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계십니까? 그리고 만약 여러분의 생명의 시간이 다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게 된다면 여러분의 후손에게 무슨 말씀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우리가 흔히 죽음에 임박해서 후손들에게 남기는 말은 유언(遺言)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음이 임박할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진솔해집니다. 평소 살아가면서 남의 눈치를 보고 본래의 자신이 아닌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던 사람도 가면을 벗고 진실해집니다.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서 쉼 없이 달려가던 사람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더 크게 성공을 하지 못한 것이나 더 출세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인생에서 껍데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3년간 눈물로 가르쳤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35절에 보면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오늘 바울은 이 땅에 그리스인들이 살아갈 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이야기를 합니다. 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는 이 말씀은 바울의 삶의 철학이요, 가치관입니다. 오늘 이 자세는 여기 모인 우리 역시 닮아가야 할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1. 우리는 하나님께 거저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피의 댓가를 지불하여 구원의 자녀로 삼은 자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한 최대의 사건은 요한3:16에서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의 사건일 것입니다. 여기 '주셨다'라는 표현은 우리 한글 성경이 너무나 단순하게 번역을 해놓아서 주고받는다 할 때의 그런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주셨다'라는 표현보다 '샤워하다(shower)'라는 표현이 원문의 뜻을 드러내는 데 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샤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독생자인 예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내시고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써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또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여 "보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사랑을 폭우같이 넘치게 부어 주셨는가!"라며 흥분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아닙니까? 거져 받은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요한3:16을 경험하고 이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얼마나 요일3:16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라는 신학자는 요한3:16을 체험한 모든 성도들이 요일 3:16에 순종하고 있지 않는 한 아직 그의 믿음의 삶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span>. 요일3:16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까? 거져 받았으니 나누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 주님은 주는 자에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주님 앞에서 계산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눔은 모든 행복의 근원입니다. 재물을 나누는 것은 조금 나누는 것이고, 지혜를 나누는 것은 많이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모두 다 나누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가지고 만 있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나누어야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나누어 줄 때 느낍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개발도상국가에서는 3초마다 한 명의 아동이 죽고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고, 거주할 집이 없기 때문입니다. 월 2만원이면 4인 가족이 한 달을 생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과 기도로 후원하고 있는 90여 군데의 선교지와 미자립 교회는 여러분의 섬김과 나눔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 아십니까? 우리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우리가 조금만 절약하고 나누면 얼마든지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언젠가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날이 옵니다.
2. 이 나누는 일은 생명을 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일정한 배출이 일어야 합니다. 음식을 섭취만 하고 배출하지 않으면 건강이 유지가 안 됩니다. 우리의 건강은 잘먹고 잘 배출을 해야 합니다. 최근에 생기는 많은 병들은 섭취하고 배출이 원활하게 되지 못하여 생긴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성인병의 원흉인 비만은 받기만 하고 나눔이 일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병입니다. 이런 반면 굶어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도한 음식 섭취로 한 쪽은 비만으로 죽고, 한쪽은 굶어서 죽습니다.
나눔이란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기본적으로 흐름에 있습니다. 활발한 신진대사가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먹는 물도 흐르지 않고 고여 있기만 하면 물이 썩고 생명을 위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갈릴리 호수가 있는데 거기는 물이 맑고 깨끗하며 많은 어족들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호수는 레바논의 헐몬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계속 흘려 보냅니다. 그러니까 각종 어족이 풍성합니다. 그러나 이 갈릴리 물을 공급받는 사해바다는 염분이 많고 물이 좋지 않아서 어족들이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갈릴리 호수는 요단강 물을 받아들여 아낌없이 밑으로 내려 보냅니다. 그러나 사해 바다는 물을 받기만 하지 내어 보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국 그 물이 썩고 부패하여 생명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34절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나눔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 무슨 말입니까? 자신은 에베소 교회를 섬길 때, 깨끗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폐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을 돕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십자가의 그 은혜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알았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면 아무도 바울과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가히 그의 동역자들 가운데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습니다. 누가 바울의 선교적인 업적과 비교될 수 있습니까? 아볼로가 비교될 수 있습니까? 바나바가 비교될 수 있습니까? 이들의 업적은 바울의 업적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확실히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많이 일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로마서 1:14-15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기가 빚을 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진 빚은 하나님께 진 은혜의 빚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은혜의 빚을 갚기 위해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복음은 내가 받은 이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고도 남습니다.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만약 무기수가 감형을 받아서 출옥을 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이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만나고 복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복음은 내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이 비밀이 나만이 가진 비밀이 될 수 없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내가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길 때 이때가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그때의 행복감은 너무 커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맛을 잃어버립니다.
