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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 결산을 잘 합시다. (행20:17-2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12-04 | 조회: 1036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만들어 줍니다. 마지막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결산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우리의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한 결산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지막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는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가든지 말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는 그 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온 모든 날들의 무게만큼이나 중요한 때가 바로 그 마지막 때입니다.

 

오늘 2017년도 12월을 첫 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한해에 나는 정말 후회 없는 삶을 살아 왔는가를 돌아보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결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사도의 결산보고를 통하여 우리의 지난 삶과 비교해 보면서 함께 은혜 받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결단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1. 성령에 메여 살았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20세기 최고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그가 한 때 14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 뜨겁게 사랑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불같은 사랑을 시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눈빛을 가려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그래도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당신 손으로 꺾어 주십시오. 그래도 내 가슴으로 당신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내 심장을 도려내 주십시오. 그래도 내 뇌는 당신을 향해 뛰놉니다. /당신이 내 뇌 속에 불을 놓으신다면 내 핏속으로 당신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

 

릴케는 이 시의 제목을 [사랑의 포로]라고 붙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온통 그대뿐입니다. 가슴 속에도, 머리 속에도, 심지어 피 속까지도 온통 그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철저하게 그대를 향한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던 릴케도 시간이 지나자 달라졌습니다. 점점 그 마음이 루 살로메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다른 여인과 결혼하게 됐습니다. 불같던 그 사랑도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그 사랑에 매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포로가 될 때가 있습니. 그러나 그 사랑이 오래도록 지속되기가 어렵습니다. 영원하기가 힘이 듭니다.

 

지난 2000년 미국 코넬대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바로 사랑의 유효기간에 관한 연구입니다. 2년간 남녀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남녀가 가슴 뛰는 사랑을 나누는 기간은 대체로 18~30개월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이며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사랑의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물론 인간의 사랑을 단순히 뇌 속의 화학작용의 결과로 설명한다는 것인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사랑은 영원하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외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의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뒤에 정말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머리, 가슴, 온 몸에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것이 온통 주님을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사랑에 매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2:20절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 당시 바울의 나이는 이미 60대에 접어 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를 처음 믿은 이후로 그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또 아주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세계 역사가 되도록 자리 매김 하는데 있어서 영웅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고, 또 서구 문화를 놓고 볼 때 문명의 물꼬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만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있는 이상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해야 될 아주 대단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되고 만족해서 이제 좀 템포를 늦추고 적당히 살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 좀 천천히 가자. 여유를 갖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여전히 주의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아니 세월이 갈수록 더 깊이 주의 사랑에 매여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사랑에 매여 사는 바울의 삶의 절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주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면 잡히게 될 것이고, 견디기 힘든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고, 죽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물로 그 앞길을 막아섭니다. 그러나 바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 바울은 주의 사랑에 매여 죽음을 무릎쓰고 예루살렘 행을 강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처음 주님을 만난 직후부터 주의 사랑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온통 주님뿐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랑이 더 깊어 갑니다. 더 깊이 주의 사랑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를 위해 죽으려 길을 나섭니다. 주님을 만난 직후부터 주를 위해 죽을 때까지 바울은 온통 주의 사랑에 매여 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변함없이 누군가의 사랑에 매여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사랑이 죽을 때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그 답이 나옵니다. 22절을 보면 성령에 매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사로잡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속적으로 주의 사랑에 매여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께서 바울을 잡아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매여라는 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갔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오히려 자기가 성령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복이 심하게 됩니다. 때로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2. 그는 성령의 매여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매여 살았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라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모르고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 가는 도중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갑니다. 성령께서 다 잘 아시고 나를 위해 최선의 길로 이끄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 말을 원어에 충실하게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각 도시에서 결박들과 고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며 내게 증거한다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동안 곳곳에서 결박당할 일들과 고통 겪을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듣게 됩니다. 밀레도에서 예언을 들었을 때입니다. 20:23절에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두로에서 성도들을 만났을 때입니다. 21:4절에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실제로 행동을 해보이면서 예루살렘에서 될 일을 예언합니다. 21:11-13절에 보면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이 말은 극심하게 말린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 보십시오. 성도들이 바울을 말린 것은 목회자인 바울을 사랑하고 아낀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것을 거절하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그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뛰어넘는, 더 우선되는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 우선적인 가치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로 향해야만 합니다.

