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신록이 깊어지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계절의 여왕이요, 꿈과 희망의 계절이며, 또한 가정의 달이기도 한 이 5월에 우리는 그 동안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려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분들은 살아생전에 불효한 것, 마음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속 썩여 드린 일만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해도 이 세상의 생존경쟁 속에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고, 또 삶 속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실패와 어려움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하고 걱정 끼쳐드린 것 등 잘 해드리지 못한 것만이 생각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백세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백세까지 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최근 세계 저명 의학학술지인 [랜싯(The Lancet)]에 발표된 영국 임페리얼 대학의 에자티(Ezzati) 박사의 논문을 보면 우리나라에 대 한 자료가 나옵니다. 2030년에 우리나라가 세계 최장수 국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수명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사람의 평균수명을 최대 90세로 보고 있었는데, 한국의 여성이 90.8로 이 마의 90벽을 깨뜨릴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최장수국가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 연구진이 꼽은 가장 큰 비결은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보건 의료 체계와 높은 교육 수준 그리고 경제 발전에 따른 사망률 감소입니다. 특히, 한국인의 비만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고, 고혈압 등 성인병 관리에 탁월하다는 점도 주목했습니다. 듣기에 반가운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수명이 늘어나서 너도 나도 과거 우리 조상들과는 달리 백세 가까이 살 수 있다니 기대해 볼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래 산다고 정말 좋은 일일까요? 최근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현재 한국인의 평균기대수명은 82.1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 건강수명은 73.2세입니다. 이것은 대체로 한국인들은 73세까지는 건강하게 살다가 이 때부터 9년 동안은 병에 시달리다가 82세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마지막 10년 가까운 세월은 병과 씨름하며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60세에 은퇴한 뒤 한 10년은 할 일 없이 지내다가 또 한 10년은 병상에 누워 고생 고생하다가 죽는다면 80까지 사는 것이 복일까요?
뿐만 아닙니다. 이런 노령화 사회현상이 일반화 되어 가면서 아직도 논의되기를 기피하고 있는 최대의 숨겨진 또 하나의 사회 현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소위 노인 학대의 문제입니다. 한국 보건 사회 연구원이 최근 전국 6대 대 도시의 12개 노인 종합 복지관을 이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 노인의 8,2% 무려 10%에 가까운 노인들이 그들의 자녀 및 가족원으로부터 학대받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장”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현대판 고려장”이 있습니다. 오늘 칼럼의 글처럼 병에 걸리신 부모님을 길거리에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여행 시켜드린다고 모시고 가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노인 학대 사건 사례들이 극히 일부 불효자들의 반인륜적 패륜행위로 행해지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노인 학대가 우리의 삶의 장에서 보편적으로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사회 현상 가운데 어버이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바뀌어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효도입니다. 본문에 보면 진정한 효도는
첫째로, 부모에게 청종하라.(22절)
본문 22절에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말씀하십니다. ‘청종’은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제일 큰 기쁨은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좋지 못한 것을 가르치겠습니까? 자기는 잘못 되었어도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내 생각과 이치에 맞지 않아도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십시오. 정 상황에 맞지 않으면 듣는 척이라도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입니다. 왜 청개구리가 비만 오려고 하면 애달프게 울어 대는지 아십니까? 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거꾸로만 행하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새끼 청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 청개구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새끼의 나쁜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엄마 청개구리는, 자기가 죽으면 물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만사를 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새끼니까 그렇게 유언을 해야 산에 묻어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죽자 그제야 새끼 청개구리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효도하기로 하고, 새끼는 엄마의 유언에 따라 물가에 묻었습니다. 그랬더니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 엄마의 묘가 떠내려가려고 합니다. 뒤늦게 효도한답시고 물가에 엄마를 장사지낸 청개구리는 비만 오려고 하면 지금도 불안한 마음으로 애달프게 운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청개구리 같은 자녀는 없으신지요? 평상시에는 불순종하다가 돌아기시고 난 후에 철들면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이미 부모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분은 할 수 없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부모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부모를 경히 여기지 말라.(22절)
여기 ‘경히 여긴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긴다는 말이지요. 세상이 그렇지요. 누군가 힘 있고 돈 있을 때에는 함부로 못하다가 힘 빠지고 돈 없어지면 업신여깁니다. 부모님도 젊어서 기백이 있었을 때에는 두려워하다가 나이 많아 늙어지고 무기력해지면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더욱이 어쩌다가 유산도 남겨주지 못하고 만에 하나 자식들에게 빚이라도 남겨주는 날은 아주 쉽게 부모님을 가볍게 대할 수 있습니다. 행여 병이라도 들어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고 오랫동안 병수발이라도 들어야 할 상황이면 부모님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박대하는 자식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22절은 ‘네 늙은 어머니를 멸시하지 말라’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된 것도, 병들어 거동이 불편한 것도 다 자식 때문인 줄로 알고 더욱 더 존중히 여기고 효성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모를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해서, 볼품없는 외모나 직업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를 경히 여기는 것입니다.
