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2017-11-5 (터치 153 새생명 축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2-8)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11-05 | 조회: 915

  

오늘 저희 교회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마 이 가운데는 마음이 아직 닫혀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보나마나 예수의 이야기하는 것 뻔하고 예수 하면 그동안 참 듣기 싫은 분 중에 하나일 수 있죠. 그렇지만,

 

 

어차피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귀를 막고 앉아 있을 수는 없고, 여러분이 들으셔야 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마음대로 비판도 하고 거부도 하고 항의도 하셨지만, 여기서는 죽으라하고 들으셔야 하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들으실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또 새롭게 진리를 발견하게 하는 아마 신비스러운 체험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초대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대한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조금 불편하지만, 하나님이 잘해 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 시간을 조용히 앉아서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2017년도가 엊그제 시작을 한 것 같았는데 벌써 11월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희망을 안고 살아온 한해가 올해는 얼마나 많은 사고와 사건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구치소 수감이라는 국민적 고통이 일어났고, 정치의 혼란,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되는 말 가운데 헬 조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풀어 말하면 지옥 같은 한국이라는 뜻입니다.

 

 

한창 미래를 주도할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조국인 우리나라를 행해서 지옥 같은 한국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봅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을 3포 세대니 5포 세대니 7포 세대니 하는 말로 이야기합니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세대, 거기에다가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해야 하고, 더 나아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해야 하는 세대란 말 아닙니까? 더 나아가 요즘에는 ‘N포세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무한대로 포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파는 어느 개인, 어느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즘 서울 사람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한명씩 한강에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하루에 40명이 목숨을 끊습니다. 절망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너무 쉽게 절망해요. 절망하기에 삶을 포기하고 절망하기에 가정을 해체하고 절망하기에 공든 탑을 무너트리고 절망하기에 인간관계를 끊습니다. 절망하는 데에 너무도 익숙한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한 마디로 절망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유명하다는 병원, 용하다는 의사 다 찾아다녀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좋다는 약은 다 써봤을 겁니다. 그러나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의술로는 가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베데스다 연못가는 마지막으로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얽힌 전설이 있었는데, 무슨 내용입니까? 3-4절에 보면. “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어라이 연못은 가끔 물이 솟아오르는데, 천사가 내려와서 목욕� � 하는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구든지 물속에 뛰어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 고침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건 아마도 미신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요즘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간헐천(이따금 물이 솟아오르는 온천)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혹 그 온천수 때문에 병을 고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상황으로 추측컨대 물이 솟아오르는 것도 드문 일이고, 그런다 할지라도 불치병 환자를 고치는 치유의 역사가 나타날지는 미지수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단 한 명만 고침 받는다는 겁니다. 마치 로또 복권 맞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이 815만분지 1이라고 하죠. 수학적으로 제로나 마찬가지의 확률입니다. 전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헛된 소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현실이 어려워도 견딜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장 비참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소망이라고 붙들고 있지만, 그 소망은 성취하기도 어렵고 성취해도 나중에 헛된 것임을 알게 될 때 더욱 더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막장과도 같은 그곳에 온 사람들인데, 거기서도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같은 처지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마땅한데, 살벌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해야 됩니다. 그것도 헛된 소망을 위해서 말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란 뜻이건만, 자비는커녕 살벌한 경쟁만 난무하는 곳입니다.

 

이 베데스다에 들어간 예수님은 그들 중의 특히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5-6절입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누구를 보셨다고요. 서른여덟 해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이틀, 12년이 아닌 38년 동안 병을 앓으면서 차도가 없었다면 절망이 아닙니까? 38년 된 병자는 어렸을 때부터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생각 때문에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한 가닥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베데스다 연못까지 온 것, 사실이지만,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가 가졌던 기대와 소망은 이제 사라진 채, 자신도 모르게 만성 의욕 상실증에 걸린 버림받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말씀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은 얼핏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가 38년 동안이나 병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고 물으셨으니까요. 38년이나 병으로 누워만 있던 사람이 병 낫기를 바라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병이 나아 새로운 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무슨 말입니까? 그의 말 속에는 두 가지 생각, 불평과 핑계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38년 동안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불평이고 둘째는 항상 자기보다 한발 앞선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겼다는 핑계입니다. 그는 의욕상실증뿐 아니라 자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핑계와 매사에 불만 불평하는 병까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핑계병에 걸렸던 것이 그 환자뿐이었습니까? 그동안 나의 삶이 이렇게 나태하게 지속돼 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책임전가와 불만 불평이라는 병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와 나에게 연민어린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전혀 믿을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고 명령하셨습니다.

