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그 동안 이사를 얼마나 해 보셨습니까? 살 때는 몰랐는데 막상 이사를 하다보면 버릴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평소 생활할 때에는 집안 구석구석에 들어가 있는 짐들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또 내가 살아가는 데 별로 필요하지 않는 것들도 쌓아둘 공간만 있으면 쌓아둡니다. 특별히 저와 같이 버리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구석구석 별로 쓰지 않는 것들이 쳐박혀 있는 것을 봅니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버릴 수가 없습니다. ‘2년 이상 한 번도 안 쓴 것은 평생 쓸 일이 없을 것이니 과감하게 버려라.’ 하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 쓸 때가 있을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제 때 제 때 버리지 않으면 쓰레기만 쌓이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버려야 할 때가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쓰는 물건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썩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썩는 것인데도 버리지 못하고 남겨둔다면 그것은 언젠가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주변에 곰팡이를 창궐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썩거나 상하는 것들은 유통기한을 두어 그 기간 안에 소비하도록 합니다. 그걸 잘 알기에 우리는 그렇게 썩거나 상하는 물건을 유통기간이 한참이나 지나도록 방치하진 않습니다. 어떻게든 유통기간 안에 소비하거나 유통기간 안에 소비하지 못한 것은 아깝지만 버립니다.
쓸모가 없거나 못쓰는 것, 그리고 썩거나 상하는 물건만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보다 더 빨리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땅을 밟고 살아가지만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육체에 속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얽매여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오늘부터 금요일 새벽까지 8차례에 나누어서 그동안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쌓여있는 영적 노폐물을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노폐물이 쌓이는 것이 무서운 것은 결정적인 고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정상처럼 보이다가 일단 조짐이 시작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버리는 철저한 삶이 일어날 때, 성도로서 주님의 몸된 지체로서 우리 모두가 뜻 깊은 49주년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세겜 땅에 머물던 야곱의 가정이 감당치 못할 풍파가 몰아쳤습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인 디나가 이방 남자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동생에 이 수치스러운 사실을 안 오빠들은 동생을 강간한 자뿐 아니라 세겜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는 복수극을 벌입니다. 이 일로 인해 가나안에 있는 이방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그런데 이 위기의 자리에서, 이제 다시는 일어 설 것 같지 않는 공포와 절망이 깊게 드리운 바로 그 자리에서 야곱은 자기 가족들을 전부 모아놓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집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놀라운 간증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오랜 세월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의 한 복판에서 그는 자녀들에게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이나 처세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벧엘로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자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환난의 한 복판에서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다시 3절 말씀을 다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은 그 동안 하나님의 도움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자의 명분을 빼앗을 때도 자기의 지혜를 썼고, 아내를 얻을 때도 자기가 14년 간 애써서 얻었습니다. 거부가 되어 고향에 돌아갈 때도 삼촌의 집에서 자기가 노력했고, 자기가 머리를 잘 써서 삼촌의 재산이 자기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형 에서가 죽이러 왔을 때도 에서와 잘 이야기해서, 결국 자기의 지혜로 원수 관계가 풀어지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자기의 노력과 애씀과 재치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에 일어난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났을 때,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배여 들었습니다.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더욱 힘든 것은 자기의 아들들 내면 속에 있는 잔인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잔인하게 행하는 복수극을 보면서 야곱은 깊은 회의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결과란 말인가? 이것이 내가 얻기 위해서 추구하고 또 추구했던 결과란 말인가?’ 마음속에 깊은 생각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녀들을 나무라지만, 자녀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나요? 오히려 대꾸합니다. 일일로 더군다나 그 지역에 있는 다른 족속들이 야곱의 집을 공격해 오리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사실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야곱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의 결과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녀들에게 기댈 수도 없고, 이방 민족으로 부터도 피할 곳이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한번 택한 내 인생 절대로 용도 폐기 처분용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1절에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잊혀졌던 한 가지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형의 칼을 피해서 도망갈 때 제단을 쌓았던 그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거하라”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피할 길을 또 열어주신 것을 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잊혀졌던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28장에 약속하신 그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축복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가지고 도망칠 때, 루스라하는 벧엘에서 쓰러져 잠을 잘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창28:14-15절에 “네 자손이 땅에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여기에 대해 야곱은 창28:20-22절에서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생각해 보세요! 벧엘에서 서원했던 그 일이 벌써 30년이 가까이 지난 거예요. 그동안 서원한 것을 새까맣게 잊은 겁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잘 될 때는 내 잘난 맛에 거드럭거리고 살아갑니다만,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니까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면서 얼마나 자신이 교만하게 살았는가를 안 것입니다. 여기 “벧엘로 올라가라"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올라가라’는 말은 지형적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거룩한 장소로 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야곱에게 이제는 하나님께 가까이 오라는 겁니다.
