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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9 (추수감사주일) 잊어서는 안 될 감사 (시50:22-2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11-19 | 조회: 1055

 

우리는 이번 수능 하루 전인 15일에 포항에서 강도 5.4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요즘 세계가 지진으로 인한 공포 때문에 두려움을 갖고 삽니다만, 우리는 그래도 비교적 지진의 안전지대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포항에서 일어난 지진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만, 강력한 지진에다 여진, 그리고 지난해 경주 지진의 악몽까지 더해지면서 시민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사고들을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그 속으로 함몰 될 때도 있습니다. 또 공사를 하다가 옆에 있던 집들이 기울어서 무너지는 일들이 생기기도 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때는 갑자기 지하철이 멈추기도 하고 전기가 끊어져서 정전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기도 하고 충격을 주기도하고 그렇지만, 우리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거나 무너뜨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불편함이 있지만 대체할 수 있고 다른 것을 통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진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무너져버렸고 남아있는 것이 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무너져 버린 것과 함께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 무너진 땅 속에 다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또 순식간에 미래마저도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상황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한꺼번에 사라져버리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땅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이 흔들렸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터가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터가 무너지면 절망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터는 흔들리면 안 됩니다. 터가 흔들리면 손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살아가면서 신앙의 터, 기초가 무너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이 땅에 거룩한 강자로 살아갈 때, 이것이 무너지면, 신앙생활의 소망이 사라집니다. 바로 감사의 삶입니다. 제가 너무 단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사의 삶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아 감사에 대해서 깊이 말씀을 나누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감사를 잘하면 영적으로 상당히 건강하고 성숙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감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 비해 감사를 잘 아는 사람이 그만큼 건강하고 성숙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감사에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살게 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감이 생기게 되자 감사가 점점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 그렇기도 하지만 옛날보다 감사가 훨씬 적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작은 예로, 지난 한 해 동안 서울소방방재본부에 소속된 119구급대가 292,000번 이상 출동해서 212,000명 이상을 병원으로 옮겨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119구급대의 헌신적인 봉사로 생명을 건지기도 하고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사를 표한 사람은 1003명 꼴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이는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하나의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2절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참 무서운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방울방울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무조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 엄청난 희생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살아갈 때, 오늘 하나님께서 너를 찢으리니 건질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감사를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는 말은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첫째, 우리가 오늘 추수 감사절을 맞이해서 참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깨닫고 진정한 감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광야 같은 세월을 보내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 기간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 광야 같은 위기를, 광야 같은 역경을 한두 번씩은 경험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그럴 때 그 위기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넘기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돌이켜 보십시오.

 

 

눈앞이 캄캄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디를 가야 될지, 어느 쪽에 탈출구가 있는지 모르고 허우적거렸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위기를 넘겼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과거에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앞으로도 광야 길을 다시 걷게 될 때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리면 불평과 원망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마치 공식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에게 감사할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 속에서 감사가 빠져버리면 매사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하던 자신들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체념하다 시피 하던 그들에게 자신들을 지배하던 애굽이 10가지 재앙으로 뿌려지고, 자신들은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광야에서 반석이 터집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집니다.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그들의 가는 길에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훤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으며, 더큰 은혜가 어디 있으며,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그들은 입만 열면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서 광야까지 와서 죽게 되었는가걸핏하면 불평과 원망입니다. 이 불평하는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14:27,28에 보십시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의 소리를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까? ‘네가 말한 대로 그대로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그들의 소원대로 광야에서 다 죽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감사하지 않는 인생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을 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감사가 빠져버리면 매사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감사와 원망은 반비례합니다. 감사를 하면 원망이 사라지지만, 반대로 감사가 사라지면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자세는 늘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이 말씀은 이미 받은 구원의 선물도 귀중하지만 그것을 아름답고 귀하게 보존하는 것이 더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보존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우리가 얻은 구원을 이 땅에서 누리는 방법이 무엇이냐? 구원을 상처 내지 아니하고 보자기에 잘 싸서 간직하고 누리는 비결이 무엇이냐?’ 바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입니다.

 

 

예배에는 반드시 감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5:19-20) 이 말씀에도 예배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가 꼭 들어가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신비로운 제물이 됩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 감사가 바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감사가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있으면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으면 다른 것이 다 있다 해도 그것은 불안전한 예배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감사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은혜로 촉촉히 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감사가 향기로운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감사로 제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까? 감사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감사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토다" 입니다. 그 말의 뜻은 "내 던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에게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전 존재를, 나의 삶 전체를 맡기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어떤 환경을 만나도 하나님 아버지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다고 믿고 하나님을 인정할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함께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앞으로도 우리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고통의 때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은총이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부족한 것을 바라보면 마음에 불평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잃었을지라도 아직도 내게 남겨주신 것, 아직도 내게 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하며 그 힘든 삶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23절을 다시 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여기 하반 절에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여기서의 구원은 천국 가는 구원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해결하시는 구원이요, 위험에서 보호하시는 구원이요, 기도에 응답하시는 구원이요, 환란을 면하게 하시는 구원이요,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구원입니다. 시편 5014-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 환난 날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건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는 먼저 감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갑자기 닥쳐온 환란이 있습니까? 먼저 감사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갚으신 후에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더 큰 감사를 드릴만 한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가져오는 견인차요, 감사는 축복의 통로요, 문제를 해결하는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워져가는 빈들에 이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축사 즉 감사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풍요가 있었습니다. 오 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감사의 축사 전의 분위기와 축사 후의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가난의 언어가 부요의 언어로 바뀌어졌습니다. 절망의 공기가 소망의 산소로 변화됐습니다. 부족의 불평이 남음의 아우성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 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리이다라는 말이 "먹고 남은 조각이 12 바구니에 찼더라"로 바뀌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가진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는 빈곤의 언어가 저희가 배부른 후에라는 풍요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모자랄 것 같다는 염려의 말이 남았나이다ᄅᆞ는 즐거운 비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이 바로 '감사'였습니다. ‘축사였습니다. 감사만 하여도 풍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 중에는 감사거리가 없어 감사하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값없이 얻은 구원에 감사하지 못할 자가 어디 있습니까? 광야의 어려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여기에서 제외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감사해야 합니다.

 

 

어느 성도의 고백처럼 "나는 장미를 들고는 수백 번 감사를 했지만 가시를 가지고 감사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라는 말은 솔직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장미를 놓고 감사해야 되지만, 가시를 놓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가시를 가지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물이 무지개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길 원한다면 장미와 가시를 동시에 놓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 장미만 들고 인생을 화려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도 예외 없이 가시 때문에 찔리고 고통 하는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이 시간 감사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 추수 감사절로 보내고 있습니다. 혹시 아직도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를 잊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에게 행복한 삶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사로 예배하는 사람을 모든 환란에서 구해주십니다. 감사의 신앙이 열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깨닫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의 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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