 

 

네 자리가 무엇일까요? 병자가 38년 동안 깔아뭉갰던 자리입니다. 원망과 탄식이 베여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자리를 치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런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나를 주저앉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힘들게 하고 변화 없이 살게 했던 운명의 자리를 깔고 살아온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38년은 얼마나 억울한 시간입니까. 자리를 깔고 막연하게 도움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낸 것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도박과 같습니다.

 

 

우리 삶은 요행이나 다른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놓인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막연한 기대감이나, 나를 도와주지 않는 사람에 대해 원망과 불평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족도 포기했습니다. 세상도 더 이상 그를 품을 수 없는 이 절망이 서려있는 베데스다 연못에 다가오신 예수, 그 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도대체 누구이길래 38년씩이나 자리에 누워 지내는 이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고 명령을 할 수 있습니까? 여기 38년 된 이 환자 - 낫고자하는 의지도 접어 둔채, 매사에 만성 의욕상실과 현실에 대한 부정과 핑계를 가지 이 인생을 일으킨 예수 그가 누구입니까?

 

 

1: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말은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마도 TV 뉴스나 혹은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밀엽꾼들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야생동물을 잡기 위하여 산 속에 불법으로 수십 개의 덧을 놓아서 밀엽을 하는 내용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밀엽꾼들이 설치한 덧에 걸려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발이 짤려져 나가면서 몸부림치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언젠가 새끼를 벤 어미 산돼지가 밀엽꾼들이 설치한 덧에 걸려서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점점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사탄이 설치한 죄와 사망의 덧에 걸려서 신음하며,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그렇게 점점 죽어 가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죽음의 덧에 걸려서, 죄악의 덧에 걸려서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 죽음의 덧에 걸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죽음의 덧인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고, 마침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던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는 우리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셨다면, 내 일생 내가 어떤 자리에 있을찌라도 나를 포기하지도 버리지도 놓치지도 않으십니다. 1:23절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고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 내 곁에 함께 있어줄 때, 얼마나 든든하고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데스다에 가서 만성 의욕상실증으로 자신의 삶을 한탄하고 남을 원망하며 사는 이 38년 된 환자를 일으키신 주님은 오늘 이 아침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아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탄식도 아십니다. 우리의 후회도 아시고 허물도 아십니다.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 까지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 가난한 달동네라고 하는 미아리에서 살았습니다. 이곳엔 이곳 저곳 똥을 묻어둔 웅덩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이들이 놀이 할만한 운동기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뛰어 다니는 것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뛰다가 이 똥통에 빠지면 골 아픈 것입니다. 한번은 우리 동네에 오줌통이라고 불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만 이 친구가 다방구를 하다가 똥통에 빠진 것입니다. 가슴까지 들어갔습니다. 어릴 때라 우리는 그냥 지켜보고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저 밑에 옹달샘이라는 곳에서 물을 길러왔던 오줌통 어머니가 본 거예요.

 

 

뭐 순식간에 달려오더니 아들을 들어가서 그냥 건지는 거예요. 그리고 샘터에서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울면서 씻기는데 그 똥 냄새가 문제가 아닙니다. 역겨움이 문제가 아니예요. 지금 어머니의 눈에는 다만 사랑하는 자식이 똥독이 오를까봐 부벼 가며, 끌어안으며 울면서 씻기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습니다. 오늘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마져도 꺼뜨리시기를 심히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줄로 확신합니다. -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