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명절은 잘 보내셨습니까? 우리나라는 설날이 있어서 새해를 두 번 맞이하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 아닙니까? 이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 설날에 대해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날의 설이란 의미는 '낯설다'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 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설이란 어떻게 보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하며 지난 묵은해에 우리가 못 다한 것들을 돌아보며 새해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이 설은 우리에게 매우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에게 해방된 후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까지 직선으로 갈수 있는 익숙하고 쉬운 길 대신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 사람의 땅을 통과하면 가나안으로 쉽게 빨리 갈수 있는 가까운 길이라고 기록합니다. 지금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은 수에즈 해협 북단에서 지중해 연안을 거쳐 가자로 가는 길인데 오늘날 자동차로 4-5시간이면 갈수 있는 길입니다. 당시로도 걸어도 한 달이면 갈수 있는 길인데 이 길 대신 홍해 남쪽 광야 길로 가면서 이스라엘은 40년을 방황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 인생에게 다가오는 이 광야 길은 만만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200만이 넘는 이들에게 10가지 재앙을 통해 이제 가나안으로 인도한다면 왜 좀 더 좋은 길, 편안한 길을 주실 것이지, 왜 이렇게 고난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본문을 잘 못 이해를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고생시키는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으로 이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 때문임을 분명히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여기 ‘마음이 변할까 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만일 처음부터 전쟁을 치르고 어려운 일을 경험한다면 틀림없이 애굽을 떠난 것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애굽으로 돌아갈 유혹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무엇을 들고 나옵니까? 요셉의 유골입니다. 이 유골이 왜 그렇게 중요하길래 이것을 메고 나옵니까? 창50: 24-25에 보면, "정녕 여호와께서 너희를 권고하사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시리니 그때에 내 해골도 메어 올리라."고 하였고,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바가 있었습니다. 유골을 메고 가라는 이유는 애굽은 너희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너희가 사는 집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는 너희 땅이 아니고, 너희가 가서 살아야 할 곳은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땅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유언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은 후에도 후손들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게 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긴급히 해방을 받은 그 경황없는 시간에 요셉의 유언을 생각하고 요셉의 유골을 수습해서 관에 담아 메고 출발했습니다. 관을 메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가족이 없었겠습니까? 가져가야할 살림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요셉의 관을 메어가게 하였고, 그들은 자기의 살림을 어깨에 메거나, 자식들의 손을 잡고 나간 것이 아니라 요셉의 유골을 메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신앙의 길을 나설 때, 메고 나가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살림걱정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요셉의 유골보다 더 확실하고 더 신뢰할만한 성경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구약과 신약의 말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광야 길을 가는 동안 이 언약의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은 광야 행진을 성공적으로 지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입니다. 이 언약의 책을 성경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숨결을 그 사랑의 음성을 듣습니다. 시119: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빛 하나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 불빛하나가 방향을 설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의 기초가 없이는 우리 삶이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 그리고 인생을 얼마나 크게 승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2. 광야 길은 훈련을 위해 준비된 길입니다.
광야에서의 40년- 생각보다 훨씬 더 길었던 광야 길은 실상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만들어져 가는 시간입니다. 우리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430년 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노예문화가 있었습니다. 노예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무사히 편하게, 잘 먹고 잘 살자 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성도 없고 공동체성도 없는 것이 노예근성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자유하지 않으면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생활 방식에 빠져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40년은 그들에게는 고통스럽고 힘든 여정이지만, 그들 속에 있는 노예근성을 버리게 하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한 성경학자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 나오는 데는 하루가 필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애굽을 빼내는 데는 40년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신8:2절에 말씀하지 않습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두시며 두 가지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는 겸손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자기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고문제는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모든 사람을 정죄 하고 비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원망하고 불평했기 때문에 40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백성은 겸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많은 일을 하기보다는 우리가 겸손한 삶으로 변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시험하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안하는지 시험해 보시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듯이 학교에 들어간다고 모두에게 졸업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라는 학교에 넣고 그들이 순종하는지 성경말씀대로 사는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고통을 받으면 겸손해집니다. 먹을 것 못 먹고, 마실 것 못 마시면 사람은 자기한계에 부딪힙니다. 여러분 편안하게 해주고 잘해 주면 하나님을 찾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열 가지 재앙이 내리는 것이나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생깁니까? 아녜요. 