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고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 후에 교회에서 마련을 해 준 남한산성에 사택에서 생활을 했는데 당시 교계 중진들이 목사님을 찾아 뵌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느 목사님이 “목사님 저희들에게 덕담 한 마디만 해 주세요”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예수 믿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에게 예수를 잘 믿으라니, 잘못 오해해서 들으면 상처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이 말은 목회하는 나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이미 예수 믿는 목사님들에게 “예수 잘 믿으세요” 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말은 우리가 회복하여야 할 신앙의 기본기, 우리가 되찾아야 할 주님과 나의 첫 마음가짐이 무엇인지를 지적해주는 귀한 충고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맞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한두 가지 알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습니까? 그 깊은 차원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은혜를 계속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몇 마디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그 은혜를 다 알려면 죽을 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도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띠를 동여매고 등불을 들고 이 놀라운 은혜를 알아보려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히9: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여러분 법원에서 판사가 호출을 해도 가슴이 덜렁덜렁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는 이와 같이 인간을 놓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식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요즘 일어나고 있는 me too는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인간들의 그 더러움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꼭 십자가에 죽으셔야 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꼭 죽어야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보는 이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를 가지고 이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제사제도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그 죽음을 미리 가르쳐 주고 미리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읽으면서 십자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제사제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무슨 원리인 줄 아십니까? 9장 22절 보십시오. '율법을 좇아 그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이 제사의 기본 원리 입니다. 왜 제사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짐승을 잡습니까? 왜 피를 흘리고 피를 뿌립니까? 피가 없으면 죄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됨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을 대체할 생명을 다시 회복하려면 생명의 상징인 피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입니다. 피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피를 뿌렸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짐승을 끌고 와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 짐승은 자기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는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짐승을 잡아 피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뿌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 지냄으로 그 사람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대제사장은 1년에 한 차례씩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에 피를 뿌리면서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지성소로 가서 자신의 죄와 모든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고 나왔습니다. 이와 같은 속죄의 은혜는 피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에 모든 제도는 다 일시적인 것이고 그림자요, 불완전한 것입니다. 구약에 대제사장이 누굽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자기도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또 구약에 드리는 모든 제사는 짐승의 피입니다. 짐승의 피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효력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를 범할 때마다 자꾸 반복해서 짐승을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제사 제도를 계속 하시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매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가 없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게 만드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분입니다. 예수님이 드린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영원한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짐승의 피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한번 드림으로 끝나는 제사요, 다시 반복 할 필요가 없는 제사입니다. 한번 드림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제사였습니다.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믿기만 하면 3가지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 속죄의 능력입니다. 12절을 보면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보혈이 속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도 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보혈을 쏟으신 그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야 합니다. 벧전서 2:24절에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혼자 떠맡으셨으니 그에게 무엇이 뒤따르게 될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주님에게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심으로 희생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놀라운 뉴스는 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실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희생을 당해야 합니까? 나 같은 죄인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와의 관계가 이제는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죄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주홍빛 같은 큰 죄라도 십자가의 보혈에 깨끗이 씻김을 받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와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운 몸입니다. 드디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모든 죄 용서받은 놀라운 기쁨이 찾아옵니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찬송가 가사대로 우리의 모든 흉악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희생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죄를 다 떠안으시고 내 인생의 가장 복된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도 우리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이제는 율법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마귀도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롬 8:1을 보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책감이나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 성결의 능력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우리 안에 남아있던 죄의 흔적들, 죄가 남긴 것들을 다 깨끗하게 씻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창 3장 이후에서 보듯이 일단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오고 나면 우리 안에는 끝없는 고통이 계속됩니다. 바울 사도는 롬 7장에서 죄가 우리 안에서 왕처럼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한다고 탄식하는 처절한 고통을 고백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송명희씨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 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구별된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왜입니까? 주의 보혈의 생수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3. 보혈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듭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까지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만들고, 지금까지는 그저 아까워서 재물을 내 놓지 못하던 다 풀어 놓게 만듭니다. 13-1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아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뿐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주시어 양심을 깨끗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은혜 받으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은혜 받으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는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 생을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요. 아까운 것이 없어요.
주일 날 그저 한두 시간 내어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분입니다. 헌금 몇 푼 하면서 그것 가지고 아까워하십니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될 일을 빤히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도 마음에 가책이 없습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아직도 사로잡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여러분은 그렇게 머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순종하게 만듭니다. 헌신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고 많이 알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일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선하게 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씻어주심을 믿는 그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그 생명의 피가 지금도 내 마음에 생수처럼 흘러넘치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움과 염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는 마음에는 구원의 감격과 소망이 가득하여 두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늘의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면 피가 흐른다!’ 그렇습니다. 참깨를 틀에 넣고 짜면 고소한 참기름이 나옵니다. 잘 익은 포도를 짜면 달콤한 포도즙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수혈을 받아야 합니다. 말기 신부전증 환자들이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받아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매일같이 수혈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예배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감사 감사, “피!” “보혈!” 하면 울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보혈에 잠기기만 하면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도 우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종일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고 우리가 종일 죽임을 당하는 자처럼 취급 받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은혜를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발견하고 동성교회가 십자가의 감격,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뜨거워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