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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1 (송년 예배) 주의 은혜 앞에 선자들 (시40:1-5)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7-12-31 | 조회: 1127

 

전순영 시인이 쓴 시간을 갉아먹는 누에 중에서란 시가 있습니다.

 

 

먹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물고 손을 내저어도 얼굴을 돌려도/ 어느새 내 입속으로 기어들어와/ 목구멍으로 스르르 넘어가 버리는 시간./ 오늘도 나는 누에가 뽕잎을 먹듯 / 사각사각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쭉쭉 뻗어나간 열두 가지에/ 너울너울 매달린 삼백예순 이파리 다 먹어치우고/ 이제 다섯 잎이 남아 있다./ 퍼렇게 얼어붙은 하늘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느덧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한 잎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입니다. 우리를 애태우며 웃고 울렸던 2017년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주일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완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산의 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마지막 때에 관한 기록이 300번 이상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연구하고 보니까 예수님의 보혈에 관한 기록보다도 마지막 때에 관한 기록이 더 많다고 얘기했습니다.

 

 

돌아보면 한 해의 끝자락이라는 종착역에 서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마음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뜻한 바를 이루어 새해를 기대로 맞는 분도 있겠지만, 웃음보다는 눈물이 많았던 분들도 이중에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걸음을 사력을 다해서 걸었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을 지나면서도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말 못한 채 하나님께만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눈물진 교우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해를 정리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때 후회도 해보고, 또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도 해보지만, , 잘 바뀌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우리에게 사뭇 옷깃을 여미는 매우 중요한 시간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삶의 끝자락은 아닐지라도 시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마치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매일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바르게 달려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바르게 설정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줄 아는 믿음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며 새날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은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기적들은 자신이 약할 때, 자신의 상황이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일어난 것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시편 40편을 언제 어떤 상황에서 썼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다윗이 굉장히 어려울 때였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본문 2절에서 다윗은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다고 말합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라는 말은 고통의 울부짖음이 가득한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웅덩이라는 말은 무덤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지금 죽음이 임박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수렁이라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을 말합니다.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몸은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누군가가 나를 끌어올려주지 않으면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 다윗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실제로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했습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크게 두 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입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지만, 다윗이 예뻐서 사울 왕이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인 이후로 다윗이 백성들에게 점점 인기가 높아가자 사울 왕은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할 방법을 찾다가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입니다. 왕의 사위가 된 다윗은 군대장관의 자리에 올라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적군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다윗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윗이 전쟁을 하다가 패배하여 전쟁터에서 죽거나,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백성들은 더 이상 다윗을 영웅 취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 골리앗을 죽일 때 얻었던 인기가 사그라질 것이 고 그러면 다윗은 사울 왕의 자리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계산을 하고서 사울 왕은 다윗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면 늘 승리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불리하다 하더라도 다윗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울 왕의 계획이 완전히 빗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작전을 바꿉니다. 자신의 사위가 된 다윗을 직접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군사를 보내서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 다윗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사울 왕이 보낸 군사들과 맞서 싸울만한 군사도 없었을 뿐더러, 다윗과 함께 있던 600여명의 사람들은 모두 오합지졸에다 변변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사울 왕의 군사들에게 붙잡히면 꼼짝 없이 죽임을 당해야 할 처지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땅으로 망명을 가기도 하고, 자기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압 왕의 손에 맡겨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다윗이 이스라엘 땅에 거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가족의 생명까지도 위기였는데, 그 때 다윗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이 당한 또 하나의 위기는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입니다. 다윗을 추종하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압살롬에게로 쏠려 있던 때입니다. 심지어 다윗의 신하들 가운데서도 압살롬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때도 다윗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오직 피신하는 것밖에 말입니다. 다윗은 반역을 일으킨 아들과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왕좌를 버리고 도망갈지언정 아들 압살롬과 싸울 수 없었습니다. 반역한 무리들과 싸운다면 아들 압살롬을 죽여야 하는데, 다윗은 아버지로서 아들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선택한 것은 왕궁을 비워두고 몇몇 신하들과 함께 요단 건너편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 다윗을 도우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었습니다. 비록 아들 압살롬이 죽는 가슴 아픈 일을 겪어야 했지만, 아들 압살롬이 죽음으로 해서 반역은 끝이 났습니다. 반역의 무리를 진압할 때도 다윗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도망가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반역을 진정시키시고 다윗을 다시금 왕궁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일평생 그런 경험들을 참으로 많이 했습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참 많이 겪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심으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러 갈 때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이 한 말이 그것을 증언해 줍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사무엘상 17:37) 사울의 사위가 되기 전에,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윗의 삶에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양치기로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양을 해치려 하는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사위이기 때문에 다윗에게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다윗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때, 그저 아버지의 양을 치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달려온 2017년 올 한 해,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기적들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베푸신 기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유명한 사람이어야만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큰일을 해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 아주 평범한 일상에 하나님께서는 늘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 기적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을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우연처럼 여기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베푸신 그 기적을 기적이라고 느끼지 못한 채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윗을 생각할 때마다 묘한 애정을 느낍니다. 아마도 다윗의 삶이 완벽한 삶이 아니요, 우리와 비슷한 허물투성이의 삶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파란만장한 삶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의 삶은 기쁨과 슬픔, 승리와 실패가 교차된 적인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여러분도 아시지만 다윗은 어린 소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그가 세운 전공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 추앙을 받던 영웅이었습니다. 너무 특출해 버리니까 왕으로부터 질투를 받아서 한 순간에 ?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신 한 때의 괴로움이었는데 그 한때라는 것이 수십 년처럼 보였습니다.

