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한민국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정치를 보나 경제를 보나 그리고 문화 예술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종교계까지 혹독한 세월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상실의 시대에 빠진 것 같은 모습입니다. 파도파도 끝이 안 보이는 부패와 타락의 현장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의 마음이 점점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흔히 인생을 가리켜 바다를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만, 요즘은 항해 중에 광풍(狂風)을 만난 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렵기도 하고 짜증도 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인생이 늘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은 잔잔한 호수에 배를 띄우고 유유히 유람하는 뱃놀이가 아닙니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겁니다. 시시때때로 거친 광풍이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지혜로운 인생의 태도일까요? 몰려오는 광풍을 멀거니 바라보며 걱정만 할 게 아니라, 언제나 광풍이 물러갈까 지켜만 볼 게 아니라, 광풍을 어떻게 잘 헤쳐 나아갈 것인지 궁리하는 게 지혜로운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거친 파도만 바라보고 불평하거나 걱정만 할 게 아니라, 파도를 타는 법을 배우자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이겁니다. 부디 이 시간 말씀을 함께 상고하면서 인생의 바다에 광풍이 몰려와도 넉넉히 승리하는 지혜를 터득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던 당시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로 상소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서 가이사 황제 앞에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합니다. 드디어 미결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호송되고 있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롬1:15절에 보면 본문에 소개되는 바울에게 소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보기 원했지만 로마서 1장 13절에 “길이 막혔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비록 죄수의 몸이지만, 그토록 열망하던 로마로 가는 배를 타고 갑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3-14절 보시죠.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처음에는 순한 바람이 불고 항해가 순조로웠습니다. 아마 선원들도 승객들도 콧노래를 부르며 항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웬걸 얼마 후 갑자기 광풍이 몰려옵니다. 그 광풍의 이름이 뭐죠? 유라굴로! 직역하면 북동풍이란 뜻입니다. 거센 회오리바람이죠. 허리케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원들은 배의 가구를 다 버리며 악전고투했으나 풍랑은 잦아들지 않습니다.(18절)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 여기서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는 말은 살아날 희망, 살아갈 희망이 마침내 다 사라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절망 그 자체입니다. 죽기만 기다리는 형국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질려 있는 그들의 모습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살이는 마치 항해와 같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의기양양하게 순항할 때가 있는가 하면 광풍에 돛을 내리고 의기소침하여 표류할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 등 배에 탄 사람들은 유라굴로 광풍으로 말미암아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큰 풍랑 속에서 용기를 낸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백부장의 권력이나 선장의 능력이나 선주의 재력 등으로는 결코 구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런 형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풍랑도 잦아들지 않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남북 대치의 상황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모처럼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지만, 기대 반, 우려 반이 섞여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그냥 주저앉아야겠습니까? 인생의 파도, 역사의 풍랑 속에서-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절망적 풍랑 속에서도 바울 사도는 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4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 곁에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과 하나님사이에 열린 소통의 채널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하나님의 천사는 이 풍랑 중에도 바울 곁에 그렇게 가까이 머물러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풍랑이 일어나도 역사의 주인, 전능자가 우리 곁에 그렇게 가까이 머물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이 지금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고. “너는 가이사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너 때문이라도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이 음성들은 바울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가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기까지 그는 결코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사명과 확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살아갈 희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을 때에도 희망과 용기와 평온을 잃지 않고 구원의 여망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증거하며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져 있느냐는 것입니다.
미국에 피터 로드(Peter Lord)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자기 집 파티에 플로리다 대학의 곤충학자 한 사람을 초청한 일이 있었는데 자기 집 뒤뜰에 연결된 숲속을 산책하고 오더니 그 숲에는 적어도 18가지 종류의 귀뚜라미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귀뚜라미라고요?” 그는 그 집에 여러 해 살아왔지만 한 번도 의식적으로 귀뚜라미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실은 약 200가지 종류의 귀뚜라미 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문득 이 설교자는 사람은 듣기를 배우는 것이며 듣는 귀는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쳤다고 말합니다.
아가5:2에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린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0:4에서 고백하기를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 싼 이 대기권은 온갖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들을 듣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파수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제가 기도의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풍랑을 만날 때 먼저 할 일-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입니다.
본문 2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의 영혼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백이나 환청에 불과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믿는 일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는 ‘말씀 하신 그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가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확신 때문입니다. ‘내가 속한 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의 확신은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가장 강력한 확신입니다! 사43:1-2절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속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심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바울이 풍랑을 만났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유라굴로 광풍이 몰려와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역전승을 기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게 이뤄집니다. 시험이 와도 범위가 있습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faithful)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리고 하나님만 신뢰하며 착실히 살아가면 나중에 분명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당장은 어려운 상황 같지만 하나님에 함께 해 주시면 나중에 가서 놀라운 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3.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이 위로를 받는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동일한 풍랑 속에 고생하던 이웃들에게 참된 위로를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22절을 읽어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라” 이 위로의 메시지는 다시 25절에서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우리에게 오늘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35-37절 보시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여기 보면 완전히 바울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미결수지만 백부장도 그의 말을 듣고, 모든 승객들이 그의 말을 듣게 됩니다. 14일간 굶었던 그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고 축사(축복기도)를 하자 그들이 편안한 마음을 음식을 먹습니다. 그 후에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되는데, 276명 전원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구원뿐 아니라, 바울의 모습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당신의 구속 사역을 아름답게 이루신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나온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제 갓 결혼한 듯 보이는 이들 부부는 부인이 하얀 털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착용했기에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팔에 기대어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이는 젊은 부부의 모습은 참 평안해 보였습니다. 부인이 난소암으로 투병 중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 어려운 환경에서 저렇게 얼굴에 평안한 빛이 가득할 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그것은 자신들의 지금 처한 현실이 두렵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힘든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풍이 부는 바다 한 복판에서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가 고난당하는 그 현장 속에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너는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남은 후반기,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항해를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 주님입니다. 내 모든 고통의 현장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분들 계십니까? 그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겉도 아시고 속도 아시고 밖의 표현도 아시고 속의 생각도 아시는 그 분, 모두 보시는 주님은 내가 힘이 없어 기진할 때도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나를 찾아오심을 막을 세력은 없습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그 분은 내가 쓰러졌을 때의 적은 믿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해주실 주님입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라는 사람의 한 마디를 소개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믿음의 크기가 좌우됩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 누구신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인간이 없는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믿음을 가졌습니까? 여러분들에게 구원받는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구원받는 믿음과 함께, 역사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역사하는 믿음이 있다면 주님 바라보시고 그 주님을 온전히 신롸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십시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