엡6:2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k bad'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 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분이 계십니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님이 단지 귀찮아서, 혹은 남의 손을 빌어 형식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요양원에 보내는 것은 물론 천륜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부모님께서 노인들을 위해 특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요양원에서 같은 또래의 노인들과 함께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시기에 요양원에 모셔다 드리고 정기적으로 찾아뵙는다면, 그것은 결코 불효가 아닙니다.
도리어 참된 효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도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만도 못하게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님의 재산이 얼마냐, 내 부모님이 얼마나 출세한 분이냐, 얼마나 배운 분이냐에 상관없이, 그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데 대한 긍지가 참된 효도의 필수조건이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존중도 섬김도 오직 이 긍지로부터만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셋째로, 부모를 기쁘고 즐겁게 해드리라.(25절)
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명하십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즐겁고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는 염려와 근심거리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①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 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노년기를 지내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내용을 그의 글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노년은 상실의 삶이다. 건강, 돈, 일, 친구 그리고 꿈을 잃어버리는 삶이다.” 노년은 그동안 소중하게 생각해 온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는 시기입니다. 어찌 보면 자기 삶을 지탱해 준 것들 하나씩 잃어버리기 때문에 인생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해서 적응해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한국 노인 문제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자손들과 함께 사는 노인이 1975년에는 78.2%였답니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 와서는 25%로 급감했습니다. 독거노인은 1975년에는 7%였는데 2000년에 와서는 55%로 급증했습니다. 오늘의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손들과 떨어져 살고 있고, 갈수록 혼자 사는 비율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의 노인들이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외로움입니다. 우리 교회도 자식이 있지만, 혼자 80이 넘으셨는데 단칸방에서 외로움에 눈물짓는 어르신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들의 외로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찾아뵙는 횟수를 늘이시기 바랍니다. 부모님께 전화 드리는 횟수를 늘이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의 외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효도 가운데 으뜸입니다.
② 건강을 챙겨드려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 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노화(aging)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노화를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노화이고 다른 하나는 병적인 노화입니다. 자연적인 노화는 서서히 모든 부분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찾아오는 몸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병적인 노화는 갑작스럽게 몸이 쇠약해지거나 어떤 특정 부분에만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적인 노화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적인 노화는 우리의 노력 여부에 따라서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활기차고 건강한 노후를 맞으려면 이 병적인 노화를 막아야 합니다.
신체가 노화되다보니 자기만의 특별한 질병으로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에게 또 다른 고통은 이런 신체적인 노화와 그에 따른 질병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인들은 이 질병 문제를 스스로 키우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질병을 자각하는 능력이 현격히 떨어집니다.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려있으면서도 다 늙으면서 생기는 일이지 하고 포기합니다. 더욱이 자식들에게 부담을 준다고 알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 건강을 잘 챙겨드리셔야 합니다. 하시는 말씀만 믿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잘 살펴드려야 합니다.
