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기쁘고, 뜻 깊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의 아침! 예배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부활의 영광과 소망,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함께 부활의 인사를 나눕니다.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 바로 당신을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극복이요, 바로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일전에 한 청년이 신앙상담을 청해 온 일이 있습니다. 이 청년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됐는지를 되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답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도 믿고,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사실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삶 속에서 예수 부활을 체험하며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한 마디로 신앙과 삶의 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 부활을 믿고 앎으로 부활신앙을 갖는 것과 삶 속에서 예수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신앙으로 사는 것 사이의 분리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이 다가 오면 예수님의 부활을 다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날을 위해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축하합니다. 강단도 장식하고, 부활절 달걀도 나누고, 부활절 축하 음악예배도 드립니다. 그런데 부활절이 지나면 마치 국경일이 지나간 것처럼 다 잊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예수 부활과는 상관없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런 신자들은 예수 부활을 ‘과거 거기’에서 있었던 사건으로만 회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나의 삶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체험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입니다. 그때까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면서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것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들이 주님을 배신한 후 주님과 갖는 첫 대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당신의 평강을 부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했던 배신자들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배신자들을 계속 신뢰해 주시고 중용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반드시 또 다른 배신을 행하는 법이거늘 과연 제자들만은 예외일 수가 있겠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겁쟁이들에게 평안을 빌어 주시고 배신자들을 계속 중용하시겠다는, 얼핏 생각하면 시간 낭비요 헛일처럼 보이는 일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행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본문 22절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그렇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아무리 겁쟁이였다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건 참 평안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하기만 하면 씻을 수 없는 배신의 전과자라 할지라도 주님의 제자로 중용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여기에서 숨을 내쉰다는 동사 emphuso는 숨을 불어넣는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냥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숨결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거룩하신 영―즉 성령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숨결,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숨결인 것입니다. 이 헬라어 동사는 신약에서는 본문에 단 한 번 사용되었으며, 같은 뜻의 히브리어 동사는 구약에서 두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구절은 창세기 2장 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흙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므로 비로소 살아 있는 영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동사는 구약 에스겔 37장에서 한 번 더 사용되고 있습니다. 겔 37:9-10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여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 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어느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는 마른 뼈, 해골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였을 때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숨결이 그 마른 뼈에 들어가매 마른 뼈들이 살아 일어나 큰 군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다운 성령의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숨결 속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영원한 숨결이요, 진흙을 생령으로 마른 뼈를 군대로 변화시키시는 창조의 숨결이요, 전능하신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숨결 속에 있을 때 겁쟁이가 평강의 사람이 되며, 배신자가 참제자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그 영원한 숨결, 진흙을 생명으로 만드시는 그 창조의 숨결, 마른 뼈를 군대 되게 하시는 그 전능하신 사랑과 생명의 숨결을 말입니다. 겨우 7-80년 헛바람만 일으키다 끝나 버릴 우리의 숨결 속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의문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 인생의 모든 해답이 실려 있습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 사랑치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곧 사랑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평강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진리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 분의 숨결이 능력입니다. 그 분의 숨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 � 안타운 것은 이 부활의 은혜 앞에선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21장에 보면 본문 2-3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를 비롯하여 7명의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라고도 하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나섰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비록 3년 동안 쉬었다고 해도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같은 사람들은 평생을 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사람들입니다. 어황이 좋지 않더라도 다만 몇 마리라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들은 참담한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참담한 실패를 겪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실패하고 낙심하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시고, 다시 도전하게 하시고, 길을 안내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용기를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다시 도전하게 이끌어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패자부활을 시도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지치고 곤하여 주저 앉아있을 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힘들고 버티기 어려워 포기하려고 할 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격려하십니다. 따뜻한 손길을 우리 등을 두드려주십니다. 이 때 우리는 큰 격려를 얻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신앙입니다. 지치고 힘들어 주저 앉아있을 때 다시금 힘을 얻게 되는 신앙 바로 그것입니다. 보세요. 부활하신 주께서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주실 때, 제자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신의 한 목숨을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 한 생을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은 너무나 황홀하기에 이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바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입은 사람들은 이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능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성공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들은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를 거부했습니다. 두벌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생을 선택하고 그 가난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을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황홀한 능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 주님 붙잡고 이 땅에서 주께서 맡긴 사명을 당당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온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바로 지금부터 140년 전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벽안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소망이 없던 조선 땅에 어둠의 권세가 득세하던 조선 땅에 빛의 자녀 된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한 것입니다. 저는 부활절을 맞이한 이 시점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마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처럼 조선에 소망을 주기 위해 이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을 바라본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조선 땅,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140년 전의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땅에,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YMCA를 조직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후 조선에는 희망의 싹이 돋아 오르고, 지금은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40년 전 언더우드와 같이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믿음 하나가 오늘 찬란한 부활의 열매가 이 땅에 맺히지 않았습니까? 이제 이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역전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인생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십자가만 바라본다면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볼 때 희망이 샘솟게 됩니다.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최후의 승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일시적인 패배 앞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는 것이 너무 힘이 드십니까? 피곤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으십니까? 지금 여기에 찾아오셔서 손 내미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잘 견디시고, 잘 이겨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지금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 아침 영안을 열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손을 잡으십시오. 그 손을 잡고 지금 어려움을 견뎌내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이제 다시 일어나 부활의 증인으로 나아가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