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작가 삐에르땅 빠셍이 쓴 작품 중에 '우리의 삶의 날들'이란 제목의 단편 소설을 보면 보그라는 마을에, 마음씨 착하기 그지없는 꼽추인 우그린이 누나 소랑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데다가 어머니는 중증의 알코올 중독자였기에, 누나인 소랑케가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으며 꼽추 동생 우그린을 키웠습니다. 어느 날 소랑케는 뜻밖에도 도둑의 누명을 쓴 채 옥살이를 하고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 소랑케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맹세코 결백했지만 사람들은 믿어 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소랑케는 몸을 팔아 꼽추 동생 우그린을 부양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곱추 우그린이 마을로 나갔을 때 마침 그 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우그린을 밀어 넘어뜨리고는, 쓰러진 우그린을 발로 차고 밟으면서 창녀의 동생이라 놀려대었습니다.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다 똑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곳을 지나가던 그 마을에 수도사 그 장면을 목격하고 무리들에게 호통을 치며 피투성이가 된 우그린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았던 꼽추 우그린은 강에 투신하여 자살해 버렸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누나 소랑케는 권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랑케와 우그린 남매의 자살 소식을 접한 신부님은 '이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인간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며, 가슴을 치면서 탄식했습니다. 마침내 장례식 날이 되었습니다. 우그린 남매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마을 사람들 역시,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모두 장례가 거행되는 마을 예배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장례를 집례 하는 수도사가 설교를 합니다.
"이 세상 마지막 심판 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나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또 물으신다면, 그때 나는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
착하디착한 꼽추 우그린과 마음씨 고운 누나 소랑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마을 사람들이 수도사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주님의 양떼들로는 더더욱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리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리떼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야 하는 그 수도사의 절망감과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런지는 그의 설교를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리떼와 같은 인간들에 대해 절망하고 탄식하는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은 본래 이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아닙니까?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하나님의 법을 유린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동생 아벨을 단지 시기심으로 쳐 죽였던 가인이 이리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아내야 어찌 되건 말건 자기 한 목숨 살겠다며 아내를 동생이라 속였다가 그 아내를 빼앗겼었던 아브라함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굽인을 때려 죽였던 모세가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삼촌을 교묘하게 속여 삼촌의 재산을 횡령하여 부정축재했던 야곱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충복의 아내와 몰래 통정하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아예 충복을 살해해 버렸던 다윗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돌로 쳐 죽이던 바울이 이리가 아니었었단 말입니까? 도대체 성경에 나타난 인간 중 본래 이리가 아니었던 자가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한 본문 16절에 하나님은 이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은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보통얘기가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신비한 얘기입니다. 생각할수록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요3:16절은 만민의 사랑을 받는 구절입니다. 글도 없는 미개한 부족을 찾아간 선교사가 그들의 말을 배우고 글을 만들어서 성경을 번역할 준비가 되면 제일 먼저 번역하는 말씀이 창1장이 아니라 요한복음 3:16절이라고 합니다. 우리 어린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보내면 놀랍게도 가장 먼저 외우는 성경 구절이 요3:16절입니다.
저도 이 구절을 제일 먼저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성경 중의 성경으로 애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16절의 핵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누가 누구를 사랑했느냐 하는 것을 깊이 있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 놀라우신 주님께서 높고 높은 곳에 계신 그분이 무가치한 나를 사랑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사랑했다는 이 사실을 제외해 놓고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그분의 풍성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얼마나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여 자주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무궁한 사랑'이라고 큰 소리로 선언합니다.(렘31:3) 무궁한 사랑, 즉 한이 없고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만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요13:1) 이는 중단됨이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한 차원 높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갈2: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끊을 자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했던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인터넷 게임에 중독돼 생후 3개월 된 친딸을 굶겨 죽인 비정한 부모를 바라보는 찹찹한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자기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면서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자고 깨면 우리 앞에 벌어지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성적 쾌락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진 지위로 잘못된 욕정을 채우는 이 세상입니다. 이 땅을 바라볼 때 희망을 둘만한 곳이 없습니다. 어디 한군데 빛을 따라 가면 살 수 있겠다 하는 곳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사건이 바로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 16절 중반절에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주셨다'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그리고 쌍둥이 서신서인 요일3: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여기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어떠한 사랑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말은 작은 우리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십자가에 아들인 독생자를 내준 그 사랑을 말로 담아 낼 수 없었기에 ‘어떠한 사랑’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 사랑을 주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한글 성경이 너무나 단순하게 번역을 해놓아서 주고받는다 할 때의 그런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주셨다'라는 이 말은 '샤워하다(shower)'라는 표현이 원문의 뜻을 드러내는 데 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샤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이처럼’이란 도대체 어떤 뜻을 담고 있습니까?
