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생을 일컬어 수수께끼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크면 잘 알게 돼”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다 보니까 더욱 모르는 것이 인생이요, 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은 모른다는 것을 다른 면에서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탐구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지식과 설명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산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현대인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습니다. 전1:18절에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 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왜 알면 알수록 번뇌가 많아집니까? 인생이란 자체가 알면 알수록 모르게 되고 살면 살수록 더 신비스럽고 해답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아지고 지식이 많으면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생을 바다로 많이 비유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은 막연히 그들이 풍랑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기록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생항로를 건너갈 때에 경험할 수 있는 한 단면을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일종의 신비스러운 바다입니다. 언제 어디서 폭풍이 불어 닥쳐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에는 일기 예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형자체가 폭풍이 몰려 올 어떤 조짐도 없이 갑자기 불어 닥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인생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린 아이들이 물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인생의 바다를 은근히 두려워합니다. 이 인생바다에는 불안과 공포를 안고 있습니다. 유리같이 맑은 바닷길을 순풍의 돛을 달고 힘차게 달려가면서도 선원들의 마음속에는 “폭풍이 불어 닥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재 우리의 생활이 편하고 걱정이 별로 없어도 마음 한구석에는 형통한 것이 오히려 불안의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우리의 선장으로 모시고 인생의 항해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항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한 달을 보냈는데 이미 인생의 항해에서 멀미를 하거나 제자들처럼 심한 풍랑 속에 두려움 속에 빠져 있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태풍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십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결이라고 표현된 단어를 분석하면 큰 파도가 쉴 새 없이, 끊임없이 몰아치는 것을 표현하는 헬라어입니다. 또 ’고난을 당하였더라‘는 뜻은 임신한 엄마가 아이를 해산할 때의 울부짖음과 괴로움을 말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불어오는 역풍을 맞으며 피곤하고 지치도록 노 젓던 제자들이 고통스러워서 해산하는 여인이 고함을 지르는 것과 같은 괴로움 중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25절에 보면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이라면 새벽 4-6시 사이를 말합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는 건너기 시작한 때는 초저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몰아친 돌풍과 파도 때문에 그들은 밤새도록 그 파도와 싸워야 했습니다. 새벽까지 싸워야 했으니 제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제 지쳐서 절망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할 만도 할 때입니다. 그런 고통과 위기가 밤 사경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은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우리도 종종 제자들이 풍랑과 심한 파도 앞에서 고 생하며 밤 사경에 이른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내 힘을 다 해보아도 여전히 어려움은 풀려지지 않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위기에서 벗어나지지 않는 것처럼 고생에 고생을 겪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인생의 앞길에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하고 죽을 지경인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을 살았던 어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돌풍이 일면 아무리 노련한 어부라 하더라도 쉽게 풍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여러분 역시 인생의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을 살다보면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파산을 당할 때도 있고, 사업이 실패할 때도 있고, 사랑하는 이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도 있고, 아침에 멀쩡하던 아이가 불행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한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비극을 당하여 몸부림 칠 때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한 것처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어려운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 같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 누구나 “야! 정말 모르겠다” 하고 말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할 때마다 인간적인 설명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더 미궁으로 빠지고 맙니다. 불행과 행복이 공존하고 의와 불의가 함께 병행하는 이 땅의 상황을 우리는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에서는 양식이 남아서 버리는데 다른 한 모퉁이에서는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아 상태에서 죽어 가는 현실의 모순을 우리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고층 아파트가 서있는 그 맞은편에 한숨과 탄식이 끊이지 않는 음습한 지하 셋방에서 살아가는 이 현실의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절대로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2. 본문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폭풍을 만난 그들에게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진 분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만이 인생의 신비를 밝혀주실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빛이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왜 풍랑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그와 같은 고생을 했는가에 대해서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시선을 제자들에게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 안에 모든 해답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풍랑 속을 걸어오신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풍랑으로 고통 받는 제자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23절입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제자들이 항해하는 바로 그 때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먼저 보낸 제자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절망할 때, 아무도 나에게 관심 가져주지 않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의 가사처럼 "누군가 날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롭고 지쳐서 넘어져있을 때 누군가 날 위하여 기도하네" 우리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이 험한 인생의 풍파를 헤치면서 살아가는 나를 향해서 기도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달려오십니다. 먼저 25절을 보십시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의 이 고난을 보시는 주님은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당신의 자녀를 놓치지 않으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자녀 한 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물길을 걸어서라도 그 한 생명을 찾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심지어 상식을 뛰어 넘어서라도 주님은 나에게다가 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 저어 가는 내 인생 항해 길에서 고통 받아 기진맥진해 쓰러져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그 때도 나를 찾아오신 주님입니다. 그 찾아오심은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어디나 찾아가십니다. 누구와도 함께 가십니다. 내가 믿음이 약해서 쓰러져 바다에 휩쓸리려고 들 때도 사랑의 손길로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 주님입니다. 