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미국의 공화당 폴 라이언(48) 하원의장이 정계은퇴 선언을 했습니다. 그는 미 의회 내 공화당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미국 보수 세력을 이끄는 40대의 촉망받는 잠재적 대권주자이고 현재 미국의 권력순위로 보면 3위 자리에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은퇴 배경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계속 정계에 머물면 나의 자녀들이 나를 주말 아빠로만 기억할 것이며,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가족 때문이라면 그 어떤 영광도 내려놓겠다는 라이언의 결정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가족관계의 소중함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영광이나 명예를 스스럼없이 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5월은 특히 우리의 가정을 한번 돌아보는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특히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자녀 어떻게 키울까요?’는 부모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식을 보석처럼 여기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보석처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보석도 갈고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돌멩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보석이 값진 보석이 되기 위해서는 연마라고 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연마’(鍊磨)라고 하는 것은 보석 안에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그 보석의 표면을 정교하게 갈아서 반들반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좋은 보석이라 하더라도 연마의 과정을 어떻게 거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얼마나 잘 연마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나 그 사람의 쓰임이 달라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연마해야 합니까?
1. 자녀를 노엽게 하지마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 왜, 어미들아 하지 않고 ‘아비들아’ 했을까요? 이 말을 하게 된 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시대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로마시대엔 “빠드라아 뽀데스따스(Patria potestas)”라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법’이란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자기 자녀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었습니다. 자녀를 버릴 수도, 노예로 팔 수도, 교육이라는 명분아래 채찍질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성경은 혁명적 선언을 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로 노엽게 하지 마라. 로마의 법률이 아니라 주님의 교훈으로 양육해라. 네 법이나 전통이 아니라 주님의 훈계로 양육해라!” 여기 주동사는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녀를 양육할까요? 4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리고 골3:21절에도?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새번역과 공동번역에 보면 ?자녀들을 못 살게 굴지 말고, 그들의 기를 꺾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기를 꺾으면 안됩니다. 자녀들을 못 살게 괴롭히면 안 됩니다. 여기 ‘노엽게’라는 이 말은 '배가 항해를 하는데 바람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배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노엽게 하고 격노케 하는 것은 더 이상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힘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를 꺾어버리고 용기를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자녀들과 어린아이들을 낙심케 하고 화나게 만드는 것입니까?
첫 번째로 인격이 무시당할 때 아이들은 화가 나고, 한 인격적인 존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때 아이들은 낙심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회적인 풍조는 어린아이를 한 인격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람의 숫자를 셀 때에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계수에서 항상 빠졌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종속되어 부모의 보호 아래 있는 존재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그건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별히 유교는 어린아이들은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문화적인 풍조에 살아온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아이들이 독립된 한 인격체라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잘못된 풍조를 과감하게 깨뜨리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식들이 예수님의 축복기도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몇몇의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제자들에 의해서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쁜 예수님께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왔다고 제자들은 그들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아이들을 가슴에 앉고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져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 하나하나를 어른들과 다름이 없는 한 인격체로 보셨던 것입니다. 그들도 축복을 받아야 할 귀한 영혼들이라는 것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부모의 지나친 요구와 통제가 아이로 하여금 낙심케 하고 화를 나게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자신의 희망이나 기대를 자녀에게 투사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배우지 못한 것이 가슴에 한(恨)이 된 한국의 어머니들이 그런 경향이 심합니다. 내가 못 배웠으니까 너는 가르쳐야 하고, 나는 가난하게 살았으니까 너를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합니다.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자녀에게 이루도록 암암리에 압력을 가합니다. 그렇게 자녀의 개성이나 특기를 살려주지 못하고 부모가 짜놓은 틀에 맞는 아이를 만들려고 하니까, 아이들이 비뚤어집니다. 저항심이 강한 아이나 지나치게 소심한 성격의 아이들은 대부분 그런 부모의 통제와 간섭을 받고 자란 결과라는 것이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세 번째 부모의 무관심이 자녀들로 하여금 노엽게 하고 낙심케 합니다. 모든 생명체를 접촉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접촉이란 곧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무관심에 방치된다면 그 아이는 병들고 낙심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의 그릇’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그릇에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마치 배고픈 아이가 칭얼대는 것처럼, 사랑의 그릇에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는 사랑을 받고 싶어 칭얼댑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 많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사랑의 그릇에 사랑을 채우는데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용돈 달라고 할 때 용돈을 주고 학비를 대 주면 그것으로 부모의 할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그릇은 그런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통해서 채워집니다. 내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그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키우는 적극적인 자세는
2. 주의 교훈과 훈계로 길러야 합니다.
첫째, 교훈은 한 마디로 예방적인 차원에서 본을 보이는 행동입니다.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방향을 제시해주고 먼저 본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행동 하나 하나가 어린 자녀들에게는 산 교육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먼저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는 교육이 중요합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들에게 유산이 됩니다.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녀들의 삶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둘째, 훈계로 교육하라고 했습니다.