‘이처럼’이라는 말은 본문 앞에 기록된 사건을 언급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만들어 매단 사건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할 때입니다. 호르산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깝고 빠른 길을 통해 가나안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에돔 땅을 통과해서 가면 그래도 조금 쉽게 빨리 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돔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에돔 땅을 가운데 두고 멀리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멀고 험한 길을 오느라 고생이 심했는데, 또다시 먼 길로 돌아서 가라고 하시니까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불뱀들을 보내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불뱀에게 물린 백성들 가운데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일부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범죄한 이 백성을 용서하시고, 뱀들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 기도를 들으시고 불뱀을 떠나가게 하시고,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놋뱀을 높은 장대 위에 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마다 다 치유받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이 바로 그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놋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으로 자기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죽어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모두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죽어가던 사람을 살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단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모두 살아났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치료받기 위해서 뭔가 애써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모두 살아났습니다. 그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해요. 별로 감동도 받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큰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얼마나 피부로 느끼며 감사하고 살아갑니까?
오늘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99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3?1절 세대는 거의 사망하고 3?1절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해 줄 선조들이 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현재 8-90세가 된 세대들은 참 기구한 시대를 살아오신 세대들입니다. 일제의 압제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냥 압제가 아니고 주권도 말도 나라도 이름도 뺏기고 살았으니 그 고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식민지 역사에서도 그런 압제의 사례가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런 고민이 많은 삶을 살으셨습니다.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끌고 간 100만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피해 보상을 해주기는커녕 사과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야베 총리는 미의회가 위안부 문제를 일본의 분명한 잘못임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법적 책임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지금 이들이 아무리 거부해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입니다. 여러분, 이 3,1 운동은 민족의 거대한 주권회복이고 자유 갈망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당시 1600만 인구 가운데 불과 기독교인이 1.3%밖에 안 되는 20만이었지만, 저들 속에 십자가의 사랑이 뼛속까지 저미어 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이 3.1운동입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이거나 점잖게 심오한 철학을 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너무도 구체적이고 실감 나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지성이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대충 넘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충격적이고 온몸을 전율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뒤틀린 채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아버지는 창조자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세상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을 너무 가볍게 다루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교리를 공부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머리로 이해했다고 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진짜 사랑에 부딪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됩니다. 짝퉁 사랑, 병든 사랑, 함량 부족의 사랑으로 지친 영혼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늘 배고픈 허기진 마음에 안식이 찾아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녹아지는 경험이 일어나면 봉사하라 마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라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누가 나를 사랑하니 하지 않니 원망하고 시비하던 것도 다 사라집니다.
내 삶이 변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만나지 못한 것은 자동차로 친다면 시동이 안 걸린 것입니다. 자동차를 밀고 다닐 수는 있지만 오래 못 갑니다. 신앙생활도 이 자동차를 밀고 가는 것처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사랑에 빠지면 주일이 기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연서 같고, 내 안의 미움도 내 힘으로는 없앨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내 가슴에 밀려오면 그 미움, 증오, 짜증도 전부 사라집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프러포즈입니다. 하나님의 애타는 구애입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나를 위해 죽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 사랑이 나를 구원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십자가로 가십시오. 혹자의 표현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고난이 되어 버린 우리의 고난, 하나님의 고통이 되어 버린 우리의 고통, 하나님의 절망이 되어 버린 우리의 절망, 하나님의 죽음이 되어 버린 우리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참혹한 고통을 당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고통을 거뜬히 옮겨 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만나십시오.
우리 가운데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 강한 능력이 무엇인가를 잘 모르시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가서 그 능력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가장 강합니까?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는 힘입니다. 무엇이 가장 강합니까? 무엇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썩은 밀알이 되는 것처럼 자기를 던져 희생하는 그 사람의 힘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이 어디 있는가를 알기를 원합니까?
갈보리로 올라갑시다. 예수님이 핏자국을 남기면서 걸어 가셨던 그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던 그 십자가 옆에 조용히 서서 그분의 피 묻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한번 들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이다.' 진정한 사랑은 누구에게 오는지 압니까? 용서하는 자의 가슴에 옵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자의 가슴에 옵니다. 십자가에서 그것을 배웁시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배우자고요. 거기에 진정한 사랑의 샘이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