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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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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6 주일 설교 성찬의 공동체 (마26:26-3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11-26 | 조회: 1056

  

오늘 세례와 입교, 그리고 학습을 받는 분들에게 먼저 축하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신앙 안에 들어와 성장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한 나라나 한 도시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로 관문’(關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부터 관문을 설치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옛 관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오늘도 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천공항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관문에서는 우선 사람을 조사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사람이 들어올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 면밀하게 조사합니다. 다음으로 그 사람의 짐을 조사합니다. 짐 안에 마약류나 나라가 금하는 물품이 있지는 않는지, 무기가 있지는 않는지 면밀하게 조사합니다. 어쨌든 누구든지 어느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문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란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 받았고 거듭났다는, 구원함을 받았다는 표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서 이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약속의 현장이 이 물 세례를 받는 자리입니다. 세례 이후의 우리의 삶은 예수를 닮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색깔, 공기>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암으로 죽음 앞에 선 아버지 김치영 목사와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들-영남신학대학 교수 김동건 목사-4개월 동안의 병상대화를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16일 전에 아들에게 링거ringer 주사를 뽑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링거액이 다 끝났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단백질 링거와 포도당 링거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때가 되면 링거 주사를 중단하겠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링거 주사를 중단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상당기간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영양공급은 오직 링거 주사로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건넌방에 있는 어머니와 형에게 의논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건아, 괜찮다. 아무 염려 마라. 이제 때가 되었다. 이것은 안락사가 아니다. 더 이상 인위적인 것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주의 음성이 분명히 들려오는데, 이에 순종하지 않고 억지로 주사를 맞고 있는 것이 옳겠느냐? 아버지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아들은 링거를 뽑고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가족들과 작은 아버지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다시 링거를 맞을 것을 권했지만, 아버지는 그만 해라라는 말을 하고는 눈을 감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사를 뽑은 이틀 후 토요일에 아버지는 가족들과 저녁에 성만찬을 같이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형은 아버지를 면도해 드리고, 세수와 양치도 해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한동안 보지 않았던 거울을 보고 머리를 가다듬었습니다. 가족들도 정장을 입고 성찬을 준비했습니다. 기독교 의식 중에 성찬은 가장 거룩한 의식이지만 대부분 아무런 생각 없이 참여하곤 했는데, 그날 가족들에게 성찬은 남달랐습니다.

 

모두 아버지의 마지막 성찬이라는 생각에 비장함이 느껴졌습니다. 어린 손자 손녀들도 정장을 갖추었고 아주 조심스러운 자세로 방 한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약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성찬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초상집 같은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함은 동시에 그의 생명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고,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부활의 잔치에 참여하는 아침식사이다.

 

