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이 오래되었거나 낡았을 때, 옛날에는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부숴 버리고 다시 지었습니다. 부수는데 비용이 들고, 새로 지으려 해도 경제적인 손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오래된 집들의 뼈대를 그대로 놓아둔 채 개축, 구조 변경(remodeling)을 합니다. 우리 1층 로비를 지난해 리모델링을 했습니다만, 그 당시를 생각 만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 안는 것 같은 충격이 있습니다.
작년 9/4일에 교회 1층 어린이 집이 누전으로 인해 불이 났을 때, 당시 아이들이 수업 중이었고, 그런 가운데 누전으로 불이 났으니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 했겠습니까? 얼마 전에 제천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을 보며 저는 마음을 쓸어내렸습니다. 인명 피해가 오니까 상상이 안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소방차가 15대 이상 오고 여러 기관에서 현장 조사를 하는 가운데 소방관 책임자가 하는 말이 이 곳은 어린이 사설이기에 사회적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소방차가 진화를 끝내고 간 현장은 정말 가슴이 아플 정도로 처참 했습니다. 그런 건물이 구조 변경으로 오히려 더 깨끗해졌습니다.
그 아름답게 변화된 1층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고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몇 주간 일을 하고 애씀으로 건물이 아름답게 바뀌듯이, 우리 마음이 그렇게 바뀔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 누구라서 변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조금 더 옳게 살았어야 되는데, 조금 더 주님 앞에 헌신했어야 되는데, 남편과 아내, 부모로서 내 임무를 좀 더 잘 수행했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변화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많은 소원들을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는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건물을 몇 달 만에 간단히 뜯어 고치듯이, 우리의 심령은 그렇게 간단하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의 매듭’을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정말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한 주간, 한 달, 한 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시간의 매듭을 주셨는가? 과거의 잘못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각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간들을 맞아서 다시 한 번 변화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의 매듭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제 한해를 시작하는 첫 주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와 첫 번째 드리는 기도제목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조성을 갖고 살기 때문에 우리 안에 타성이 벗겨지지 않으면 주어진 새해를 힘차게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날마다 새롭게’라는 표어를 가지고 이 한해를 나가려고 합니다. 따라합시다. 자!! 함께 외쳐 봅시다. ‘날마다 새롭게’
오늘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흔히 1-39장을 제1이사야, 40-66장을 제2이사야라고 부를 만큼 성격과 내용이 구별됩니다.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왕들 중 몇 안 되는 훌륭하고 신실한 왕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기록한 히스기야 시대의 역사는 매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왕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비록 히스기야의 시대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겠지만, 왕국의 멸망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로 이사야서의 전반부가 끝이 납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종말이 다가왔으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 그럴 수 있을까요? 비록 현실은 안전하고 편안할지라도 다가오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위태롭다면, 현실 역시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한 백성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던 이스라엘은 이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은 이방인의 노예가 되는 하나님의 징계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0장부터 전혀 새로운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큰 잘못을 저질러서 징계를 당하게 되었지만, 슬픔과 고통 가운데 처한 그 백성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자기 백성의 가슴 속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잠시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징계의 매를 맞는 이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울려 퍼집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새 일'이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은 광야에 길을 만들고, 사막에 강을 뚫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만에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광야’와 ‘사막’이라는 단어는 황무(荒蕪)한 고원, 황량한 들판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광야, 사막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일차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버려진 땅, 황폐한 지역, 생산성이 전혀 없는 곳, 죽음이 지배하는 영토를 가리킵니다. 생명체가 살지 않는 곳,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입니다. 이곳이 광야이고 사막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길이 나고 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만들고, 사막에 강을 뚫는 이유를 아십니까?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엄청난 새 일을 행하시려고 할까요?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새 일'은 거룩한 자들, 즉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새 일’은 이미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이 땅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보시시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상을 향하여 먼저 외치지 않았습니다. 광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마귀에 유혹을 받기 위해 광야로 보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를 광야로 내 몰아 보내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마귀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광야는 그에게 무서운 시험장이었으며 두려운 결전장이었습니다. “이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내게 엎드려 절하고 나에게 경배하라.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다 주리라.” 이런 일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이 시험을 이기고 세상 앞에 서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우리의 상처, 우리의 고통 그리고 나만이 갖고 있는 죄성의 아픔도 아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자리에 오셔서 새해 첫 주일을 맞는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살으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죄 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여러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예요. 생명의 종교예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능치 못하심이 없을 줄 믿습니다.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역사의 지배자이십니다. 큰 손이십니다. 온 모든 삶을 조각하는 조각가입니다. 그의 손에 들어가면 쓸모없는 것도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날마다 새롭게’ 살아야 할 우리들은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첫째로 과거에 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같이 1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여기에서 ‘이전 일’과 ‘옛날 일’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제까지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긋지긋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 한 척도 만들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홍해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거의 일을 잊으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있었던 홍해의 기적신앙에 매여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기억도 하지 말고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가정과 민족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린 그 상처를 어떻게 잊을 수 있나요? 