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어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tvN이라는 종편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입니다. 자주 보지는 못하고 그저 가끔 관심 있는 주제를 보곤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제목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을까? 이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제목 한번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몇 번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몸은 어른이 됐는데 정신적으로는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어른으로 사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 것 같았습니다. 준비 없이 어른이 돼서, 시행착오를 범하며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어른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어쩌다 어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른이 될 준비 없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른답지 못한 어른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제목이 우리 가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갖가지 문제로 흔들리고 위기를 겪는 이유가 ‘어쩌다 가정’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부관계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도 ‘어쩌다 남편’과 ‘어쩌다 아내’가 만나서 함께 부부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모자식관계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도 ‘어쩌다 아빠’와 ‘어쩌다 엄마’가 ‘어쩌다 아들’과 ‘어쩌다 딸’과 함께 가족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오늘의 교육현장의 아픔도 ‘어쩌다 선생’으로 살아가는 사명의식의 부재가 만든 아픔이 더 근본적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15일은 37번째 맞는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스승의 날에 스승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꽃조차 받지 않으려 하고 휴교하는 학교도 많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현실을 보여주는 아픔입니다. 교육이 무너졌습니다.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주입식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지배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바뀌려면 무엇보다 교육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육을 바꾼다는 것은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교단에 노동자가 아니라, 스승이 서야 합니다. 학교에 학생이 아니라, 제자가 있어야 합니다. 교육 내용이 지식이기 이전에 사람됨이어야 합니다.
교육이 바로 서고,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교육이 바로 서려면 교육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교육(敎育)의 교(敎)자는 효도 효(孝)자에 칠 복(?)자가 더해진 것입니다. 효를 때려서라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교육은 영어로 ‘에듀케이션’(education)입니다. 이 말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끄집어내다”라는 뜻입니다. 교육이란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교육은 주입이 아닙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머리를 채우는 것을 교육으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학력이 좋으면 교육을 잘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교육에서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교육의 본질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교육정책이 바뀌는데 이는 교육을 바꾸고자 하면 교육 내용, 즉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만 고민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가르치는가”입니다. 배운 것은 잊어도 가르친 분은 기억합니다. 우리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교육 내용이 아니라, 가슴 깊이 만난 스승입니다. 스승에 따라 교육 내용도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누가 교육계를 책임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아 하나님께서 쓰셨던 한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 그래서 지금도 그의 탁월한 리더십과 섬김이 너무 그립게 느껴지는 다윗을 통해 참된 스승의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다윗은 이웃 블레셋 나라로 도망합니다. 블레셋에서도 있을 수 없어 결국 사람들이 살지 않는 광야의 ‘아둘람 굴’로 숨습니다. 한 400여명이 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굴까지 따라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2절에 보면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400명의 사람들이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창출해낸 주동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지 정권 창출의 세력 만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실 다윗 왕조의 나라를 건강한 정치와 경제,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엘리트들이 압살롬에게 합류할 때에도 끝까지 다윗 왕조를 지키고 다시 회복시키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의 400명이 어떻게 정권을 창출하고 다스리고, 위기가 올 때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이들이 다윗과 더불어 무엇을 하였을까요?
첫째, 새 역사의 비전이 잉태되는 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먼저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하나같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소외 된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자신의 상처를 건들게 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성질을 부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정의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가야할 길인지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처만 건들면 모든 판단력을 상실하여 자기 상처를 주인 삼아 살아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착하고 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준비가 된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이 아둘람 굴은 사실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이 굴에 언제 사울이 들이닥칠지, 또 이 실패한자들과 언제까지 있어야할지 막막한 일이 아닙니까? 이때 다윗의 심정을 잘 드러난 시가 시편 57편과 142편에 있습니다. 그때 당시 다윗이 얼마나 절망하고 있었는지, 시편 142:4절에 보면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방 천지를 돌아보아도 자기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외로운 도망자의 아픔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윗을 찾아 나온 사람들 역시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곳 절망과 한숨의 자리에서 다윗은 결코 주저앉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무서운 창끝을 피하여 아둘람 굴속에 숨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사자와 맹수들이 드나들곤 하였습니다. 사울에게 붙잡히는 날도 맹수에게 물리는 날도 인생은 끝장납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기도합니다.
시57:8절입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기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히브리어에서 새벽을 '오르'라고 합니다. 그 뜻은 ‘빛나다’ 입니다. '솨파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 뜻은 ‘반짝반짝 빛나다’ 입니다. 새벽은 햇빛이 빛나고 이슬이 빛나고 총명이 빛나고 영성이 빛나는 시간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왕도 새벽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양은 본래 야맹증이 있어서 어두워지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해가 지기 전에 양들을 모아 우리로 인도해 쉬게 하고 다음날 해가 뜨는 이른 아침 다시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만일 그때 목자가 게을러서 늦잠을 자게 되면 이슬 맞고 촉촉한 꼴을 다른 양떼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기 때문에 굶어 죽게 됩니다. 그래서 목자는 부지런해야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새벽을 깨우지 못하면 양떼가 꼴을 먹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훌륭한 목자였습니다.
