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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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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18 십자가 - 곁에 있던 사람들 (요19:23-3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03-18 | 조회: 1182

 

 

우리가 사는 시대를 가르쳐 포스트 모던시대라고 부릅니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단어에는 모던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 여기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지만, 사사시대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소견이 옳은 대로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가치가 허물어 진채 사람들은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이성과 도덕의 틀을 깨는 파괴와 해체를 실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아는 파괴되고 가정은 해체되고 도덕적 권위와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오늘을 사는 소위 포스트 모던 인간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한 문화 학자는 포스트 모던 인생을 가르쳐 고립되고/상처 난/목마른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설교가 촬스 스윈돌의 글에 보면 미국 캔사스 신문에 어느 날 이런 광고 기사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저에게 전화해 주셔서 30분을 이야기 해 주시면 5불을 지불하겠습니다.” 고립된 포스트 모던의 아파트에서 고독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풍경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끌어안고 자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이웃을 믿지 못하고 이웃에 대하여 공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필요 이상으로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정의감을 이웃들에게 강요하는 사람들도 거의 예외 없이 과거의 상처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웃들이 평범하게 던지는 말도 순수하게 받지 못하고 다시 거기에 의문부호를 던집니다.

 

 

그러니 얼마나 목마름이 일어나겠습니까? 수가 여인을 아시죠?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을까요? 목마른 인생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을 바꾸고, 파트너를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직장을 바꾸고, 종교를 바꾸고 심지어 교회를 바꾸어 봅니다. 그래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방황입니다. 끝없는 목마름, 타는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인생입니다. 무릇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목마름과 주림을 느끼는 자입니다. 이면에서는 누구든지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단지 무엇에 대해 목말라 하고 주리고 있는가 그 내용과 대상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 모였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이것만이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고독과 상처, 그리고 목마름을 해소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 보면 십자가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잊지 못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시면서 서서히 죽어 가시는 예수님 바로 곁에, 작은 목소리로도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 다섯 사람뿐이었습니다. 본문 25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어떤 면으로는 이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그 신비스러운 현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었고, 비록 그들이 예수님이 마시는 쓴 잔을 함께 나눌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그 잔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의 담즙은 아마 혓바닥에 대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죽어 가는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가며 예수님의 유류품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순간입니다. 그 비극적인 현장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다른 세 여인과 함께 서 있습니다. 마리아는 육신적으로는 친 어머니요, 친자식이었습니다. 자신의 태에 10달 동안 품고 있었고,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고, 자신의 품속에서 말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했고, 자신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30년 동안이나 한 집에서 모자지간으로 살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갑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옷은 자기 자식의 옷입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직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뒤로 넘어져 실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불한당 같은 로마 군병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홀로 슬픔을 삼키면서 아들의 죽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리아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이 자신의 친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의 아들로, 자신의 소유로 키워오지 않았음의 증거였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금 십자가를 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붉은 죄가 눈 같이 희어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 모두가 정말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 되었고 딸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찌 십자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가까이 가보고 싶고 좀 더 알고 싶어 하는 안타까움과 갈증이 마음에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 세 가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첫째는 우리 대신 치르신 고통의 대가지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간단한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22:14)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 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죗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사53:5절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그 순간을 마음에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담당한 대가 지불입니다. 23절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죄를 범하자마자 금방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뭇잎을 얽어 가지고 부끄러운 하체를 가리고도 너무나 부끄러워 나중에는 숨어 버렸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얼마 전에 여성들만 골라서 살해한 범인이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라고 초청하셔도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끌어다가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사흘 안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한 사람도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가 가져다 준 수치를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다시 세워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는 여호수아 59절의 말씀대로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현장입니다.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원히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하시고'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구약에 예언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히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명분을 다 완전하고 충분하게 주님이 갖추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의 길을 우리 주님이 닦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을 만큼 완벽하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다 이루어 주신 현장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그 십자가 가까이 가서 조금이라도 함께 있어보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신앙 선배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십자가 곁에서 떠나지 않기를 사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서 끝까지 주님 의 고난과 죽으심을 함께 한 자들 - 그들은 은혜 앞에 선자들입니다.

 

 

영국 런던 교외인 줴라드 크로스란 곳에 WEC International, 즉 국제복음선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출신 가운데도 이곳에서 한 생을 바치는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우리 교회 1호 선교사로 떠나 지금 터키에서 사역하시는 안순자 선교사, 그리고 태국에서 사역하시는 하홍종 선교사, 지금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섬기시는 김미선 선교사,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이슬람권에 있는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애쓰시는 김명주 선교사님들이 다 이 WEC 소속 선교사들입니다.

 

 

"WEC International20년간의 선교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C.T. Studd란 분이 1913, 다시 20년간의 아프리카 선교를 새로이 떠나기에 앞서 설립한 단체입니다. 그 분은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인기 절정의 크리켓(Cricket)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그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중국으로 떠납니다. 우리로 치면 마치 이승엽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캄보디아 선교를 간다며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출국해 버리는 것과 같은 신선한 충격을, 그 분은 영국민들에게 주었습니다.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던 그 분은 끝내 아프리카에서 뼈를 묻습니다.

 

 

아프리카에 머물던 20년동안 그 분은 영국에 남겨 둔 가족을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는 그만큼 먼 나라였습니다. 그 분이 아프리카에서 순교한 뒤, 그 분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받들어 WEC를 오늘의 모습으로 일구어 놓았습니다. WEC 본부의 지하실에 내려가면 수 십개가 넘는 가방들이 바닥과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채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임기를 마친 뒤 귀국 길에 찾아가겠노라고 남겨둔 가방들입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님들의 가방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아있는 가방들 - 바로 그 가방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위한, 타인을 위한 자기 희생, 자기 헌신의 표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방의 주인들이 어느 곳에서 생을 마감했건, 그들이 있었던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 주기에 합당한 참된 십자가의 증인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가방은 단순한 가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또 다른 형태의 십자가요 이 땅이 남겨진 참 생명의 흔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란 결국 삶이란 하나의 가방으로 남게 됩니다. 지금껏 여러분들께서 꾸려온 가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희생과 헌신의 표적입니까, 아 니면 자기 욕망과 이기심의 결정체입니까? 지난 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천대와 조롱과 멸시를 받던 제자들은 더 이상 땅의 것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한 명의 낙오자 가룟 유다 외에 모두가 자신을 위해 몸 찢으시고 피 흘리신 생명의 예수를 위해 아낌없이 다 주를 위해 한 생을 믿음으로 살다 갔습니다. 저 하늘나라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은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고독과 상처가 없습니까? 목마름은 없나요? 십자가에 예수님은 바로 내가 안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고독과 상처와 목마름은 바로 죄로 인한 아픔들입니다. 이로 인해 고통과 수치를 제하시고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십니다.

 

 

만일 당신을 만나시고자 그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오게 하시고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솔직하시겠습니까? ‘내가 무척 외로웠다고-- 그동안 인생의 상처로 많이 아팠다고--목말랐다고--고백하시겠습니까? 내게 이제 주님이신 당신이 필요하다고--주께서 나를 구원해달라고 그렇게 구하시겠습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 말입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 이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님 앞에 오십시오. 지금 오십시오. 지금 결단하십시오. 지금이 나의 변화의 기회입니다. 이 십자가 곁에 있는 그들은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니라 승리자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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