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귀를 열어주셔서, 오늘 말씀을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의 설교로 듣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는 나오지만, 도중에 잘못되고 나중에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망한다는 말은 세상에서 잘못된다는 의미이거나, 나중에 구원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복음을 듣지 못해서 아까운 사람들이 영원히 멸망당하도록 내버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에 특별히 자기 자녀들에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막13:33절 같은 말씀이 아주 대표적입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살전5:6절도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니라." 잘못되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들거나 혼몽한 상태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하고, 잘못된 길로 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도록, 깨어있도록 하기 위해 2가지 경보시스템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경고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인 경고입니다.
자!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지가 500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원래 마르틴 루터는 목회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법조인이 되기 위해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방학이 돼서 고향에 다녀오는 도중 천둥번개를 만나게 됩니다. 곁에 있던 친구는 번개를 맞아 죽고 자기는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가 기도했습니다. “살려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이 사건 직후 루터는 에르푸르트로 돌아와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습니다. 금식도 많이 하고, 고행하면서 수도하고, 선행을 많이 베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루터가 머물고 있는 수도원 숙소에서는 창문을 통해 공동묘지가 보였습니다. 그 공동묘지를 바라보면서 루터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어떤 존재로 설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루터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죄를 지으면 신부님 앞에 가서 고해성사를 해야 합니다. 루터도 마음속에 죄가 떠오르기만 하면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죄가 생각날 때마다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오니까 신부님이 ‘제발 죄를 좀 모아놓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럼에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로마서 1:17절의 말씀 앞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그의 구원관, 그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은 어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구원의 진리를 통해서 당시 로마 교회를 바라보니까, 로마 교회가 행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너무나도 성경말씀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진리가 사라진 전통과 권위를 성경보다 우의에 두는 이와 같은 악행을 목도한 루터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관행을 95가지를 적어서 벽에 붙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이 진리는 마치 어둠 속에 횃불처럼 타서 수많은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돌아오게 하는 진리의 승리였습니다.
종교개혁의 모토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reformata Ecclesia reformanda) 그래서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혁교회는 늘 자신을 계속해서 개혁하려는 노력을 해 오고 있습니다. 개혁교회의 후예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계속해서 개혁해 가야합니다. 목욕하고 얼마 안 가서 또 목욕을 하듯이 개혁하고 머지않아 또 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켜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다음 주일 11/5일에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1차, 2차 태신자를 세워 나름 모두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과 이 세상에 등장할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소규모가 아닌 모든 민족에게 온 세상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이 굉장히 엄숙한 명령이기에 학자들은 대 사명, 제일 큰 명령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릅니다.
신약성경에는 이 지상명령이 약 5회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마28:19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의 제자를 삼으라고 했으니 대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으로 넘어가면 16장 15절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또 누가복음 24장 47-48절에서는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합니다. 구약에 기록한 대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이 모든 일에 너희가 증인'이라는 말은 '너희는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명령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21절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합니다. 곧 '파송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드디어 클라이맥스인 사도행전 1장 8절에 이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은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최고의 통치자요,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이 왕 중의 왕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는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엄숙한 명령 앞에 아무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하고 부르는 사람은 예외 없이 이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수롭게 않게 여기면서 세상을 산다면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도 안하고 그저 적당히 신앙생활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은, 천당이야 갈 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하고 살았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만큼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모두에게 대단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형제들을 볼 때 '아, 이 형제 구원해야지. 예수 믿도록 해야지. 어떻게 하면 전도할 수 있을까?' 하면서 안타까워 합니까?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은 상당히 큽니다. 사마리아 지방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 그 때에 벤하닷 왕이 아람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서 성을 포위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나마 외부에서 들어오던 양식 줄도 끊어져 성안에 갇힌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길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율법에서 금하는 나귀 머리도 없어서 못사는 지경이 되고 심지어는 엄마들이 너무 배가 고프니까 서로 약속을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 자식을 삶아서 잡아먹고 내일은 네 자식을 잡아먹자. 그리고는 먼저 잡아먹고 다음날 다른 자식을 잡아먹으려 하는데 엄마가 자식을 내놓지 않아서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어느 나라에서는 너무 배가 고파 인육을 먹었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합니다만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도 너무 배가 고파 사람을 잡아먹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얘기입니까? 이런 상황이 진행되는 가운데 마침 사마리아 성문 앞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문둥병자 네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굶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성안에 들어가도 거기는 기근이 심하니 죽고, 여기 앉아있어도 죽고, 어차피 죽을 것이면 아람 군대에게 가서 항복하고 살려달라고 해보자. 