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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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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5 복음에 미친 사람 (행26:24-3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04-15 | 조회: 1133


얼마 전에 눈길을 끈 광고가 있었습니다. ‘아픔 없이 성공 없다’, ‘1년만 미쳐라는 광고입니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앞만 보고 나가라는 희망을 주는 광고입니다. 최근에 미쳐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들이 많습니다. ‘공부에 미쳐라’, ‘건강에 미쳐라’, ‘자기계발에 미쳐라’, ‘20, 인테크에 미쳐라’, ‘서른 살, 만남에 미쳐라등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어떤 일에 미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돈에 미친 사람도 있고, 사랑에 미친 사람도 있고, 도박에 미친 사람도 있고, 사업에 미친 사람도 있고, 공부에 미친 사람도 있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친 자가 대가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미치다라는 말에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니아인데 포악하고, 거세어지는 광기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쫓아내어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신 군대귀신이 쇠사슬에 매어 있는데 이것이 마니아입니다. 다른 하나는 맬랑콜리아인데 조용하고 우울한 단어입니다. 흔히 말하는 우울증을 일으키는 것이 맬랑콜리아입니다. 요즘에도 흔히 어떤 일에 광적으로 빠져 좋아하는 사람을 마니아라 합니다. 우울한 증세를 맬랑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미치는 것은 마니아맬랑콜리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미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하나님을 위한 열정과 열광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지금 우리가 함께 대하는 행 26장은 로마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원하여 죄인이 된 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고관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재판정에 선 죄인에게 최후변론의 기회가 주어지면 대부분은 가벼운 처벌을 받기위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며 선처를 구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으니 용서해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최후변론의 기회가 주어지자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였던 자신이 왜 율법을 포기하게 됐는지, 그리스도인들을 발본색원하여 처벌하는 일에 앞장섰던 그가 왜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 바울의 이야기를 듣던 총독 베스도가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며 바울을 미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무지를 미친 탓으로 돌리는 베스도의 비난에 대해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온전함을 진술합니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바울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베스도의 말대로 사도 바울은 당대의 유명한 석학이었습니다. 헬라의 학문이며, 로마의 법률이며, 유대의 전통이며 두루두루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출신성분도 대단했습니다.

 

 