내 모든 고통의 현장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분들 계십니까? 그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겉도 아시고 속도 아시고 밖의 표현도 아시고 속의 생각도 아시는 그 분, 모두 보시는 주님은 내가 힘이 없어 기진 할 때도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시편 가지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4:8절에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물론 험한 세상 살다보면 우리 성도들도 별의 별 일이 다 겪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 사실이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사탄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우는 사자처럼 믿는 자들에게 달려들어 우리를 삼키려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 동안에는 어려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결국은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37: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고, 붙들어 주셔서 결국은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3. 내가 어떤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26절을 보면 "제자들이 그 바다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무서워했던 것은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저들은 그들의 눈에 주님마저 보이지 않고 단지 유령으로 보일 뿐입니다.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때는 밤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들이 이 풍랑 앞에 아무런 힘도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태풍을 만난 사람들을 더욱 두렵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풍랑 앞에 무너지는 것은 우리가 환경 너머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가끔 신문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보며 우리는 왜 자살을 할까? 그래도 살길이 있었을 텐데......?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 눈에는 살 길이 보이지만 당사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특히 청년들의 자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요즘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 대해 어둡게만 느껴지고 또 실력이 있다하더라도 취업은 만만치가 않은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하다 현실의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 소중한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은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기력을 낳고, 모든 일을 미루어서 행동하지 않게 하고,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며, 변명으로 그의 삶을 살게 하며, 에너지를 잘못 사용하여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데 에너지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평소 자랑하며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여기던 우리는 태풍 앞에 한갓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풍랑 속으로 걸어오시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씀을 하십니까? 27절 말씀에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합니다. ‘안심하라!!’ 이는 내가 너의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다에서 풍랑이 무섭게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이 음성 앞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 안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믿음은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려면, 우리의 모습이 달라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눈에 띕니다.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지금 파도가 배를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물 위를 걷는 기적은 매우 특이한 기적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바다 위에 서있을 수 없습니다. 몸이 뚱뚱한 사람만 물속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벼운 사람도 물속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해(死海)에서는 사람이 물 위에 뜹니다. 사해의 염도는 여느 바다보다 10배나 높습니다. 사해의 물 1ℓ당 275g의 소금이 함유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해에서도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드러누웠을 경우, 가라앉지 않고 뜰 뿐입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있습니다. 물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달리면 됩니다. 시속 108㎞의 속도로 달리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중에 가장 빠른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가 세운 기록이 시속 44.7㎞라고 합니다. 우사인 볼트보다 4배 빨리 뛰어야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바다 위로 뛰어내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배 안에 있는가, 배 밖에 있는가, 위험한가, 안전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들이 주님과 함께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배안에는 그들만이 있었고, 그들만의 상식, 그들만의 경험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문제의 해결점이 없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풍랑이 휘몰아치는 그 바다 속을 뛰어 내린 것은 주님의 임재 앞에 서기를 원한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위험해보여도, 주님께서 계신 곳은 최상의 환경입니다. 그러므로 안전한 삶을 구하지 마시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최고의 안전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산성이시요 피할 바위시요 피난처가 되십니다. 베드로는 물로 뛰어내렸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소개해주는 명장면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바다를 보고 무서워서 물속에 빠져 주님께서 건져주셨지만, 베드로는 분명히 물 위를 걸었습니다. 물 위를 걷는 장면만 본다면, 기막힌 장면입니다. 믿음은 이런 것이라고 믿음을 멋지게 증명한 장면입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로 뛰어드는 용기,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찔한 상황 속으로 나를 몰아넣습니다.
안전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배 안에 웅크리고 앉아 파도가 지나가기를 원합니다. 어려운 일이 더 이상 닥치지 않기를 바라며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갑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로 뛰어드는 용기,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안에 할 수 없다, 안 된다는 고정관념-고장 난 관념의 벽을 깨뜨리십시오. 베드로처럼 용기 있게 주님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설령 물에 빠져도 다시 손 내미시는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그곳에 하나님의 승리가 있습니다. 놀라운 주님의 뜻이 이뤄집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한 밤중에 갈릴리 바다 한 복판에서 제자들이 두려움에 있게 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 주님은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하게 깨우쳐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풍랑을 통하여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베드로처럼 물에 빠질지라도 용기 있게 주님을 향하여 도전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면 우리 인생의 배에 주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항해를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떤 인생의 풍랑을 만나 힘들어하고 계신지요? 우리 주님 바로 흔들리는 우리 배 곁으로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기 있게 주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시기 바랍니다.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내 잘못된 고정관념에 매이지 마십시오. 믿음의 발걸음을 출발하십시오.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배에 오르시는 순간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증거하며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주장하시는 주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