눈만 뜨면 예수님 생각이 납니다. 혼자만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빚진 자 의식으로 연결됩니다. 너무나 좋은 것을 내가 알고 있다면 마음에 자연스러운 부담감이 생깁니다. 어떤 불치병이 나은 사람은 주변에 그런 고통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말해주지 않으면 죄책감이 몰려오는 것은 정상입니다. 좋은 것은 함께 누리고 싶어집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 혼자만 좋은 것을 누리고 남들에게는 알리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좋으면 좋을수록 빚진 자의 의식이 강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진 채무의식이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실토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한 위기� � 넘겼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고 자기 공로를 이야기할 만도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수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나누는 일이 아닙니까?
3. 주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두 가지 유형의 인생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는 주로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숙해 가면서 우리는 조금씩 주는 것,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배워가기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 단체는 서로 나눔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의 나눔, 고통의 나눔, 기쁨의 나눔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는 나눔이 있는 곳과 나눔이 없는 곳으로 분류가 된다고 합니다. 지옥은 항상 부족을 느낍니다. 긴장과 경쟁이 있게 됩니다. 반면에 천국은 나누어주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풍족하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꿈 가운데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식사시간에는 똑같이 아주 푸짐한 진수성찬이 차려졌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 윤기가 흐르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서도 모두가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얼굴이 빼빼 말랐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금방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서 쓰는 젓가락은 엄청 길었습니다. 그래서 그 긴 젓가락을 가지고 음식을 집어서는 자기 입에 못 넣게 되어 있었습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긴 젓가락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서로 사이좋게 마주 앉아서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서, 그것을 식탁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의 입에 친절하게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배불리 맛있게 잘 먹고 만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그 반대였습니다. 그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에 넣을 수가 없는데도 그들은 욕심스럽게 자꾸 자기 입에만 넣으려고 했습니다. 결국은 다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옥에서는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서도 그것을 먹지 못해서 모두가 영양실조에 걸려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잠언 11:24-25절을 보십시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안 먹고 안 쓴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부자가 되는 비결은 나누는 것입니다. 나누기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집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더욱 윤택해 집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참 역설적인 것입니다. 남에게 많이 나눠줄수록 자신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나누면 줄지 않고 더 많아집니다. 바닥이 나지 않고 더 채워집니다. 그것이 나눔의 역설이며 나눔의 신비입니다. 게다가 보너스까지 얻게 됩니다. 넘치는 감사와 기쁨, 마음의 행복과 평화, 풍요로움과 따뜻함, 주변과의 관계 회복 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불우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먹을 것이 없어 아사 직전에 이른 적이 있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사는 곳에 전쟁이 나서 그들은 매일 죽음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 UNICEF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라는 한 구호단체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쳐서 소녀는 굶주림을 해결하고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장성하여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이 소녀의 이름이 오드리 헵번입니다. 그가 그렇게 유명한 배우가 되었을 때 그는 자기를 구해 준 분들을 위해 그 단체의 홍보대사가 되어 전 세계를 다니며 구호를 도왔습니다. 말년에는 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습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매력적인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려면,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라. 날씬한 몸매를 원하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라.
나이를 먹어가며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이 두 개의 손을 갖고 있는 이유이다.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는 것을.” 헵번의 말 가운데 ‘우리가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한 손은 나 자신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남을 돕기 위해서 있다는 말입니다. 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나만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자신을 주러 오신 이 십자가의 사랑 앞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애플의 신화를 일군 스티브 잡스가 죽고 나서도 욕을 먹는 것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펫과 같이 사회에 환원하여 귀한 일도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오로지 기술 개발과 돈만 끌어 모으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이 세상에서 우리는 늘 주는 자가 되어 줌으로 되돌려 받는 그런 멋진 축복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비가 내려와 이 땅에 물이 고이게 하고 그 물에서 다시 수증기를 만들어 비가 되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나누어 주고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이렇게도 멋들어진 삶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귀한 말씀을 주셨는데 이 말씀을 사모하여 예배에 나온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처럼 놀라운 삶으로 더욱 멋들어진 남은 삶을 살아가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