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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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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행24:1-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12-10 | 조회: 1022


찰스 존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5년 후의 나를 알고 싶다면 두 가지만 살피면 된다. '지금 교제하고 있는 사람''지금 읽고 있는 책'이다.” 이 말의 뜻은 지금 누군가에게 무엇을 배우고 또 어떤 책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5년 후의 나를 이루어 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배움이 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가 누구와 교제하면서 무엇을 배우는가가 나의 신앙생활이 보다 성숙해져 가는데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어떤 책을 읽으며 무엇을 배우는가가 나의 신앙생활이 보다 성숙해져 가는데 또한 중요합니다. 예로부터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을 야만족이라고 불렀습니다.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면 개인도 성숙해지지 않고 그 삶도 발전이 없습니다. 늘 짐승처럼 그 모양 그대로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을 야만족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도 영적인 야만족이 있습니다. 오래 신앙생활하면서도 신앙인격이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발전이 없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월은 흐르는데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영적 야만족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참 좋은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 속에서 순종하여 익혀가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참 훌륭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의 선교 여정을 배우고 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그가 그토록 원했던 예루살렘에 도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을 아꼈던 사람들의 만류를 들었다면 이 예루살렘에는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많은 성도가 그토록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고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5:25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가노니여기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이 나옵니다. 바로 성도를 섬기는 일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도의 섬기는 일이 무엇일까요? 도대체 이 일이 얼마큼 중요하기에 환란을 무릎 쓰고, 심지어 죽음을 무릎 쓰고 그 사지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궁금하지 않나요?

 

 

24:17절에 보면 이유가 나왔습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라고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가뭄으로 인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뭄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고 이 어려움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바울과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 성도들이 힘에 지나도록 헌금에 동참을 한 것입니다. 지금처럼 계좌 이체를 할 수 있나요? 어떤 전달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바울이 모금을 한 것을 직접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들이 어떻게 복음을 받았습니까?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섬김으로 복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그 은혜를 깨닫고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롬15:27절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여기 보세요. 이들 역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박해와 말할 수 없는 고난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빚진 자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이들만 빚을 졌나요?

 

 

여기 모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모두 빚진 자입니다. 그럼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빚을 졌습니까? 그건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평생을 갚아도 값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우리는 하나님께 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생명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지옥이 예약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을 맞바꾸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은혜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생명의 빚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우리는 다 기억합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네레로 떠나가기 직전에 그가 살던 고향 도시지역 신문들은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사실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가 좋은 의료인의 조건, 또 여러 개의 학위, 보장된 미래와 출세를 포기하고 떠나간다는 것이 그 때만 해도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결단을 하셨습니까?” 닥터 앨 버트 슈바이처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빚 갚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라는 인생은 온통 빚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저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상적인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30살에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흑인들을 위해 의사로 복음전도자로 90평생을 보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부탁인 복음을 위해 산 한 인생의 모습이 아닙니까?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을 했지만, 당시 그를 아끼던 사람들의 우려대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무고하게 고발함으로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21:30) 심문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당시 예루살렘 분위기는 사도 바울을 곧 죽일 기세였습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 사도 바울을 죽이기 위한 40인의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들이 가짜 뉴스를 만들어 바울을 올가미에 엮어 고발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벨릭스 총독 앞에서 공식적인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오고 나서 닷새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 바울을 총독 앞에서 고발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발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첫째, 소요를 일으켜 로마의 평화를 위협했다./둘째, 나사렛 이단의 괴수이다./셋째. 성전을 더럽혔다. 물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꾸며 기소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바울을 가짜 뉴스를 만들어 죽이려 했던 당시 유대지도자들의 고소 내용을 통해서 당시 그들에게 비취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 복음을 확산시키는 사람입니다.

 

바울에 대한 첫째 고소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우선 여기 이 구절에 사용된 전염병’, ‘소요케 하는 자라는 표현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 전염병은 본래 페스트 같은 질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런 표현은 역설적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당시 세상에 얼마나 급속하게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는가를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21:20절에 보면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와 같이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지 자라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그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증거 한 열매가 수만 명이 기독교로 개종을 한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의 숫자만입니다. 이방인까지 합치면 그 숫자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기간을 보통 약 30년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교회의 교인 수는 몇 명입니까? 12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약 30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의 기간 동안 예수 믿고 돌아온 모든 성도들의 숫자를 학자들은 10만 명으로 어림잡습니다.

