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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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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3-25 십자가 - 어린 양을 보라 (요1:29-3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03-25 | 조회: 1234

 

사람은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누구나 꿈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드러내 놓고 자기 꿈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한 생을 살면서 어떤 꿈을 가지고 살까, 금년에는 어떤 꿈을 이루어볼까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꿈을 먹고산다는 것, 꿈을 위해서 뛴다는 것,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우리의 희망찬 삶을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해 줍니다. 꿈이 큽니까? 그 사람은 대인입니다. 꿈이 작습니까? 그 사람은 소인입니다. 꿈이 고상하면 그 사람도 고상하고 꿈이 천박하면 그 사람도 천박해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유명한 세례 요한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꿈은 우리 생각하는 그런 꿈이 아닙니다. 요한 세례의 꿈은 자신은 쇠하여야 되지만, 내가 소개하는 그 분 예수님은 흥해야 된다는 꿈이 있습니다. 요한이 등장하던 그 시대는 정말 불행한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말라기 선지자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 음성이 단절된 어두움의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두움을 뚫고 유대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이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에게 임했습니다.

 

 

이 유대광야는 오늘날처럼 시설이 잘 갖추어진 도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왕래하는 번화가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낮이면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고 밤이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피워야하고, 맹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고적한 광야였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세례요한을 붙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요한의 메시지는 마음상한 사람들의 심령을 위로해주거나 인생의 고통 속에서 낙심하고 좌절한 자들을 향하여 따뜻하게 해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대단히 원색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저분이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단호하게 자신은 당신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27절에 보면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주인의 신발을 풀고 묶고 하는 것은 천한 노에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르켜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줄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대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사명을 받은 소리꾼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낮추며 오실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합니다.

 

 

누구나 인기가 절정에 오르고 사람들의 기대가 높아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분수를 벗어나기 쉽습니다. 모두가 메시야로 보면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대중적인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기 분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오늘 본분을 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라” -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36절에도 보라 하나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 어린양은 속죄의 제물로 드려지는 희생양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아갈 때 자신들은 속죄할 제물은 어린양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 어린양은 장차 오실 구원자인 메시야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를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칩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회개하는 대 속죄일이 있습니다. 이 속죄일에는 먼저 제사장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데 대제사장은 향불과 수송아지 피를 들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향불을 법궤 양면에 놓아 연기가 항상 피워 오르도록 하고 피는 법궤에 일곱 번 뿌려서 속죄의 뜻을 향합니다. 제사장들이 지은 죄를 먼저 용서받고 나와, 그 다음에 백성들의 죄를 위한 제사를 지내는데 이 제사를 위해서 두 마리의 염소, 또 다른 곳에는 두 마리의 양을 선택합니다. 이 두 마리의 양이나 염소를 놓고 제사장은 제비를 뽑습니다.

 

 

무슨 제비냐 하면 이 두 마리가 다 제물로 죽을 것인데 성전 안에서 죽일 염소와 광야로 보내져서 죽일 염소를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항아리 안에다가 제비를 만들어서 놓고 제사장이 양 손을 넣어서 같이 집어가서 그 집은 것을 두 마리의 염소의 머리에 내려놓습니다. 그때 제사장은 노래를 부릅니다. “오늘의 선택은 여호와에게서로다.”하고 노래를 부르면 모여 있는 모든 백성들이 화답송을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영광의 이름이 영원할 지어다.” 이렇게 화답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염소의 목에는 빨간 리본을 달아 표시를 합니다.

 

 

이것이 아사셀 양, 혹은 아사셀 염소라는 것입니다. 아사셀이란 말은 추방당했다.’ ‘광야로 보내지다.’ ‘광야로 내보낼 양을 선택했다.’라는 말입니다. 대제사장은 이렇게 선택해놓고 그 어린 염소나 양의 머리에 안수기도를 해줍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여기 모여 있는 모든 백성의 죄를 다 거두어 염소의 머리에 뒤집어 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백성들의 죄를 혼자 다 뒤집어썼으므로 죄가 많아지고 아주 더러워졌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안수기도가 끝나자마자 그 염소나 양에게 침을 뱉고 더럽다고 욕하고 발길로 차는 그런 의식을 행합니다.

 

 