③ 믿음을 지켜드려야 합니다.
효도 중의 효도는 예수 믿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저 천국 갈 준비를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믿음 잘 지키시도록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한동안 따뜻한 책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이 철환 씨의 책 “연탄길”에 보면 "먼 불빛"이라는 제목의 실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현태란 이름을 가진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늘 사고치고 친구들과 패싸움하고 심지어 절도까지--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인 아들, 언제 교도소로 들어갈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자식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마지막 충격 요법으로 아들이 교도소에 가기 전 자신이 먼저 교도소에 가서라도 자식의 교도소 행을 막아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귀금속 가게에 들어가 마음에 없는 도적질을 하는 체 하고 쉽게 붙잡혀 교도소에 간후 면회 온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이 아버지를 용서해라.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아버지가 순간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 아버지가 이 모양이니 넌들 바른 길을 갈수가 있었겠니.--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너는 꿈에라도 이런 곳을 기웃거려서는 안된다. 교도소는 인간을 처참하게 만드는 곳이란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를 면회하고 나오는 길에 어머니는 아들 현태를 붙잡고 통곡으로 절규하면서 폭탄선언을 합니다. “현태야, 할 말이 있다. 네 아버진 도둑질 같은 거 하지 않았어. 정말이다. 이 엄마가 네 아버지를 안다. 네 아버지는 절대 그런 일 하실 분이 아니다. 너 때문에 일부러 그러신 거야. 교도소가 사람 있을 곳 아니라는 걸 너에게 보여 주려고--생떼 같은 네 놈, 거기서 네 젊은 시절 다 보낼까봐서--네가 갈 그 곳에 미리 가셔서 네가 오는걸 막아 보시려고” 현태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 충격, 이 아버지의 희생으로 아들 현태는 이 날부터 마음먹고 다시 태어나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검정고시 치르고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새 인생의 길을 걷습니다. 작가는 이 이야기의 끝을 이런 말로 마무리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되었다. 빛을 거부했던 아들의 어둠속으로 들어와 끝내는 그르치고야 말 그의 인생 앞에 불빛 하나를 밝혀 주었다. 어둔 밤바다 같은 인생에서 표류할 때마다 두고 두고 바라 볼 먼 불빛, 아버지, 아버지--.”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한 분의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모든 인류의 창조자이신 여러분과 저의 영원하신 아버지 말입니다. ---그분 또한 당신의 자녀들이 죄를 범하고 지옥가시는 것을 막아 보시고자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분이 스스로 어둠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빛을 거부하고 살아가던 우리들의 어둠 속으로 들어와 끝내는 그르치고야 말 우리의 인생 앞에 불빛 하나를 밝혀 주신 것입니다. 어둔 밤바다 같은 인생에서 표류할 때마다 두고두고 바라 볼 불빛이 되시고자--말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사랑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작은 불빛들이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부모가 나하나를 위해 어떤 희생과 사랑을 쏟았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가시고기와 논바닥에 사는 우렁이를 아실 것입니다. 부성애가 강한 가시고기와 모성애가 강한 우렁이가 떠오릅니다. 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수놈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 죽은 아비의 사체를 다 뜯어 먹습니다. 그렇게 다 주고 생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 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한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의 함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 또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으며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합니다. 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갑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제가 학창 시절에 국문학 교수로 명성을 날리던 양주동 선생님의 글 가운데 ‘어머니 마음’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길러주신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겠습니까?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겠습니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겠습니까? 어버이의 희생, 어버이의 정성, 어버이의 사랑보다 더 넓고, 높고,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부모님의 이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여기 자녀들이 오늘날과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개혁자 말틴 루터는 "부모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조건 없는 희생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시고 오직 우리의 유익,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참 사랑을 알게 된 우리들에게 이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신 그분이 명하십니다. “네 부모를 효도하라”고. 기도 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