 

 

30년 사이에 120명의 갈릴리 촌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마리아를 넘어 헬라권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5절에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당시 세상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대 종교의 전통주의자들이 그의 목숨을 해코자 한 것입니다.

 

 

복음이 진리라면 진리는 인간을 자유하게 하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리였다면 그 진리가 유대인 사회를 격동하고 변화시킴이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의 기독교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변화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함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요? 지난 월요일에 국민일보에 참 마음이 아픈 기사가 실렸습니다. 소형교회 목회자 그러니까 100명 미만의 교회를 200여 교회를 조사했는데 31%의 목회자가 향후 4년 내 교회 문 닫을지도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인 수가 늘지 않는 것’(39.8%) ‘헌신된 일꾼 부족’(19.9%) ‘재정 부족’(19.9%) 등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이런 상황에 까지 빠지게 된 것입니까? 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의 기독교가 참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전하지 않거나 아니면 복음을 알되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비겁한 침묵 속에 안주하든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 1세기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음과 동일한 복음이라면 이제 우리는 다시 복음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전염병처럼 페스트처럼 이 복음을 우리 사회 모든 구석구석마다 퍼트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인한 거룩한 소요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적어도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1세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거룩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과 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2.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한 또 하나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 다시 한 번 보시죠.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여기 바울을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다.’ , 그렇다면 아나니아의 사주를 받아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고소한 것은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더둘로가 바울을 그렇게 고소한 것은 바울의 삶이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2:20절을 보면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왜 산다고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누가 봐도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사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묻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나요?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그런 말을 듣고 살고 계시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일까요? 그렇다면 매일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우리의 모습이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요?

 

 

3. 영혼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에 대한 세 번째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였습니다. 바울이 이런 고소를 당한 연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비난의 배경을 바울이 체포되던 행21:28-30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바울)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이 곧 닫히더라

 

 

이것이 그들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고소한 죄목의 배경입니다. 바울이 정말 그랬나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그렇게 오해했을까요? 사도행전 2129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 뭐라고요? 이방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당시 성전 법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었거든요. 이방인들은 절대로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가거나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돌에 쳐 죽이거나 사형에 처했었거든요.

 

 

-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해였습니다. 하지만 오해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가까이 하던 바울이 이방인과 함께 성전 근처에 있었으니 그들이 오해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에 정통했던 사람,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바울이 아닙니까? 누구보다도 성전 법을 잘 아는 현명한 바울이 왜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 근처에 서성인 것일까? - 어느 신학자는 이 부분을 강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에베소에서 자신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동행한 에베소 출신의 이방인 신자 드로비모에게 바울은 가능한 이 거룩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잘 설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이방인 드로비모가 성전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최대한 성전 가까운 곳에서 성전을 볼 수 있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요? 결국 진실은 한 영혼에 대한 바울의 애틋한 사랑과 친절이었습니다. - 드로비모를 향한, 한 영혼을 향한 바울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영한 영혼 한 영혼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바울, 그 영혼을 향한 사랑 그 사랑 때문에 바울은 드로비모를 데리고 최대한 성전 가까이 간 거예요. 오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말입니다.

 

 

- 결국 바울은 어떻게 됩니까? 드로비모에 대한 이 배려 때문에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서 2, 다시 로마 감옥에서 2년 동안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결국 순교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바울이 이 일을 후회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흔적도 없습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의 존재 목적, 아니 생존의 이유, 그것은 바로 영혼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바울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후회하기는커녕 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는 병든 드로비모에 대한 배려는 계속되었습니다. 아니 그는 그의 마지막 서신 디모데후서 4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무슨 말입니까? 병든 드로비모를 어떻게 했다고요? 그래요. 가장 아름다운 항구도시 밀레도에 두어 그를 쉴 수 있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런 바울이 그립지 않습니까?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펴면 온통 비판의 글들이 가득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자신이 불이익이 있어도 용기를 가지고 세상 앞에 설 수 있는 그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까?

 

 

우리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 그 생명의 빚을 너무 자주 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영생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입니다. 천하를 다 준다 해도 자기의 생명과 바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귀한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때에 우리는 얼마의 값을 지불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를 하나님께 내놓았습니까?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관심이란 그 대상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마음을 써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좋은 처지에 있으면 축하해주고 기뻐해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 염려해주고 도와주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던 사도 바울!! 자신보다 이웃을 더 배려했던 사람!! 이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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