그러면 양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불의를 대신 지고 버림을 받게 됩니다. 최후에 아사셀은 고통 중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갑니다. 이것이 아사셀양입니다. 이런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만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의 그림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 한 마리를 죽이는 유월절 의식을 행했고, 대 속죄일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아사셀양을 보았기 때문에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옆을 지나가시는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고전5: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자신이 피가 터지도록 외쳤던 그 참 빛으로 오신 예수, 생명의 예수 그 어린양 예수가 오시는 것을 보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저 없이 그들의 등을 떠밀어 예수님에게 가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독생자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화목제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셨고(2:17), 선물까지 주셨습니다(17:25 ; 고전 12:4-11). 하나님께서는 사망에서 건지시고, 자녀의 권세를 주시며,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그 엄청난 희생이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은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분입니다. 벧전2: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죄를 범한 일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친히즉 자진해서 나무에 달려 자기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담당했다고 하는 이 말을 깊이 음미해 봅시다. ‘담당한다는 말은 아나페로라고 하는 헬라어 용어인데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떠맡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길은 가다가 한 사람이 무거운 짐을 다 못 지면 옆 사람이 그 짐까지 떠맡아서 이중으로 지고 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사도 요한은 세상 짐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예수님을 보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죄를 떠맡아서 혼자서 지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담당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당신이 과거에 범한 모든 죄를 혼자 떠맡으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은근히 마음에 비밀히 숨겨둔 죄를 대신 맡으신 분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 약해서 범할지도 모르는 죄까지도 주님은 떠맡으셨습니다. 전부 다 떠맡으셨습니다. 혼자서 다 대신 지셨습니다.

 

 

세상에 이것만큼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죄를 그 분이 대신 맡아 주셨다니! 이것만큼 눈이 번쩍 뜨이는 뉴스가 있을 수 있나요? 당신이 몇 억 원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하여 그 빚을 전부 떠맡았다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여러분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마음에는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까요? 빚 좀 갚아준 사람만 생각해도 이렇게 감격하는데 평생토록 자신의 힘으로 감당치 못할 죄를 무조건 떠맡아 주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우리는 얼마나 감격해야 할까요?

 

 

다음으로, ‘담당했다의 의미는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혼자 떠맡으셨으니 그에게 무엇이 뒤따르게 될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주님에게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심으로 희생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와의 관계는 단절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로운 몸입니다. 드디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모든 죄 용서받은 놀라운 기쁨이 찾아옵니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찬송가 가사대로 우리의 모 든 흉악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희생제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죄를 다 떠안으시고 내 인생의 가장 복된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도 우리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이제는 율법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마귀도 우리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보라!! 바로 저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한 장의 명화가 기독교사에 놀라운 영향을 준 일이 있습니다. 스텐버그의 십자가라는 그림입니다. 성 제롬 대성당 위고 신부의 요청으로 스텐버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텐버그가 그림을 그리다 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을 끌어 화료를 올리기 위한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텐버그는 이렇게 그림을 잠시 중단한 동안 집시 여자인 페피타를 모델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화실에 와 있던 모델 페피타는 초안만 잡혀있는 예수 상을 보고 스텐버그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스텐버그는 너무나 흔한 이야기라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소녀의 간청에 못 이겨 점심시간에 대충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페피타는 몹시 감동하였고, 소녀는 불쑥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 훌륭한 사람을 선생님도 사랑하고 계시겠지요?” 라고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한마디가 스텐버그의 가슴에 꽂혀 스텐버그를 몹시 괴롭히고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 예수를 사랑하는가?’ 곰곰이 생각하고 며칠 동안 깊은 묵상에 잠긴 후에야 스텐버그는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림이 완성된 뒤에 화대도 사양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작 진젠돌프가 젊었을 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고민하며 방황하던 어느 날 제롬 대성당에 걸려 있는 스텐버그의십자가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한참 바라보다가 진젠돌프는 마음속에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십자가를 위해 살아야겠다.’ 십자가 그림에 감화를 받은 진젠돌프는 전 재산을 바쳐 선교회를 창립하고 모라비안 교파를 형성했습니다.

 

 

진젠돌프는 영국을 무혈혁명으로 이끌었던 존 웨슬레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존 웨슬레가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대서양을 건너오던 중 풍랑을 만나 죽음의 두려움 앞에 있을 때,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여서 찬송하는 모습, 그들에게 있는 평안을 보면서 큰 도전을 받게 됩니다. 존 웨슬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뜨거운 신앙과 전도열에 자극되어 새사람이 되었고 영국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텐버그와 진젠돌프 공작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삶에 대한 통찰과 회개의 계기를 마련해 준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토록 사람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단 말입니까? 이들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어디서 나온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늘 이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안고 살아야하는데 때로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이 메말라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구원의 그 감격이 있습니까? 그 예수님과의 첫 사랑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 사랑 때문에 내게 맡긴 사명을 아무리 힘이 들어도 묵묵하게 감당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설교를 듣고 머리로는 모든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 가슴에 그 보혈이 말랐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여보 당신 왜 울어요?” “내 마음이 병들었어. 내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 얘기를 들어도 마음에 감격이 없어.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어. 내 심령이 병들었어.” 이 고민은 스펄전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이런 심각한 통증이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묻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까?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그 이유는 기도를 못하고 있든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비해 오늘날 성도들이 얼마나 육신적으로 부유해졌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세련되어졌습니까? 하지만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 시간이 줄고 있기 때문에 힘겹게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해이해졌다면 영적으로 각성하고 열심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내일부터 고난주간 특별 새벽 기도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연례적인 절기가 아니라, 신앙이 더욱 새로워지고 성숙해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마음의 스크린에 영상으로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대속의 고통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사랑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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