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길가에 각종 광고가 눈에 들어옵니다. 대부분이 상품광고와 기업광고입니다. 그리고 가끔 공익광고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제 눈길을 사로잡는 광고문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라는 일종의 신앙광고입니다. 한 편으로 반가웠습니다. 전도도 광고형태로 하고 있다는 점이 신선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궁금했습니다. “과연 누가 이 문구를 관심을 가지고 볼까?”, “이 문구가 일반인들에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 일종의 회의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광고에 대한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한 인터넷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7년 전쯤이었을까요?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쉽사리 저를 인정해주지 않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이었지요. 그렇게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창밖 멀리 간판이 하나 보였습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나에게 하는 말일까? 밑에 문구가 하나 더 있더군요. "기도할 수 있는데" 그리고 그 주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가끔 삶이 힘에 겨울 때면 이 문구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할 수 있는데 걱정만 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못하고 염려만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나름대로 기도하다가 삶에 쫓겨 기도를 쉬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시편 141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서 유대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에 지은 시편입니다. 다윗은 밤중에 버선발로 쫓겨났습니다. 다윗 왕을 살리기 위해서 충성스런 신하들이 압살롬의 반란군 앞에서 자기 몸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죽어가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계속 도망을 갑니다. 이 어찌 비통함과 억울함이 그 마음속에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처럼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이 창을 들고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이 비정함 앞에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깊어지겠습니까? 지금까지 그처럼 정성을 들여서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자 편에 서서 자기를 향해 창을 세우고 달려드는 그 정황 앞에서,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고 슬프고 억울했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이 억울한 일에 피해를 당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그 사면초가와 같은 자리에서 다윗은 정말 냉정하리만큼 자신을 잘 통제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고난의 한 복판에서 8절에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대로 버려두지 말아 달라”는 눈물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절박성이 2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 이 표현은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한 자리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기도가 속히 응답이 되기를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도할 때 손을 들고 했습니다. 다윗이 손을 들고 드리는 자신의 기도가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저녁 제사”는 기름과 향료를 섞은 고운 가루로 매일 아침저녁에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 때 피어오르는 향기는 성도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저녁에 드려지는 제단에 타오르는 불길을 보세요? 이 제단 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낮에는 작렬하는 햇빛에 가려서 잘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석양의 햇빛이 서서히 사라지면 햇빛에 가렸던 제단의 불길이 멀리서도 보이지 않습니까? 그 불길이 어두움을 가르고 온 땅에 비춰지는 것처럼 자신의 절박한 기도가 하나님 앞에 불길처럼 타올라 상달되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신년도에 들어서 ‘날마다 새롭게’라는 표어 앞에 섰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 성도가 은혜를 받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환경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 기도하는 사람의 인격을 바꿉니다. 오늘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의 환경 속에서도 3가지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1. 자기의 입을 지켜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3절)
다윗은 3절에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벙어리 아닌 벙어리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참 잘하면서 정말로 꼭 해야 할 말, 꼭 필요한 말은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과 꼭 해야 할 말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고, 특히 다른 사람을 ‘흉보는 말’이나 ‘비판하는 말’ 하기를 참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하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엡 4: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언어가 얼마나 인생에 크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혀는 배의 키와 같아서 그 큰 배의 방향을 정한다.”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혀는 불과 같아서 적은 불이 온 산을 다 태워버린다.”고도 말합니다. 다윗 역시 얼마나 억울하고 비통하겠습니까? 그것도 자식이 자신을 짓밟고 왕권을 찬탈한 것도 아픔이었지만, 자기에게 한때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의 배신 앞에 어떤 말이든 쏟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입에 파수꾼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이 만연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입술에 세우신 그 파수꾼으로 하여금 모든 부끄러운 말, 그리고 거짓말은 우리 입 밖으로 절대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차단해야 합니다.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은 옛사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데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는 무서운 적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고백한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의 입술에서 부끄러운 말이나 분노의 말이 새어나오지 않게 하십시다. 시인이 그렇게 기도했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적 노력으로는 자신의 언어를 조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이 우리는 부끄러운 말을 하는 습관, 거짓말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우리의 못 된 습관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소서. 내 입술의 문을 지켜 아름답고 복된 말만 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2.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4절)