 

 

누구나 우리 인간은 예외 없이 짧은 고통에는 강하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긴 고통에는 약합니다. 이 점에서는 다윗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해결되지 않는 긴 고통의 터널 속에서 점점 지치고,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사울 왕은 아직도 건강해 보이고, 그 왕이 죽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 밖의 일이었으니까요? 사울 왕이 죽기 전까지는 다윗의 신분은 여전히 도망자요, 아무도 그를 반겨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입을 꼭 다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 생각해 보세요. 가정을 잃었고, 자기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방랑객입니다. 이젠 이방 나라의 왕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미친체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을 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울의 눈을 피해 끝도 없는 도망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것은 바로 기다림 속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다윗은 힘들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을 펴서 자신을 도와주시길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정말로 기적 같은 일들을 만들어주셨습니다. 기도는 내 삶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는 눈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 앞에 있다 하더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히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기적을 베풀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지난 일 년을 살아오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많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기도하며 하루하루 살아온 사람입니다. ‘기도하며 산 사람만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삶은 같을 수 있습니다. 결과는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사람은 그 삶의 결과가 하나님의 기적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반면,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쳐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다윗은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교만한 자라는 말은 자기의 힘을 자랑하고 자기의 지혜를 의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든 자신의 지혜로, 자신이 가진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짓에 치우치는 자라는 말은 스스로 속임수에 넘어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가만 놔두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통틀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힘이나 지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처럼 되지 않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믿지 않고 가만 놔둬도 문제가 해결되고 없어진다고 생각는 사람처럼 살지 않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매일같이 체험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라고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출근길에 운전을 할 때에나, 대중교통을 타고 갈 때에도 안전하게 회사에까지 출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기적 같은 손길의 도우심이라고 고백하며 일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때에도 건강을 주시고 소화할 수 있는 튼튼한 위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기적 같은 축복임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한 남편일지라도, 남들처럼 애교가 많지 않은 아내일지라도 이런 사람을 만나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에 기적을 베푸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내일 또다시 내 삶에 베푸실 기적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기적이 내 삶에 베풀어지지 않는다면 내 삶은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들이 되고 말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단 우리가 큰 어려움을 겪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는 늘 우리의 삶에 함께 합니다. 그래서 다윗도 오늘 본문에서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다고 노래합니다.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기적과 감동의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여사를 아십니까? 그가 쓴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입니다. 1933년 한 월간지에 발표된 이 글은 당시 대공황으로 암울했던 미국인들의 마음에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 글을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손꼽았습니다. 그녀는 만일 자신이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몇 시간이고 선생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들과 들꽃들을 바라보고, 저녁에는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걸어온 발자취를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본 후에,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에 반짝이는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자신에게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세계로 돌아가겠다고 썼습니다.

 

 

여러분, 헬렌 켈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야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헬렌 켈러가 소망했던 그 기적들을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도, 화려한 네온사인도 매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온 지난 모든 삶은 우리에게 정말 기적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안다면 우리도 다윗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지난 1년 주께서 행하신 기적의 주인공들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앞으로 맞이하는 새해도 하나님의 기적 속에서 우리의 삶이 계속 될 것입니다. 이제 이 은혜가 저물어 가는 이 한해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새해에도 늘 함께 하심을 알고 주의 손에 그 영광의 손에 이끌리어 기적을 맛보며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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