훈계는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쳐주는 치료적인 차원입니다. 훈계는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쳐주는 채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보면서도 무조건 용서해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자식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들이 마취주사를 맞고 수술하는 것을 애처롭게 여겨 이를 거부한다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아프지만, 채찍과 분명한 훈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큰 사랑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칭찬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대한 몸을 가진 범고래로 하여금 물위로 날아오르면서 춤을 추게 하는 방법은 칭찬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쳐준 대로 잘 했을 때에는 먹을 것을 준다든지 칭찬을 해서 더 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못했을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생각에 잘못했을 때에는 벌을 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했을 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잘 하면 당연한 것이고, 잘못하면 책망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래를 춤추게 만드는 훈련 방법은 그 반대였습니다. 잘 할 때에는 칭찬해 주고, 잘못했을 때에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자 ‘켄 블랜차드’는 잘하면 가만히 있다가 잘못했을 경우 책망하고 나무라는 것을 ‘뒷통수치기 수법’이라고 소개하면서, 그건 결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했을 때에는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칭찬해주면 동기가 부여되고 더욱 잘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잘 했을 때에는 당연한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잘못한 일은 어김없이 책망합니다. 잘할 때 칭찬하면 발전이 없을까봐 잘했을 때에도 조금 모자란 것처럼 나무랄 때도 있습니다. 교육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만 묻어둔 사랑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껴안아 주거나 만져줌을 통해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로 자라게 됩니다.
3. 신앙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오직 주의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무엇보다 예수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명랑해도 하나님 없는 지식은 소망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일관성’과 ‘균형’입니다. 부모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해야 된다며 지나쳐서 과잉보호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바르게 공의롭게 키워야 된다며 너무 엄하게 다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게 무엇일까요?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대로 양육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경을 가르치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매뉴얼’입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출시할 때 제품사용설명서를 끼워줍니다. 이 설명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 제품을 아무리 많은 기능이 있어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게 됩니다.
딤후3:16-17절에 보면, 성경이 얼마나 놀라운 책인지 설명해 줍니다.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인간이 기록한 것 같지만, 그 기록 과정에서 성령으로 영감이 되어 오류 없이 하나님의 뜻을 반영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실천하면 반드시 행복한 인생, 보람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신5:10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성경대로 살면 자자손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인생을 보장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가 무엇인가? 묵상하던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이 자라는 아들을 바라볼 때 마다 어떻게 내가 저 아이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비전과 목적에 맞게끔 양육할 것인가? 기도하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록펠러입니다. 10가지 주의 교훈 지침을 만들어서 이 아이에게 양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록펠러 미국이 낳은 최고의 갑부. 가장 멋있는 부자 중의 한 사람.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 벌었던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그 어머니의 양육의 지침을 따라서 그 자녀들을 양육하기를 기뻐하는 지침 10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그 아버지가 복을 주신다. 2. 평생 목사님과 좋은 관계 안에서 살아라. 3. 주일 예배는 항상 본 교회에서 드려라. 4. 평생 십일조 주머니를 준비하고 먼저 그 곳을 채워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마라. 6. 아침에 네가 세운 목표와 비전을 위해 기도해라. 7.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반성하고 기도해라. 8. 아침밥 먹기 전에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기쁨으로 도와라. 10. 예배시간엔 꼭 앞자리에 앉아라. 한 때 그는 인생의 방황기를 겪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기도 속에 결국 인생의 참된 가치를 깨닫습니다.
그는 돈을 버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목적을 두고 산 사람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주일을 지키며 예배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비록 돈이 그 인생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만도 무려 4,928개였고, 시카고 대학을 비롯해서 24개의 대학을 세웠습니다. 뉴욕 맨허턴의 80만평을 기부하여 유엔본부를 짓게 했으며, 뉴욕의 수도국을 건설하여 뉴욕시에 기부하여 뉴욕시민들에게 무료로 수돗물을 공급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서울 소공동에 있는 YMCA건물도 록펠러가 기증한 돈을 세워졌습니다. 그가 얼마나 부자였는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오늘날의 시세로 한다면 한 때 세계 최고의 갑부로 꼽혔던 빌 게이츠보다도 3배 정도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돈에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목적을 두고 산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오래 살려고 몸부림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지식은 오히려 내 자녀에게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려면 말씀 안에서 살게 해야 합니다. 반드시 신앙으로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들어갈 때 생각과 행동에 변화가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185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소박한 시민이 알제리에서 사망했습니다. 31년이 지난 후 미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뉴욕 항에 유해를 실은 군함이 도착할 때 사람들은 그의 유해를 보기 위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환영예포는 뉴욕시가 진동하도록 울려 퍼졌습니다. 그 주인공은 전공을 세운 위대한 장군도 아니요, 노벨상을 받은 인물도 아닙니다. 세계적인 정치가나 예술가나 발명가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온 세상 사람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지은 사람일뿐입니다. 그는 'Home, Sweet Home'이라는 유명한 노래를 지은 ‘존 하워드 패인’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피고 새 우는 내 집뿐이리? 우리가 진정 쉴 곳은 오직 가정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안에 자녀들은 어떻게 자라고 있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