4절입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한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여기 이 기도는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한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이 기도는 누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다 하는 기도가 아닙니까? 그러나 두 번째 기도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의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은 사기꾼들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사기로 얻는 그 부는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악인들이 악으로 자기 인생을 승리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은 부러워합니다. 다윗은 그것도 부러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저들의 진수를 먹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이 사회가 기독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쉽게 말해서, 교회가 몇 만개가 되고 교인이 몇 백 만이 넘는 다는 것이 이 사회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마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얼마나 악해졌습니까? 어느 분의 말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죄의식이 완전히 실종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다들 그렇게 하지 않느냐? 나만 재수 없이 걸릴 것뿐인데 뭐가 잘못이냐?’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볼 때마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책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너희들 뭣하고 있니? 너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왜 이 모양이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변명해 보려고 애쓸지도 모릅니다. “주님, 세상은 원래 악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기를 쓴다고 해서 세상이 천국으로 바뀌겠습니까? 가룟 유다가 성자로 바뀌겠습니까? 그저 우리만 예수 잘 믿고 천국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스스로를 냉정하게 비추어보십시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 다른 말이 아닙니다. 이 사회의 부패나 타락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변명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교회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다윗을 보십시오. 4절입니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한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마음을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자는 용사보다 낫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늘 넘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마음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허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안정되지 않은 마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잠4: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흔히 하는 말 중에 "마음먹기에 달렸다!" 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사뭇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질병의 원인 가운데 무려 75% 이상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학계의 보고가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분노가 생기고, 실패의 감정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작용하여 병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무엇보다도 마음이 건강하고, 마음이 아름답고,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다른 그 어떠한 것보다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인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어떤 경우에도 악한 길에 서지 않겠습니다. 설사 내가 직접 악을 행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악으로 얻은 소득에 대해서조차도 철저하게 외면하겠습니다. 진실로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하나님의 성실을 식물로 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진실 된 고백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진정 하나님의 성실을 식물로 삼는 자들이 다 되셔서,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다윗은 의인의 책망도 달게 받아야 하며 또한 책임을 질 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같이 5절 말씀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다윗은 “의인이 나를 향해 올바른 책망을 할 때에 겸허히 받아드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비록 오해였을망정 칭찬을 해주면 너무나도 기분이 좋습니다. 나이가 지긋이 들으신 권사님께 오늘 너무나도 예뻐 보인다고 말씀드리면 아이 같이 기분 좋아하십니다. 오죽하면 ‘칭찬을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다 생겼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반대로 어떤 일이 비록 사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잘못이 지적되어지면 기분이 몹시 나빠지게 됩니다. 심지어는 악한 감정까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큰 실수를 합니다. 역사상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인간적으로 볼 때에 다윗처럼 무서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없습니다. 불륜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나단 선지가 와서 책망을 합니다. 얼마든지 자기의 권력으로 나단을 무시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다윗은 겸손하게 그의 책망을 달게 받습니다. 시51:11절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그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하나님께 잊혀진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거두어 가심으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아무리 왕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고 나라가 든든히 서 가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남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잊혀진 자가 되면 그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어 가심으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가 된다면 성공하고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네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은총의 보좌 앞에서 회개의 기쁨을 맛보기 전까지는 다 끝난 죄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하기만 하면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찌 보면 다윗은 우리보다 더 흉악무도한 죄인입니다. 그는 간통을 저지른 자입니다. 살인을 교사한 자입니다. 그러함에도 다윗이 눈물 흘리며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해 주시고 그를 다시 세워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일꾼으로 이끌어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다윗이 자신을 신랄하게 책망을 했던 나단 선지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보세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의 스승을 바로 나단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의 가계에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요셉의 가계를 통해 메시야가 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 나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입니다. 거기는 다윗 다음에 누가 나오는가하면 나단이 나옵니다. 이 나단이 다윗의 아들입니다. 오죽 나단을 좋아했으면 자신의 아들에게 나단이라는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쓸데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달콤한 말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 다윗을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행13:22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다윗을 처음 보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참 다윗을 겪어 본 다음 다윗을 평가하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가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자신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그 일에 다윗의 혈통을 통해 이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여기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난 다윗, 그는 기도에 인생을 걸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 우리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날개를 펴 보셨습니까? 큰일이라고 하면서 왜 기도하지 않으시나요? 아직도 세상의 줄을 붙잡고 계시나요? 분명, 그것은 썩고 말 동아줄입니다. 이제 생명의 줄인 기도의 줄을 붙잡고 지금이야 말로 기도할 때가 아닌가요? 그냥 기도할 때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아닙니까? 모두가 어렵다고 불안해하며 염려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우리나라를 위해,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의 직장과 사업장을 위해, 우리 가정과 자녀들을 위해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