 

21:13절에 보면 이에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 같이 읽읍시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저는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만일 내가 바울과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군가가 거기에 가면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준다면 나는 복음을 위하여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모르고 갈 수는 있었습니다.

 

저가 10여 년 전에 몽골에 가서 울란바트로에서 8시간이나 떨어진 투시코에서 세례를 주다 몽골 군인에게 끌려가 7시간 이상 취조를 당할 때, 모르고 갔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외국인이 세례를 주면 어떻게 된다는 것모르고 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가야한다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믿음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속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진심을 보려고 때론 손해를, 때론 고난을, 때론 목숨까지 요구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지금 바울은 밀레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우선 배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가이사랴까지 가야합니다. 가는 동안 여러 항구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 또 여러 도시를 거쳐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행 자체만도 이미 60이 넘은 노년기의 바울로서는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위안을 삼고 용기를 내 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입니다. 때로 옥에 갇힐 것이랍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랍니다. 여행 자체도 겁이 나는 일인데 결박과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당시 예루살렘 분위기는 사도 바울을 곧 죽일 기세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한 40인의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그래도 바울은 겁내지 않았습니다. ?까요? 성령께서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길, 사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지 15>이라는 제목의 연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한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래가 총망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 총명함을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20대에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그의 뛰어난 논문을 보고 심사위원들은 극찬을 했습니다. 이제 학위를 받을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 젊은이 역시 인생에 자신감이 넘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고,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앞으로 15분밖에 살지 못한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젊은이는 망연자실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은 쉬지 않고 계속 흘러만 갑니다. 그렇게 5분이 지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은 10분뿐입니다. 그 때 그가 누워있는 병실에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억만장자인 당신의 삼촌이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이니 속히 와서 상속절차를 밟아 주십시오.’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 둔 그에게 그 많은 재산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명의 시간은 줄어들었습니다. 그 때 또 하나의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당신의 박사 학위 논문이 우리 학교 개교 이래 가장 훌륭한 논문으로 평가되어 올해의 최우수 논문상을 받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축하합니다.’ 그러나 이 축하 전보도 그에게는 아무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절망에 빠진 그에게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으로부터 결혼을 승낙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전보도 그의 시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15분의 시간이 다 지나고, 그는 세 통의 전보를 손에 쥔 채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리고 연극은 끝을 맺습니다. 이 연극은 한 인간의 삶을 15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응축시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불편한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여러분에게 남은 시간이 단 15분뿐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 15분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생은 5분의 연속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그는 28세에 사형선고를 언도받았습니다. 제정러시아에 반대하여 사회주의적인 주장을 펼치다가 동료 21명과 함께 총살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형수의 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끌려가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형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초조해지면서, 지난 28년 동안 살아왔던 삶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데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도 불행하고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죽음 앞에서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이제 고작 5분뿐이다. 그 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쓰고,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데 쓰고,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 그는 눈에 고인 눈물을 삼키며 동지들과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2분을 썼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지난 28년 동안 세월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후회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처형되기 바로 1분 전이었습니다. 마지막 1분은 세상을 보는데 쓰고 싶다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초조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습니다. 그 때 황제의 칙사가 달려와 특별사면 되었음을 알려옵니다. 그렇게 해서 사형당하기 직전에 생명을 구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시베리아에서 그는 4년 동안 유형생활을 해야 했고, 4년은 군복무를 해야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뿐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죄와 벌등 인류역사에 오래 남을 유명한 작품들을 쓰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내 생애의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시간과 마주하게 됩니다. 때로는 그런 순간들이 우리 앞에 자주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연극 <단지 15>의 주인공처럼, 정말로 얼마 남지 않는 마지막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마지막이라고 생각된 절박한 순간에 새로운 시간이 우리 앞에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간에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던 돈과 명예, 출세와 성공 등이 마지막 순간에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평소에는 소중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이제 2017년도라는 시간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삶의 끝자락은 아닐지라도 시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마치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매일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바르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바르게 설정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줄 아는 믿음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새날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상급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를 안다면 오늘 세상이 나에게 주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세상의 것들로 인해서 기분 상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2017년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상급을 바라보십시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올해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십시다.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간다면 내년에 우리에게 주실 하늘의 상급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늘의 상급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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