믿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기적을 본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믿음이 생깁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 여기, 광야까지 인도한 지도자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모세는 왕의 특권을 가진 오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의 수학, 지리학, 철학, 문화교육을 다 왕궁에서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도 있었고, 그 애국심이 지나쳐서 살인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40년 동안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소망 없는 광야에서 말 못하는 짐승들과 살면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갈렙산에 하나님이 가시떨기나무에 나타나셔서 그를 부를 때 “나는 본래 말에 능하지 못한 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변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삶 속에 40년의 광야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때, 그는 그의 생애에서 폭풍우를 만날 때, 비바람을 만날 때,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려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가서 주의 응답을 받아낼 때까지 주님과 더불어 씨름했던 기도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말할 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고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하면서 기도하면서 순종하는 것, 이것이 모세가 받은 광야의 연단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3. 이 광야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여기 20-21절을 보세요. “그들이 숫곡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여기 보세요. 그것이 바로 구름기둥, 불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입니다. 21절에 보면 “인도하시고”라고 했고, 22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구름기둥 불기둥은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둘로 생각하기 쉬운데, 본래는 하나입니다. 구름기둥이 밤에는 야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분명 그들과 함께 해 주신다는 증표입니다. 요즘 내비게이션이 나와서 편리한데, 사실은 구름기둥 불기둥이 ‘원조 내비게이션’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길로 나아갔지만 막막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결코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불순종해서 문제이지, 순종만 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승리케 하신 분은 ‘시속 4 km/h의 하나님’이라고. 보통 사람들의 걸음으로 한 시간에 4 km 가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동행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의 길을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롬8: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날마다 걸음마다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며 끝까지 걸어가시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이 있어도 이스라엘 백성은 먼 앞의 여정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냥 조금 앞쪽만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순종의 걸음을 걸었을 때 어느 날 그들은 약속의 땅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좀 오래 된 이야기지만, 저의 아이들과 휴가를 갈 때 특히 저의 둘째 아이가 차만 타면 불과 30분이 지나지 않아 묻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얼마 남았어요? 몇분 더 가요?? 그런데 성장하자 이제 더 이상 이 질문을 하지 않게 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장입니다. 신앙생활은 자라나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이 어떤 길을 통과 하는냐,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달 하는냐 보다도 어떤 모습으로 성숙되어 주님 앞에 마지막에 설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광야의 여정에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를 바라보고 나일강의 젖 줄기를 바라보면서 애굽을 위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사람도, 샘물도 아무것도 없어요.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있었고 밤에는 극심한 추위가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제 새로운 구력으로 2018. 첫 주일 이제부터 우리는 이 광야 길을 어떻게 가야 합니까? 아직도 지난 날 광야를 걷는 백성들처럼 광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광야는 겉보기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깊고 깊은 사랑과 그 은혜를 사람들이 모르는 겁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원망과 불평과 시비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은혜를 많이 받았음에도 그들의 삶은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고, 지극히 작은 문제만 생겨도 불평하고 배만 고파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두신 것은 그들을 경솔하고 원망과 불평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인데 이 백성들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10가지 재앙과 기적을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나일강이 피로 물들었고,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고, 마지막에는 멀쩡한 장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던 자들입니다. 이 공포 속에서도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 통과한 것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 그 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서 홍해를 건넜으며, 애굽의 군인들이 그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불기둥, 구름기둥도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아무리 답답하고 내 이성에 동의되지 않는 이유가 있어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비하는 일은 오늘로 끝내야 되지 않습니까?
이 광야는 정말 신비한 현장입니다. 신8:4절에 보면?이 40년 동안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말씀입니까?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걸었는데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릍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이 광야의 축복입니다. 이 광야는 우리에게 절망 같으나 이 엄청난 은혜가 말씀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의뢰하고 내 인생을 주께 맡기며 그로 인해 기뻐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 진리를 깊숙이 체험한 사람은 결코 광야를 힘들어하거나 피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감격하고 감사하고 흡족하게 살아갑니다. 고난과 훈련의 때가 끝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비해 두신 놀라운 축복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인생을 하나님과 더불어 성실하게 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천국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이 멀고 험한 것 같아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해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절대 보호의 축복이 있습니다. 사43:1~2 “1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래서 결국 이런 고난 저런 고난 많은 것 같지만 지나 놓고 보면 결국 승리를 주십니다!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세상의 지름길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진정한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직해 보여도 이 광야 같은 세상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십시오. 멀어도 느려도 험해도 하나님의 길로 가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이 안전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천국 가는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승리하는 복된 길로 인도해 해실 줄로 믿습니다. 부디 한눈팔지 말고 하나님의 지름길로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