지금 비록 그는 어쩔 수 없이 도망자가 되었지만, 그는 이곳에 함께한 절망의 사람들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될 대로 대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오직 인생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기도의 희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는 스승으로서 자기 앞에 온 이 절망의 사람들을 한 시대의 축복의 통로로 세우기 위해 새벽을 깨우는 이 모습을 보십시오. - 새벽은 희망의 첫 시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술을 마시고 춤추었습니다. 새벽이 잠든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주님을 만나는 사람, 새벽 기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은 삶 전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 알렌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새들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새들보다 늦게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요, 영혼이 맑은 사람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새벽 기도가 타락한 영국교회를 새롭게 했습니다. 루터의 새벽 기도가 타락한 천주교회를 개혁하는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지금 다윗을 보세요. 다 잃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도 세상 사람들이 눈길한번 안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 통일 이스라엘의 주역이 되고, 다윗 왕권의 핵심인물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사무엘하에 보면 다윗의 3대 명장과 30명의 용장들의 공적이 실려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아둘람 시절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다윗과 목숨을 건 사랑으로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처음 뭔가 인생이 뒤틀어진 사람들이고, 상처받아 삶이 삐뚤어진 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약하고, 허물 많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보았던 그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둘째, 지금 아둘람굴에서 다윗은 이 비전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곳에서 스승으로서 다윗은 삶의 본을 보였습니다. 함께 살면서 보고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큰 신뢰감을 주었고 나중에 다윗을 평생 따르게 했던 요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환경 앞에도 흔들림 없이 평생 다윗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윗이 단순히 그들을 교육하고 훈련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 가까이에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시57:7절에 보면 그는 오히려 절망가운데 노래합니다.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여기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확고부동하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비록 이 어려운 고통 속에 있지만, 반드시 이 위기를 벗어난다는 그런 소망이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비록 쫓기는 몸이지만 그 믿음이 하나님께 향하여 확고부동하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둘람 굴에 무슨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도 절망너머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고 그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 자들을 통해 이루실 비전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비전의 사람에게는 열정(熱情, passion)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의 불이 꺼지면 우리 인생은 불 꺼진 제철소 고로처럼 멈춰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음속에 열정이 식으면 우리 인생은 파산되고 맙니다.
릭 워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소속한 모임의 온도를 알고 싶으면, 지도자의 입에 온도계를 넣어 보라!" 이 목사님 역시 리더의 비전과 열정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교사의 가슴이 냉랭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리더에게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전이 없으니까 그 비전을 이루려는 열정도 없습니다. 교사의 가슴이 냉냉하면 그 그룹 전체가 냉냉합니다. 열정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열정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비전과 열정과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신의 목이라도 주듯 그들을 사랑하고 함께 세워 나갑니다.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벌였습니다. 체벌 교사의 처벌 요구했는데 학교 당국이 이를 거절하고 주동 학생들을 징계하려고 해서 수업을 거부한 것입니다. 운동장에 모였다던 학생들이 교무실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교사들은 슬슬 피해버립니다. 그런데 유독 나이 지긋한 선생님만 남아서 학생들을 만나 호통을 칩니다. “야! 이놈들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썩 나가지 못해!” 그러자 흥분한 학생 몇이 선생님을 구타합니다. 선생님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구타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손으로 다른 데를 가리지 않고 끝끝내 눈만 가리고 있는 겁니다.
사태가 겨우 수습되자 학생들은 큰일났다 싶어 그 선생님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빕니다. 죽을죄를 지었노라고. 선생님은 웃으면서 잘못을 뉘우쳤으니 괜찮다며 격려합니다. 그러자 안심이 된 학생 들 중에 하나가 질문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왜 눈을 가리 계셨어요?”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거? 나를 때리는 학생을 보고 싶지 않아서 ... 나도 인간인지라 두고두고 나쁜 감정을 품게 될까봐 그랬지.” 그 말씀을 들은 학생들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스승은 단지 자기에게 보내진 영혼들에게 고급지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스승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한 영혼이라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자리는 해산의 수고의 과정이 없이는 그 제자들이 바로 설 수 없기에 야고보도 약3;1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선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는 적당히가 없습니다. 산모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세우는 그 일 역시 해산의 수고가 아니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교사로 모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교사는 미쳐야 되요. 언젠가 또 하나의 열매가 내가 가르친 아이들 가운데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더 열정을 가지고 미쳐야 됩니다. 거기에 있던 400여명의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매년 5월 15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이 즈음에 교회학교 선생님들을 기리면서 큰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권위가 떨어져 오늘날 선생님들이 오히려 스승의 날을 기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서 스승의 날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어버이날과도 같이 중요하게 기념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자녀들의 영적 생명을 위해 친부모 못지않게 수고하며 사랑하는 분들을 기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 모두 이 분들을 기리며 우리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모든 아이들에게 본이 되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모든 선생님들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