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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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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25 날마다 새롭게 - 경건한 삶 (딤후3:1-5)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02-25 | 조회: 1166

 

20세기를 대표하는 목회자이자 복음전도자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이번 21일 목요일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목회자의 퇴장이 아닙니까? 저도 1973년 여의도 집회에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한 인생이 복음을 들고 전 세계인 중 2억 명에게 메시지를 증거 한 것은 정말 대단한 삶이었습니다.

 

이 분이 머무는 집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성경 구절이 방마다 붙여져 있다고 합니다. 6:14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리라그는 생전에 내 일생의 유일한 목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만 가능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이 이 땅에 한번은 다 죽음을 맛보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마지막 어떤 모습으로 평가를 받는 것이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90:12절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 말은 내가 이 땅에 살아온 날, 그리고 살아갈 말은 돌아보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세어보니 22,630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날은 얼마나 되나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70까지 살면 2,920이 남았고, 80까지 살면 6,570일 정도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삼천일에서 칠천일 정도 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계산이 잘못됐는줄 알았습니다. 너무 남은 날이 적어보였기 때문입니다. “고작 삼천일에서 칠천일 밖에 남지 않았는가?”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얼마나 남으셨나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도 건강에 문제가 없을 때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이 세상 떠날 때까지 불행한 일을 겪지 않을 때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 날은 훨씬 적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재림하시면 그 날은 더 적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 갈 날이 생각보다 짧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습니다. 성경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언제라도 주님이 오셔서 이 삶이 끝날 날을 예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죽어서 이 삶이 끝난다면 역시 그 날을 예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시간이 끝날 그 날을 예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말세적 현상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인들이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부터 주님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도 이 말세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라고 말합니다. “고통하는 때란 끔찍한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2-5절에서 말세적 현상 19가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맨 마지막에 가장 심각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활개 치는 때를 말합니다. 즉 겉으로는 그리스도인 같지만 기독교의 진리를 부인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신앙의 자세와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는 자들 때문에 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말세적 현상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경건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죄악이 넘쳐나서 말세적 현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 물론 분노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경건의 문제입니다. 특히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을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계십니다.

 

 

1.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경건이란 단어의 헬라어는 유세베이아인데 그 뜻은 거룩하다경외하다입니다.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유명한 경건주의자였던 윌리암 로우가 쓴 경건한 삶을 위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경건을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쳐진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경건은 도덕적인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쉽게 말하면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처럼 외식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사데 교회를 기억하십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 - 왜 주님은 당신이 핏 값을 세운 교회를 이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이 교회는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슨 능력이 있고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전에 방송되었던 진품명품 TV프로에 보면 모양은 진짜 같은데 전문가가 감정을 해보면 가짜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이것은 창 18장의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말세적 현상이 가득해서 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후에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안에 의인이 남아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셨습니다. 의인이 10명이라도 남아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으시려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말세적 현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경건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신 사람들이 죄짓고 말세적 현상을 보이는 것은 그러려니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경건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경건을 잘 지켜내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사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세적 현상이 점점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더 심각한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을 잃어버리고 있는 점입니다. 참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을 잃어버리고 있고,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경건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과 교우들 그리고 지인들의 경건을 잘 보살펴야 하겠습니다.

 

 

2. 우리가 경건의 능력을 붙잡고 나가면 결코 변절하지 않습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1959년대 한창 전도자로서 활동할 때입니다. 가는 곳마다 집회를 하고, 가는 곳마다 전도를 해서 수많은 사람이 돌아오게 되자 매스컴을 타고 그 젊은 청년 목사가 미국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던 때였습니다. 그때 템플턴(C. Templeton)이라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도 가슴에 불을 안고 전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유럽으로 순회하며 전도할 때도 같이 가서 교대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템플턴이 빌리 그래함보다 더 유능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가 전도하면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는데, 불과 얼마 되지 않아 1200석 교회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기를 만났습니다.

 

 

한 장의 사진 때문에 그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 사진은 북아프리카의 여인이 굶어 죽은 아기를 무릎에 앉혀 놓고 하늘을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사진이었습니다.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진을 얻었나 봅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엄청난 가뭄으로 사람들이 고통당하며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고, 많은 짐승들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면서 템플턴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여인에게,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비인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여인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비하시고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시다면, 어떻게 죽어가는 이 아이에게 비를 주시지 않겠는가?' 그 다음부터 그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예수님도 포기해 버렸습니다. 전도자의 삶도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로 갔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는데, 이 사람은 한 순간에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이 없는 불가지론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믿어?' 하고는 다른 길로 들어갔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 말세가 가까이 오지 않습니까? 말세 때 참 배교자나 변절자가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는 우상이 없습니까? 하나님만을 섬긴다고 입으로는 대단히 요란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찬송하지만, 마음속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우상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돈입니까? 쾌락입니까? 야망입니까? 아니면 이 인간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목적입니까?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우상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면 나도 모르게 잘못되고, 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적 타락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은 없습니까?

