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 리스트(bucket list)’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시한부를 선고 받은 두 주인공이 남은 시간동안 못하고 살았던 것을 하나씩 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버킷 리스트’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에 들어갈 걸’, 열심히 준비해서 ‘대기업에 다닐 걸’,돈을 더 벌어 ‘멋진 집에 살 걸’ 등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후회하는 것의 대부분은
- 남의 평판에 신경 쓰며 산 것,
- 일만 하며 인생을 허비한 것,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감정을 억누른 것,
-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것,
- 행복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것 … 등이라고 합니다.
이런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없다면 오늘 생각해보고 지금부터라도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에 ‘내가 꼭 이런 것은 해보고 싶다’는 리스트를 작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사도 바울에게 버킷리스트를 물었다면 뭐라고 답했을까요? 짐작컨대 ‘복음전파’에 관련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는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장면입니다. 지금 바울을 감옥에 집어넣기 위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당시 최고의 변호사인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 바울을 총독 앞에서 논리적 근거를 대고 고발한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발의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첫째, 소요를 일으켜 로마의 평화를 위협했다는 것이고. 둘째, 나사렛 이단의 괴수이다. 셋째.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으로 꾸며 기소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정말 억울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에서 지금 고소인이 누구입니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아닙니까? 그는 원래 성전에 있어야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기능과 본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사랴까지 와서 로마 총독 앞에 선 것입니다.
첫째 고소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5절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자, 우선 여기 이 구절에 사용된 ‘전염병’, ‘소요케 하는 자’라는 표현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바울을 일컬어 염병 같은 자라 했습니다. 염병이 무슨 병입니까? 보통 장티푸스를 염병이라 하는데 원어로 보면 염병, 로이모스(λοιμ?s)는 흑사병을 가리킵니다. 이 병에 감염되기만 하면 치명적입니다. 더둘로라는 변호사가 바울에게 '염병 같은 자'라고 말한 뜻은 바울이 세상에 해로운 사상을, 위험한 사상을 퍼뜨린다는 자라는 말입니다.
왜 더둘로는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요?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마음을 바울이 다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염병처럼 바울을 만나면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는 거예요. 전염병이 옮겨지듯 막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말이죠. 그를 만나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이런 거짓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한 또 하나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 다시 한 번 보시죠.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는 자리에까지 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면 자신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당시 팔레스틴은 거짓 메시야들이 출현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민심을 소란케 함으로 로마 당국의 골치를 썩이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도 21장에서 바울을 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애굽의 거짓 선지자로 오인한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거짓 메시야를 추종하는 이단의 우두머리라면 로마에 의하여 반드시 처벌받아야 할 중죄인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 대한 세 번째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였습니다. 바울이 이런 고소를 당한 연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비난의 배경을 바울이 체포되던 행21:28-30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 당시 성전 법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절대로 이방인의 뜰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가거나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돌에 쳐 죽이거나 사형에 처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그들과 가까이 하던 바울이 이방인과 함께 성전 근처에 있었으니 그들이 오해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에 정통했던 사람,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바울이 아닙니까? 누구보다도 성전 법을 잘 아는 현명한 바울이 왜 드로비모를 데리고 성전 근처에 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에베소에서 자신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동행한 에베소 출신의 이방인 신자 드로비모에게 바울은 가능한 이 거룩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잘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드로비모가 성전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최대한 성전 가까운 곳에서 성전을 볼 수 있게 하려는 바울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드로비모를 향한, 한 영혼을 향한 바울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영한 영혼 한 영혼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바울, 그 영혼을 향한 사랑 그 사랑 때문에 바울은 드로비모를 데리고 최대한 성전 가까이 간 거예요. 오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말입니다. 결국 바울은 어떻게 됩니까? 드로비모에 대한 이 배려 때문에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 다시 로마 감옥에서 2년의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바울이 이 일을 후회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흔적도 없습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의 존재 목적, 아니 생존의 이유, 그것은 바로 영혼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후회하기는커녕 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는 병든 드로비모에 대한 배려는 계속되었습니다. 아니 그는 그의 마지막 서신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그것은 드로비모에 대한 바울 사도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기후 좋은 항구도시 밀레도에서 병든 그가 요양을 하도록 선처한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바울의 도전은 그가 만난 한 영혼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롬1:15절에 보면 본문에 소개되는 바울에게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보기 원했지만 로마서 1장 13절에 “길이 막혔도다”라고 말합니다. 왜 이토록 로마로 가는 길을 집착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볼까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실 따지고 보면 바울이 왜 그들에게 빚진 자입니까?