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를 서로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주일입니다.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서로 기뻐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만, 동방박사가 들려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라는 이 물음은 당시 소동이 일어날 만큼 큰 뉴스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구약 때부터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심을 갈망했는데 그 메시야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자기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으로부터 아기 예수의 탄생하신 곳을 알아서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납니다. 오늘은 신약의 본문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을 통해서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이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를 만나 뵙는 축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동방박사가 만왕의 왕이신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1. 동방박사들에게는 왕을 만나보고 싶은 강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풀려지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서학자들은 당시 상황을 보아서 바벨론 출신의 천문학자나 점성학자들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바벨론은 천문학과 점성학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었고, 바벨론에는 약 500여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 살았던 탓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던 메시아 관한 성경의 예언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동방박사들이 바벨론에서 온 천문학자들이었다면, 그들은 엄청나게 먼 길을 와서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까지는 굉장히 먼 길입니다. 하루 이틀에 올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최소한 한 달 이상은 걸렸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통편이 그렇게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성탄절 카드에서 자주 보는 것처럼) 낙타를 타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짧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별을 따라 온 사람들입니다. 별은 밤중에만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밤중에만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험한 산을 넘기도 하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넓은 들판을 지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달이 없는 밤에는 돌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가시덩쿨에 찔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강도나 도적떼의 위협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까지 오는 길에 어떤 난관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많은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도 먼 길을, 더군다나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까지 왔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열망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새로 태어나신 왕을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관찰하다가 이상한 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별은 평범한 별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아주 특별한 분이 태어나실 징조였습니다. 그리고 그 별을 관찰하던 그들은 그 별이 자기들에게 손짓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나를 따라오면 새로이 태어난 왕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일들을 뒤로 미뤄놓고 무작정 별만 쳐다보며 따라왔습니다. 그렇게 따라 온 길이 몇 천리나 멀리 떨어진 낯선 곳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왕을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이 없었다면 그들은 애초 동방에서 출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을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이 없었다면, 노중(路中)에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쉽게 포기하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왕을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에 이끌려 예루살렘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열망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리고 그 열망을 따라가면 희망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열망이 있으면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인 잠언 8: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나를 사랑한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 만나기를 얼마나 갈망해 보셨습니까? 주님은 갈망하는 자를 만나주십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두 노인이 등장합니다.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야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메시야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정결예법을 따라 정결예식을 행하려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주변이 많은 사람들은 아기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열망 가운데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과 안나는 마리아가 안고 온 아기 예수가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요 어둠의 땅 이방을 밝게 비춰줄 영광의 빛'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기다림의 열망은 희망이고, 그 희망은 우리를 만남에로 인도합니다.
2. 마침내 아기 예수님의 탄생하신 집에 당도하게 됩니다. (9,10)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별에 대해서 세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별은 사라졌다가 “문득” 다시 나타났습니다. 둘째, 그 별은 동방 박사들을 “앞서” 인도했습니다. 셋째,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이번에 교역자 수련회에서 양평의 밤하늘의 별들을 보았습니다. 참 서울에서는 보지 못한 별들이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보통의 별들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가면, 별들도 함께 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면, 별들도 함께 섭니다. 그런데 메시야의 별은 박사들의 발걸음을 앞서 인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 위에서, 그대로 머물러 섰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메시야의 별이 하늘에 떠있는 보통의 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야의 별은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로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갈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낮에는 구름 기둥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난 광채가 앞서 가면서 그들이 가는 길을 인도해주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을 보면,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온 빛이 목자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밝게 떠올라, 박사들을 앞서가며 인도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구름 기둥이나 불기둥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어주는 밝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마2:10절에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오늘 본문은 박사들에게 있었던 큰 기쁨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우리는 이 단어들을 통해서, 박사들이 그리스도의 별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이제 곧 그들은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친히 인도해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기쁨과 감격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쁨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전연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도 기뻐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었던 동방 박사들보다도 오히려 더 기뻐해야 마땅했습니다.