살려주면 우리가 사는 것이고, 죽이면 어차피 죽을 것이니 죽자--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가서 부딪쳐보자. 밑져봐야 죽기밖에 더하겠나? 라는 생각으로 적진을 향해 갔습니다. 이렇게 아람 진을 향해 출발한 시간은 황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둥병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아람 진을 향해 떠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에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아람군인들이 있는 곳에 병거소리 말소리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군인들은 서로 바라보며 두려움 가운데 소리쳤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고 연합군을 돈주고 산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큰 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엄청난 군대임에 틀림없다.’ 그리고는 황혼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다급하게 도망가느라고 장막, 말, 나귀, 먹을 것 모두 다 놓고 정신없이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도망가고 난 후 문둥이들이 이 군인들이 진치고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들어가 보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가서 배부르도록 먹고 마시고 은 금 좋은 옷을 가지고 가 숨겼습니다. 또 다른 장막에 들어가 보니 그 곳도 비어있습니다. 가서 좋은 것은 가져가 숨겼습니다. 한 참을 이렇게 하다가 생각해보니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문둥이 지만 지금 이스라엘 성중에는 이 사실도 모르고 많은 동족이 이 성밖에 나와 보지도 못하고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이 소식을 알리지 않고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 지낸다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9절에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 무슨 말입니까? 자신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소유한 것을 깨달았을 때, 이것을 나누고자 한 것입니다. 마치 마틴 루터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 앞에 인생이 바뀐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문둥병자와 같은 아무 힘도 없는 그가 당당히 일어선 것은 바로 복음 - 이 엄청난 기쁜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꼭 교회의 성장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연민 때문에 전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이미 들었고, 때로는 매스컴을 통하여 기근으로 죽어가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모습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멀리 북한이나 아프리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위에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 이웃 중에 아니 바로 우리 곁에 먹지를 못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 보면서도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기에게는 충분히 도와 줄 힘이 있고 풍족한 양식이 있는데도 눈앞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인생을 보고도 모른 채한다면 그러한 사람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저와 여러분이 그와 같이 악독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물론 전도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전도의 열심과 구령의 열정이 있고, 그리고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누구든지 다 전도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미국 소매상 협회에서 세일즈맨들이 물건을 판매할 때 손님들에게 몇 번씩 권유하는가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단 한번 권유한다’가 전체의 48%를 차지했습니다. ‘두 번 권유한다’고 응답한 세일즈맨이 25%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 이상 권유한다’는 세일즈맨이 나머지 12%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세일즈맨의 판매 실적과 판매 권유의 상관관계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한번 이상 권유한다’는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이상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88%의 세일즈맨이 판매한 상품은 고작 20%에 불과했습니다. 한 물건을 팔기 위해 네 번 이상 권유하는 12%에 해당하는 세일즈맨을 프로 세일즈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을 파는 데에도 네 번 이상 권유하는 집념이 필요하듯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전도 해보고 ‘안 믿으면 저만 손해지 뭐’ ‘아무래도 구원받을 영혼이 아닌 모양이지’하고 물러선다면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성장의 요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니 성령 충만 6%, 기도 6. 3%, 목회자의 설교와 인격 23. 1%, 성도들의 전도 34. 1% 기타 32. 5%(교회위치, 교파, 구성원 등)를 차지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성도들의 전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성장은 전도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일어납시다. 하나님은 타이밍의 전문가입니다. 하나님은 조급하지도 않으시고 늦지도 않으십니다. 시간의 창조자시요, 시간의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도 "때가 차매" 보내셨지 때도 안되었는데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면 기막힌 타이밍으로 우리 삶을 간섭하시고 도우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문둥병자들이 죽기를 작정하고 사마리아 성문을 떠난 때는 언제입니까?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황혼이 질 무렵입니다.
다음 7절을 보십시오. 아람군대가 연합군이 쳐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정신없이 도망가기 시작한 때는 언제입니까?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역시 해질 무렵, 황혼입니다. 얼마나 정확한 타이밍입니까? 똑같은 시간에 한쪽은 출발하고 한 쪽은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간은 누가 조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누구에게 달려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믿음으로 행동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도 일하시기 시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해질 무렵은 다 쉼을 가질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일어났습니다. 깨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체하면 자신들을 저주하고 미워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동족들입니다. 그들이 이 소식을 안 들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어난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1885년 4월 5일에 인천항에 도착해서 한국을 돌아보고 난 뒤에 떠오른 생각을 쓴 시입니다. 그 시의 제목은〈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입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조선인의 황폐한 마음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했던 그 발. 입술에 복음을 담아서 어두운 곳을 향해 외쳤던 언더우드 선교사. 백 년이 지나지 않아 이 땅은 복음으로 가득 찬 땅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운 연세대학은 사학의 명문이 되어 수많은 일꾼을 배출하는 학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찾아갈 저 사람들의 가슴이 지금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불모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빛,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들의 가슴 속에 심어지면 머지않아 찬양이 솟아나오고 주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놀라운 삶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일부터 우리 교회는 “깨어 있으라”는 주제로 특새를 합니다. 전도는 기도 준비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 힘, 내 노력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엎드려야 합니다. 은혜 주시고 성령 충만케 하셔서 주님이 한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으신 것처럼 나에게도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이 심정으로 새벽을 깨우시기를 바랍니다. 평소 품고 기도하던 영혼들을, 그 열매를 추수하는 기회입니다. 꼭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