이어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떡과 포도주를 받다가 혹시 내가 토하더라도 염려하지 마라. 단지 내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런 것일 뿐이다. 성찬의 떡이나 포도주를 토하더라도 어떤 심각한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찬예배는 목사인 작은 아버지의 인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찬송가 281?아무 흠도 없고 거룩 거룩하신...?을 불렀지만 가족들은 슬픔에 북받쳐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누나의 기도에 이어 성경을 봉독할 때에 울음은 멎었지만 예배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아버지의 설교 후 가족들은 떡과 잔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성찬예배는 가족들에게 신비한 은혜가 넘쳤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던 슬픔과 비통의 감정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임재하신 것이 피부 깊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이 넘쳤습니다. 아버지도 웃었고, 가족들도 웃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울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예배 마지막 찬송으로 351(날 대속하신 예수께 내 생명 모두 드리니)을 불렀는데 이전에 가족들이 그렇게 힘 있게 찬송을 불렀던 적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이 가족들에게 이 성찬은 그들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 땅에서 마지막 나눈 유월절 식탁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삶의 마지막이 다가온 것을 아시고, 자신이 이 땅을 떠나고 나면 뒤를 이어서 제자들이 그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나누는 것이 주님의 최고 최대의 소원이셨습니다. 유월절의 절기는 바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의 그림자와도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 의미를 잘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사인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이 그토록 진지하게 성찬을 준비하고, 그렇게 은혜스럽고 기쁨이 넘치는 성찬 예배를 드렸다면, 인류의 영원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성찬 식탁은 얼마나 벅찬 감격과 주체할 수 없는 은총의 현장이겠습니까? 이 땅을 살아간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서 직접 인도하는 성찬에 참여한 사람은 제자들 12명이 유일합니다. 그런 은혜의 현장에서 제자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본문엔 나와 있지 않지만 눅22: 2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그토록 진지한 자리에서 제자들은 은혜의 폭포수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권력투쟁을 했습니다. 여기 또(also)?라는 단어를 보아서 이 싸움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도 여러 번 했고, 지금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3년 동안이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가집니다. 지금 이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제자들은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다툼이 있었고, 심지어 가롯 유다는 예수를 팔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성찬을 통해 약속 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기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말씀하시고 이어서 포도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는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신 이 의미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고 잔을 나누어 주시는 장면에서 복음서의 기자는 네 개의 의미심장한 동사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가지사 2)축복하시고 3)떼어 4)주셨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 네 개의 동사를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1)선택받은 자 2)축복받은 자 3)상처받은 자 4)나누어주는 자라고 선언합니다. 성찬식은 이런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누구인가?)을 확인하는 자리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철저하게 성찬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찬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우리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여기 떡을 가지사’, 잔을 가지사오늘 대하는 떡은 그저 시장에서 만든 떡에 불과합니다만, 이것이 이렇게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구별된 떡으로 쓰이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럽습니까? 그 구별된 떡은 선택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당신과 나도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었다고 증거합니다.(1:4) 이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된 것이며 전적인 그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들인 것입니다. 그는 기쁨과 사랑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 은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고 영광일 뿐입니다. 그것도 만세전에 우리를 아시고 구원하여 주셨다고 하니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구원받고 뽑힘을 받았습니다. 영광이고 감격적인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유능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택함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선택받음입니다. 감격적인 일입니다. “왜 나를 구원하셨습니까거기에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나를 은혜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택받음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 마음에 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은 감격의 삶입니다. 나를 부르신 이유는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고 또 하나님께 영광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는 영광의 존재이고 은혜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큰 꿈을 심어 주셨습니다. 나는 땅을 밟고 살아가는 미약한 존재지만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 우리는 축복받은 자입니다.

 

예수께서 떡과 잔을 가지신후 바로 그 다음에 하신일은 축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자신의 자녀로 선택하신 후 제일 먼저 하신일도 축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1:28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축복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우리는 시시한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3. 우리는 깨어져야 할 자입니다.

 

성찬의 떡은 선택되어졌고 축복받은 떡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축복하신 떡을 다시 취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떡을 깨트리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개역 한글 역에는 "예수께서 떡을 떼며"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broke the bread"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 깨트림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마지막 단계인 "나누는 자"가 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깨트려지지 않으면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옥합을 기억하십니까?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리자 순전한 나드 향이 흘러나와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온 집안을 그 향기로 가득 채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항아리가 깨어져야만 했고 마리아의 옥합이 깨트려 져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깨트리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4. 우리는 나누어주는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성찬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신 떡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누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다시 말하면 그가 떡과 잔을 나누어주실 때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 곧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이제 그의 몸 곧 그의 생명을 먹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요한6:53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나 성찬의 은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생명을 받은 자들이 이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눔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나누시기 위하여 예수님도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나눔이야말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여러분! 이 아침! 우리는 감히 우리 스스로 이 자리에 초대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베푸신 은혜의 자리에 나와 이 세상의 최고의 만찬을 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모을 상징하는 떡을 뗄 때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대할 때,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터뜨려 나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셨는가. 깊이 생각하며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죄 사함의 은총과 구원의 확신을 통해서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이 생명의 떡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하는 축복의 삶이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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