성경의 가장 슬픈 구절 중의 하나는 요1:11절이라 생각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께서 자신이 만드신 이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탄생을 들었던 그들은 전연 기뻐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3절 말씀을 보면, 헤롯 왕과 더불어서 온 예루살렘은 그저 소동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기쁨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죄 사함의 은총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임마누엘로 나와 함께 하신 그 은혜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가 탄생하기 전에는 우리는 죄에 오염된 자이었고, 누구하나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나와 함께 계시겠다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자다가도 일어나 춤 출 일이 아닙니까? 구원과 그 구원의 그 이후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바로 그 축복이 이 성탄의 신비입니다.
3. 지금 박사들은 엎드려 예수님에게 경배했습니다.
11절에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 눅2:16을 보면, 들에서 양 치던 목자들은 마구간의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님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동방의 박사들이 마구간(stable)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이 계시는 “집”(house)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여러 날이 지난 후에,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때는 호적을 마친 사람들이 각자의 마을로 돌아가고 난 뒤였습니다. 그러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이 머물 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집에 머물고 있을 때, 박사들이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품안에 안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즉시 박사들은 엎드렸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경배라는 단어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사용됩니다. 따라서 박사들은 헤롯이나, 요셉이나, 마리아에게는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오직 아기 예수님에게만 경배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엎드려 예수님에게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박사들이 보배합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기 전에, 미리 보배합을 준비해서 왔습니다. 그들은 즉흥적으로 자기들의 지갑에서 몇 푼 끄집어내어서, 아기 예수님에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뵈러 나올 때는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권세 있는 사람을 만나러 나갈 때는 잘 준비를 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 경배하러 나올 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됩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미리 준비한 보배합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님에게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드린 예물들은 매우 귀하고도 값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물들은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었습니다. 찬송가 116장을 보면, 이와 같은 가사가 나옵니다. “베들레헴 임금께 나는 황금 드리네 영원토록 모든 백성 다스려 주소서.”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말하자면 황금은 모든 백성을 다스리실 왕으로 나신 예수님에게 드려진 것입니다. “거룩하신 구주께 나는 유향 드리네 만국 백성 찬송 드려 만유 주 섬기세.” 출30:37 말씀을 보면, 본시 유향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말하자면 유향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드려진 것입니다. “주의 죽을 몸 위해 나는 몰약 드리네 세상 모든 죄인 위해 십자가 지셨네.” 요19:39 말씀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하여 몰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몰약은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몰약은 사람이신 예수님에게 드려진 것입니다. 물론 박사들은 그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드린 예물의 상징적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그들은 아기 예수님에게 매우 적절하고도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대상16:29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의 제물은 예물을 의미합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한 요소입니다. 빠져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이 시간 우리도 엎드려 예수님께 경배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보배합을 열어서, 정성이 담긴 예물을 예수님에게 드립시다.
4. 박사들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 그들은 목숨 걸고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리고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꿈을 통해 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헤롯 왕을 만났을 때, 헤롯왕은 "베들레헴에 가서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고 메시야를 찾거든 돌아올 때에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꿈에 "헤롯 왕에게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주어졌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그 말씀대로 다른 길로 해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경배와 참된 예배의 모습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습니다. 만약 그들이 경배는 멋있게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 왕을 만났다면 그들의 경배는 불완전한 경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이 끝맺음을 합니다.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해서, 동방 박사들은 다른 길로 그들의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헤롯에게로 돌아갔으면, 그들은 사망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이미 왔던 길, 우리가 잘 아는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쉽게 여겨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길이라고 방심할 때, 쉬운 길이라고 자만할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길을 고집부리면서 걸어갈 때, 그 길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동방 박사들에게 지시하신 길은 생소한 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딜 수도 있었고, 가기에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왕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왕의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길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을 막으시고, 우리를 다른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아쉬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길이 더 좋은 길이며, 우리에게 최상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의의 길로, 바른 길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길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늘 순종하면서 감사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행여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로 돌아서기를 바랍니다.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과거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성탄의 기쁨과 함께 이 한 해를 잘 마무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 해에는 온전히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의 삶이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