바울의 그만한 경력과 배경이면 교육계로 진출했더라면 국립대학의 총장 정도는 했을 것입니다. 사업계로 진출했더라면 대그룹의 총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치계로 진출했더라면 지방 총독은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건만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바울이 이처럼 세상 앞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믿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를 갈고 미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눈뜨고 봐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싫어했는지 아십니까? 26:9-11절을 보세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이는 한마디로 예수 믿는 자를 잡아다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기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이 말은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과격파인 is 테러 단체를 보세요.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에 세계 각 곳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키며 자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무참히 죽이는 일을 하는 것처럼 바울도 과거에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드리고 죽이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을 알았던 베스도가 달리 설명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24절에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네가 미치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미쳤다고 하는 베스도에게 말합니다. 25절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무슨 말입니까?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게 아닙니다. 지금 나는 참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그 예수가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닙니까? 왕께서는 그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다 알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디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일입니까? 온 천하가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베스도 총독이 미쳤다고 하는 바울은 제 정신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미치지 아니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입니까? 그는 왜 자신이 미친 듯이 한 생을 살았는가에 대해 그의 마지막 서신인 딤후에서 1:12절에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충성되이 여겨”, 이 말을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주님이 나를 믿어 주셔서라는 의미입니다. , 주님께서 바울을 본래 믿을 만한 자임을 꿰뚫어 보시고 그를 충성되이 여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래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본래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는데, 그러한 자신을 주님이 믿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비방하고 복음을 방해했던 바울을 주님이 믿어 주셔서 사도라는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굉장한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을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시고,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 삼지 않으신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이 믿어 주셨기 때문에 먼저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마치 하루 종일 놀다가 오후 5시에 일당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게 된 노무자의 심정으로 헌신했습니다. 감지덕지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실토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한 위기를 넘겼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쳐들고 자기 공로를 이야기할 만도 한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수고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합니다. , 겸손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렇게 자신을 믿어 준 그 시실을 알 때 한 생을 다 쏟기까지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살아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시면 신문을 하던 자들이 바울에게 죄를 찾지를 못합니다. 본문 30-32절 말씀을 보십시요.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아멘. 바울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버니게는 판결을 내리기 위해 장소를 옮겨 바울의 증언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결박하여 둘 만한 혐의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무죄방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를 하여 자기를 로마로 보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죄인이 되어도 좋고, 예수님 전할 수 있으면 감옥에 갇혀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바울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압니다. 당시 지중해를 항해하는 일은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km가 넘는 엄청나게 먼 길입니다. 더구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바울을 죽이려는 암살단이 구성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무죄가 입증되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죄인이 되어 로마가 호송되어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선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복음에 미치면 힘이 생기고 능력이 일어납니다. 낚시에 미치면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낚싯대 매고 나갑니다. 당구에 미치면 당구알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리 바빠도 당구장에 갑니다. 골프에 미치면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도 비 오는 날에도 골프장에 나갑니다. 고스톱에 미치면 배가 고픈 지도 모르고 화투짝 들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미치는 것이 파워라는 것입니다. 정신 병원에 가면 미친 사람 한 사람을 장정 몇 사람이 달려들어도 당해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미치면 능력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디에 미쳐야 하겠습니까? 무엇에 미쳐야 하겠습니까? 이왕 미칠 바에는 예수로 미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한 사람만 예수에 미쳐도 모든 자녀들이 변할 줄로 믿습니다. 가정에 예수에 미친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가정이 변할 줄로 믿습니다. 동네에 예수에 미친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동네가 변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245절에 더둘로라는 사람이 사도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여기에서 염병이란 당시 무섭게 유행하던 전염병 페스트를 의미하지만, 예수에게 미쳤던 바울의 힘, 복음의 능력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페스트 병이 무서운 세력으로 전염되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안디옥으로, 다시 소아시아와 마케도니아에까지 이르렀고, 나중에는 당시 세계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복음은 로마제국이 잘 닦아 놓은 도로를 따라, 유럽 각지로 퍼져갔고 바다 건너인 영국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우리 한국으로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믿게 된 줄로 믿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이 그토록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까요? 예수님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미친 자의 태도가 아닙니까? 이런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이 보기에 미친 것처럼 살아갑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을 들고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변에 성경을 들고 서서 복음을 전하려다 40대 젊은 나이에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희생되었습니다. 그의 주검이 장사나 제대로 치러졌겠습니까? 시체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는 인생을 미친 것처럼 살았습니다. 왜냐면 그 생명을 바칠 때 하늘로서 오는 놀라운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전라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황해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면 미친 짓이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유능한 의사요 학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안전하고 편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고 성경을 들고 전도하러 다니다가 물에 빠져 허망하게 죽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무엇이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어도 왜 그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까? 왜 죽도록 고생을 하더라도 그 고생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고후5:14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 대답을 알려줍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했는지, 왜 사람들이 그렇게 손가락질 하는데도 복음에 미친 사람처럼 살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강권적으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인생을 흔들어 놓았던 그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런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힘들고 고생의 길을 걸어가도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기쁘고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9절의 사도 바울은 재판정에서 세상이 그를 결박했지만, 그는 이 법정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이 아니라 오늘 내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일하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얼마나 대담한 선포입니까? '이렇게 죄수로 결박되어 여러분 앞에 서 있는 모습 빼고는 나는 여러분이 나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여러분 한나라의 대왕과 그 앞에 죄수의 몸으로 선 사도 바울, 이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보고 자기를 닮으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도 나처럼 되십시오"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 말은 "왕이여 썩을 땅의 권세가 아닌 다른 권세가 있는 것을 아십시오. 멸망할 세상의 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힘을 알기를 원하오이 말이 아니겠습니까? 왕을 침묵케 했던 저 의젓한 바울의 기개를 보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힘 앞에서도 그 우아함과 고상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는 저 대장부를 보십시오. 그는 어디에서나 누구 앞에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하게 뿜어댔습니다. 향나무는 찍는 도끼에게까지 향냄새를 묻히듯이 사도 바울은 때리는 채찍에도, 핍박하는 재판관의 가슴에도 그리스도의 진한 향기를 토설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만나면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나아가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이 말은 나처럼 진정한 자유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왕은 세상 영화와 권세와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러워하기는커녕 이 왕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왕이라 하나 저에게서 금관을 벗겨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을 것이 없는 허깨비에 불과했습니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었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속빈 강정이었습니다. 죄악과 탐욕의 노예였고 정욕의 포로가 되어 살았습니다. 몸은 자유했으나 저의 영혼은 사슬에 묶여있는 가련한 인간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을 향하여 "당신도 이처럼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즉 왕관을 쓴 노예가 되기보다는 무관의 자유인이 되고 죄악의 포로에서 벗어나 세상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영혼의 자유자가 되란 말입니다. 바울의 몸은 투옥되어 있었고 손발은 묶여있었으나 그의 심령은 한없이 하늘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무엇엔가 미쳐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빠져들게끔 되어 있습니다. 흔히들 10대는 사랑에 미치고, 20대는 야망에 미치고 30대는 소유에 미치고, 40대는 정욕에 미치고, 50대는 늙음과 고독에 미치고, 60대는 명예와 죽음에 미친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미쳐 살아가십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더라고 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았더라고 하면 독생자를 날 위해 보내 주실 수 있었더라는 얘기입니까? 오늘 우리 시대는 무감각의 질병으로 역사가 시들어 가고 교회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무감각합니다. 신앙의 열정도 감격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 때문에 오늘 이 시대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숯과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숯과 다이아몬드는 탄소라는 같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소는 같지만 하나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최고의 보석 다이아몬드가 되고, 다른 하나는 보잘것없는 검은 숯덩이에 불과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인생이지만 결단과 선택을 통해서 우리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고, 검은 숯덩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세상적인 이익과 편안함과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믿음의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답고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나라의 보화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욕망에 이끌려 세상적인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에는 우리 인생이 검은 숯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살아갈 인생을 숯덩이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이아몬드처럼 값지고 보배롭게 사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복음에 미쳐서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복음 안에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그 평안을 예수 안에서 맛보지 않으시렵니까?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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