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나니까 한 영혼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생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무런 공로 없이, 값없이 구원을 받았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꼬? 아, 나는 복음의 빚진 자로다”라는 심정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은혜를 갚고 싶은데, 그 은혜를 갚는 것은 곧 자신도 다른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원래 바울이 이런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초대 교회가 핍박받을 때 교회를 잔멸할 만큼 앞장을 섰던 자입니다. 여러분, 잔멸했다는 단어(엘뤼마이네토)는 원래 멧돼지가 포도밭을 마구 짓밟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만큼 폭력적이고도 잔인했다는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여자까지 마구 잡아다 옥에 넣었겠습니까? 참으로 잔인한 핍박을 서슴없이 했던 자가 바로 바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는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 �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무슨 염치로 복음을 전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십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 삼지 않으시고 그를 사도로 세우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바울은 예수를 영접한 후에 한눈 한번 팔지 않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오직 주님만을 위해 한 생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세상은 바울을 어떻게 하든 세상 법정에 세워 죽이려고 별별 죄목을 다 뒤집어씌우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세상 앞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그는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한 생을 주 앞에 아낌없이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보아야겠습니다. 바울은 말도 안 되는 고소를 당하는 자리에서도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이 부패한 한국사회가 치료받기를 원합니까? 희생 없이 말입니다. 친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제가 몇 사람을 놓고 시간을 내어 기도해 보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쁜 일과를 끝내고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시간인데,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돈을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돈을 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이 들 것입니다. 바쁜 시간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형편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조그마한 수고 하나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자신의 생명도, 자신의 생각과 마음도,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도 그리스도가 주인이시기에 주인이신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무엇을 하든지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불러 가신 다 하더라도 그 생명이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께 유익이 된다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주님을 위해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도 바울만의 믿음이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과 우리의 사명이 다르고, 사도 바울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다르다 하더라도 믿음의 방법과 가치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점점 믿음의 가치가 그 힘을 잃어가기 때문에 우리 안에 신앙적 열망, 간절함의 열망이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다. 삶이 여유롭고 편안해지면서 신앙적 열망은 점점 더 식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너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신앙의 행복을 느낄 신앙적 감각이 점점 무디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적 감각이 무디어지다 보니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내 자신이 영적으로 메말라져간다는 사실조차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세상적인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다 보니,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 나에게는 오직 주님뿐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첫사랑의 감격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첫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면서 예배에 대한 열정도, 찬양하는 열정도, 기도하는 열정도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에 마음 빼앗기고 세상의 것에만 너무 집중한 채 살다보니, 세상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우리의 영혼이 메말라져간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은혜가 아닌 세상의 풍요로움에 목숨을 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간절함이 사라지면 우리의 신앙은 점점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말씀을 읽어도 말씀이 내 삶에 능력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그저 구경꾼의 심정으로 읽을 뿐입니다.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고 죽어가는 내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어야 하는데, 재미를 위해서 읽는 소설처럼 여겨집니다. 소설처럼 읽는 말씀은 우리의 삶에 전혀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빚을 갚으려는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은행에 빚을 졌는데 갚지 않으면 빚을 갚으라고 계속해서 독촉장이 날아옵니다. 갚지 않으면 안 됩니다. 파산신청을 하지 않는 이상 빚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행에 빚을 지면 어떻게 해서든지 갚으려고 합니다. 빚은 그만큼 우리에게 부담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랑에 빚진 자로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행처럼 우리에게 빚을 갚지 않으면 신용불량자를 만들겠다고 독촉하지는 않으십니다. 은행처럼 재산을 압류하겠다고 협박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수록 거룩한 부담감을 가져야 합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끌어안고 있으면서 아무런 부담 없이 안일하게 생활한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빙산과 부딪혀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와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졌어도 침몰하고 있습니다. 성경적 역사관은 종말론입니다. 언젠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서게 됩니다. 배가 기울어져 가는데 멋진 레스토랑으로 안내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의 길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은 사망의 권세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망의 권세가 얼마나 막강한지 휘둘리면 꼼짝 못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냄새를 맡은 자, 구원을 얻어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이 세상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끝에 허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을 추구하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빚 갚으며 삽시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부러워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만이 나와 세상을 살린다는 사실을 믿고 복음을 누릴 뿐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