그러나 기억하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의 신앙은 오늘을 있게 한 밑거름임에 분명합니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자세나,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매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역사가 귀하기는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역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직도 지난날의 고통스러웠던 날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빨리 버리시기 바랍니다. 누군가 때문에 고생하거나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한 억울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버리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쁜 기억들,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억울하다고 생각된 기억들을 잊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마귀가 자꾸만 그것을 방해합니다. 마귀를 그런 것들을 자꾸만 생각나게 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살도록 만듭니다. 그런 것들은 기억할수록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내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기쁘게 살다가고 그것을 기억하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잊어버린 것 같다가도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 생각나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 마음에서 기쁨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자꾸 돌아보면 안 됩니다. 거기에 매이면 절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실패하고 상처 입고 원한을 갖고 한때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지금까지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얼마나 생각하면 분통이 터집니까? 아픕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원망스럽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런 과거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를 무력화 시키고 앞으로 달려가는 일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지 마십시오. 잊어버리십시오. 예수 안에서 다 잊어버리십시오. 이제 새해 새날입니다. 다 주께 맡기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네 염려와 걱정 다 내게 맡겨라. 그러면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 주마’ 그렇게 말씀하시는데도 자기가 다 싸 짊어지고 다닙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맡기지 못하고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가슴에 품고 고생하며 다닙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둘째, 그리고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1절 말씀을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에베소서 1장을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유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긍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만 닿으면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천국의 거문고와 같습니다. 성도는 이미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가 왔다고 모든 것이 새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다 새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입니다. 옷만 갈아입었습니다. 이름만 바꾸었을 뿐입니다. 의자를 바꾸고 집을 바꾸고 프로그램 바꾸었을 뿐입니다. 칼 막스는 삶의 구조를 바꾸므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 사람만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환경을 바꾸고, 우리의 모든 사회 제도를 아무리 바꾸어도 인간은 여전히 그 인간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왕권 시대에서 독재시대로, 독재시대에서 민주화의 시대로 계속 오지만 인간의 문제는 여전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문제는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될 때만이 삶의 행복과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이며, 인생 문제의 해결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해 아래는 새것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새로워집니다. 새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는 거예요. 주님을 믿는 고백적인 신앙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교회당이 좁아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같은 동네에 있는 술집을 판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술집을 사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내부를 새롭게 다 단장을 했습니다. 술집에서 쓰던 가구들을 다 처분하고, 조명기구들도 다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이윽고 수리가 다 끝나고 첫 예배를 드릴 시간이 되어 교인들이 교회당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 한쪽 구석에 술집 주인이 기르던 앵무새가 주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거기에 그냥 남아서, 느긋하게 예배당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들어오자 앵무새가 이렇게 지절거립니다. “새 주인이다, 새 주인이 왔다.” 목사님 뒤를 따라서 가운을 입은 찬양대원들이 등장하자 이번에도 앵무새가 이렇게 말합니다. “새 배우다. 새로운 배우가 왔네.” 그렇게 놀라서 지껄이던 앵무새가 이번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 손님은 똑같네. 손님은 그대로네.”
물론 이 이야기는 누군가가 꾸민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새사람이 되었다면 새사람다운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변화된 모습이 없이 그저 예전과 다름없이 산다면, 오늘도 앵무새는 이렇게 지절거릴 것입니다. “너는 왜 맨날 그 모양이니?”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에 길은 바로 바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열린 길입니다. 사막에 생수는 생명을 살리는 역사입니다. 이는 바로 날마다 새롭게 하는 그것은 전도입니다.
어느 분이 성도를 미사일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적을 향해 미사일은 발사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는 세상으로 나아가서 세상을 뒤집어엎어 놓아야 주장합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가지 않고 꼭 교회 내에서만 떠드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야! 너, 자폭하니? 미사일은 발사되어야 해. 발사되지 않고, 제자리에서 떠들면 자폭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폭탄을 터뜨려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터뜨리면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다칩니다. 폭탄은 세상에다 터뜨려야 합니다. 세상으로 나아가서 복음의 폭탄을 터뜨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복음의 전령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굳건히 하여 늘 날마다 새롭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 폭탄을 터뜨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사단아래 놓여있는 사람을 예수님의 품으로 데리고 오는 강력한 무기가 되지만, 불신자들 편에서 보면 새 생명을 얻게 하는 복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여러분, 내가 변화된 새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생활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변화된 그 생각과 마음과 그 삶에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 주십니다. 여러분, 2018년 새해에는 새 마음을 품은 새 사람으로 날마다 새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예비해 놓으신 풍성한 복을 모두 받아 누리시는 복된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새해를 여는 우리의 열쇠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