 

 

오늘날 얼마나 음란한 세상입니까? 웬만한 것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옛날에는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웃음거리가 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만큼 음란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육적인 쾌락의 종이 될 수 있는 위험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진 않습니까? 하나님께 불평하진 않습니까? 하나님을 시험하진 않습니까? 혹시 마음속으로 '세상에 성경 말씀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어? 그 말씀대로 벌 받거나 복 받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지, 사실은 달라.' 하면서 은근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교만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혹시 주전자 속의 개구리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조지 바나라는 분이 쓴 책 중에 주전자속의 개구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주전자속에 미지근한 물을 넣고 개구리를 집어넣은 다음 서서히 열을 가하면 개구리는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기분 좋게 천천히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것, 이것은 정말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저는 오늘 이 시대가 겪는 가장 커다란 위기가 바로 풍요 속에 젖어 있어서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번 평창 동계 올림픽을 보시면 알지만, 여기에 온 유럽의 나라들은 대부분 기독교 국가입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스위스,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페인 등 다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몇 천 년 동안 축복받은 민족이 몇 십 년 전부터 영적으로 잠들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렀습니다. 지금 유럽은 얼마나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면에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교회를 귀히 여기고 기도를 귀히 여겨야 하는데 교회는 텅텅 비고, 축구경기장에는 함성이 진동하는데 기도소리는 모기소리보다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유럽은 병에 걸렸습니다. 유럽의 병이 지금 세계적인 재난이 되고 있습니다.

 

 

 

이 경건의 회복은 바로 우리 모두가 십자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는 십자가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 하는 사람은 항상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흔히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주의해서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분량의 1/3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 십자가, 죽음 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제자가 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의 고난을 중심에 두고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비하면 사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 승천과 같은 기사는 이상하리만큼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가 버립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복음서란 무엇인가? 복음서란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모든 사건과 말씀을 기록한 연대기요, 그 나머지 모든 부분은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중심에 있습니다. 복음의 중심이요, 은혜의 근원이요, 샘이 됩니다. 바울도 그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에 '십자가의 도'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자기 자신을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진하게 깨닫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의 신앙생활에는 누수현상이 심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면 잘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다는 아닙니다.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믿음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가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데 이 모태 신앙을 가진 자녀들 중에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해서 선택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마음에 강하게 감동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선데이 크리스천(Sunday Christian)입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에 와 앉아서 몸에 익은 예배 의식을 다 끝내면 훌렁 벗어놓고 나갔다가, 그 다음 주일이 되면 또 습관처럼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는데도 그들은 눈만 껌뻑껌뻑 하고 앉았다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끝까지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배후에 부모님의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배후에 부모님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계기가 되면 살아 계신 주님이 그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중생하는, 거듭나는 체험을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도 16살에 회심을 합니다. 그의 인생이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은혜 앞에 서고 믿음으로 나가다 보니 가치관 인생관 목표 다 새로워지고 달라집니다.

 

 

우리 동성 교회 안에도 그런 분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30, 어떤 사람은 50, 어떤 사람은 60, 어떤 사람은 죽을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말을 들으면 이구동성으로 비슷합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알기는 알았죠. 그러나 그것이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을 아무리 들어도 내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이제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을 믿습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제가 자주 봅니다. 이제 바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신앙은 출발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관심이 항상 마음에 크게 작용합니까? '좀 더 알고 싶다. 좀더 십자가 앞으로 가까이 나갔으면 좋겠다. 좀더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알고 그와 좀더 가까워지고 친해졌으면 좋겠다.' 하는 갈증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갈증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보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제도가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진정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타성에 젖은 내 모습이 바뀌게 되고 회개가 머리나 입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경건한 한 사람이 교회에 세워지면 변화가 옵니다. 사랑이 회복이 되고 용서가 일어납니다. 미워했던 마음들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리고 섬김이 삶속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렇지만 만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십자가의 은혜가 전혀 생소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빨리 갈보리 동산으로 자리를 옮겨야 합니다. 나는 부탁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 빈껍데기 같은 내 모습 더 이상 여기에 매여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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