하나씩 보여주시면서 인도하십니다. 마치 징검다리를 놓는 것과 같습니다. 한 발자국 건너면 돌 하나를 놓으십니다. 그 돌을 건너면 그 다음 돌 하나를 놓으십니다. 우리는 그저 강 건너보다도 앞에 놓인 돌을 보고 그 돌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정 중심적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 중심적 인생입니다. 과정 중심적 인생은 오늘 하루하루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후일에 위대한 결과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 중심적 인생은 후일의 위대한 결과를 꿈꾸며 오늘 하루하루 주님의 인도하심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과정에 성실치 못합니다. 결국 위대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 말을 원어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각 도시에서 결박들과 고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내게 엄숙하게 증거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동안 곳곳에서 결박당할 일들과 고통 겪을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지금 바울은 밀레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우선 배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가이사랴까지 가야합니다. 가는 동안 여러 항구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 또 여러 도시를 거쳐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행 자체만도 이미 60이 넘은 노년기의 바울로서는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위안을 삼고 용기를 내 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입니다. 때로 옥에 갇힐 것이랍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랍니다. 여행 자체도 겁이 나는 일인데 결박과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그래도 바울은 겁내지 않았습니다. ?까요? 성령께서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가졌던 미국대통령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는 1920년대의 미국의 대경제 공황 당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미국인들에게 비전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이 위기를 잘 돌파하는 일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개인적으로 두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패배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다음 해에 캄포벨로의 여름 별장에서 찬물에 빠져 하반신 불수라는 치명적인 장애를 입었습니다. 쇠붙이로 받침대를 만들어 다리에 붙이고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고, 옷도 자기 손으로 입지 못하고 두 다리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아내 엘레나가 곁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즈벨트가 엘레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런 불구자가 되었는데 지금도 나를 사랑하오?" 엘레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다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당신 전부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루스벨트가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시 도전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경제공황을 수습했고, 미국 역대 네 번에 걸쳐 대통령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두려울 때 용기를 주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곁에 계셔서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고 앞을 행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용기 있게 앞을 향해 나아가면서 더욱 주의 사랑이 깊어져 감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명연설을 들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삶을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제시한 메시지를 본 일이 없습니다. 24절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여러분,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뽑으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말씀 속에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게 만드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사명’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명’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성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못하고 죽으면 한이 남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했어도 그 일을 못했다면 결코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사’자는 사람 목에 칼이 걸린 것이고, ‘명’은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사명이란 목숨 걸고 해야 할 일이고,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사명을 버린 사람, 사명을 피해서 도망가는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완수한 인생은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명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았습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가 고린도후서 11:23절 이하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감옥에 갇혔습니다. 수없이 많이 위협을 당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헐벗은 상황에 처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끝까지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고, 그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과 똑같은 사명을 주시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맞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사명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토크쇼의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는 “이것이 사명이다”는 자서전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짐이 아니라 사명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버림받아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라난 그녀입니다. 아홉 살에 강간을 당하고, 열네 살에 사생아를 낳았고, 20대까지 마약에 빠져있던 그녀가 세계 최고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 것은 사명에 대한 자각입니다.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서 내 인생을 살고, 내 인생의 종착역에 내가 어디에 설 것인가를 알고 사는 사람은 사명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습니까? 남이 겪지 않은 아픔이 있습니까? 더 큰 비전이 있습니까? 무엇을 보면 부담이 생깁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사명을 위해 사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전진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을 잃어버린 사람은 땅에 것에 집착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갑니다. 결국은 방황하고, 흔들리는 인생으로 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영혼을 살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태신자를 세웁니다. 그들이 교회에 한 번 나온 것으로 인생이 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준비하며 오늘 그 이름을 적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반드시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때가 되면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인도한 그 사람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것입니다.
15분이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유망한 청년이 30세에 대학원을 마치고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 놓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그는 그만 병이 들어 의사로부터 15분 후면 죽는다는 선고를 받게 됩니다. 그는 불안과 초조에 떨며 몸부림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15분, 14분, 13분 흘러갑니다. 그때 "편지요." 하는 소리와 함께 편지가 배달됩니다. 내용은 억만장자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으로 그 삼촌의 재산 상속자가 ?년이라고 하는 변호사의 통보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또 흘러 시계는 이제 청년의 생명이 10분, 9분, 8분이 남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때 다시 "편지요." 하면서 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내용은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시간은 생명이 7분, 6분, 5분이 남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때 또 "편지요." 하면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결혼을 승락했다는 애인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시계는 멈추지 않고 3분, 2분, 1분이 지나면서 마침내 청년이 숨을 멈추는 것으로 연극은 끝이 납니다. 억만장자의 유산 상속도, 박사학위도, 결혼 승락도 그 청년에게는 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15분은 15개월이 될 수도 있고 15년이 될 수도 있고 그 두 배인 3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치를 붙잡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다면 15분이든, 15년이든 의미가 없기는 똑같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 사명을 결코 잊어본 적도 없고, 그 사명의 길에서 한 순간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려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그의 인생 마지막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디모데후서 4:7-8)
여러분,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 훗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사명의 끈을 붙잡고 사명에 이끌려 성령에 붙잡혀 믿음을 지키며 내 삶을 달려 왔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멋진 삶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