이제 그는 가족을 모으고 중요한 결단을 합니다.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지금 야곱은 식구들에게 그 말씀을 전달하는데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먼저 우상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영적으로 육적으로 더러운 모든 것을 청산하라는 겁니다. 대청소하고 성결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자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2. 이제 야곱은 인생의 후반전을 위해서 모든 익숙한 것과 소유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4절에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야곱은 여기 보세요. 썩어도 준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날라리, 나이롱 신자라고 해도 그래도 뼈대는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녀들과 아내가 지금 무엇을 들고 나옵니까?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여기 상상치도 못한 우상들이 그들의 손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 아내 라헬은 아버지 집에서 나올 때 아버지가 신주 모시듯 하는 ‘드라빔’을 훔쳐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문제가 터지고 보니까 모양만, 무늬만 예수 믿는 빛깔이지 전혀 예수와 상관이 없는 이방 사람의 문화에 젖어 있는 야곱의 가정을 보게 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것은 야곱 가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 합니까?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걸림돌 역시 우상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더 집착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나의 관심과 정성을 다 뺏어 갑니다. 계속 집중하게 하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하나 이상의 우상을 간직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은 포기 할 수 없다. 이것만은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이 우상은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것만 건드리면,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것, 그 순간 하나님도 온데간데없어지는 바로 그것,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땅에 던져 묻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구제역에 걸린 생축을 미련 없이 땅에 묻는 것처럼 결단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별히 오늘 현대인들에게 ‘물질’은 무서우리만큼 집요하게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보여도 결정적인 순간에 돈의 위력 앞에 직분, 신앙의 연조, 주일 성수도 소용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믿음 좋아 보이던 사람들이 돈에 걸려서 얼마나 많이 넘어 집니까? 아니, 교회 자체가 돈 때문에 흔들리는 실정입니다. 주님보다 더 관심을 갖고 더 집착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지금 야곱이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은 것은 단순히 이방 신상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방 신상과 함께 자신의 가슴 아픈 과거를 함께 묻었습니다. 세겜에서 사랑하는 딸이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밖에 없는 딸입니다. 시집가야 할 딸이 강제로 추행을 당하고 만 사건은 딸 디나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 전부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세겜을 떠나오면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신상과 귀고리를 묻었다는 말은, 그런 가슴 아픈 과거를 함께 묻었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겜을 떠나면서 야곱이 가슴 아픈 과거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린 것처럼, 우리도 지난 삶에 겪었던 슬프고 괴로웠던 일들, 가슴 아팠던 일들을 모두 묻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실패하고 괴로웠던 일들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실수와 실패는 빨리는 잊는 게 유익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자꾸만 되살아난다면 우리는 그 때마다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쓰라린 과거 때문에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또 다시 고통의 쓴잔을 마셔야 합니다. 자! 여러분! 5절을 보세요.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여기 발행이란 단어는 ‘날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상상이 갑니까? 도무지 일어설 것 같지 않던 야곱의 가정이 마치 독수리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힘찬 모습으로 세겜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당시 야곱이 두려워했던 이방 사람들이 오히려 야곱의 가족을 두려워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인생을 오늘까지 지켜주셨고 내일도 동행하시며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분의 은혜 하나로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묻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셨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여러분의 변화를 위해서 여러분의 삶속에 오늘도 뛰어들어 일하시는 이 모습을 보십니까? 시146:5절에 보면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의 축복, 빛나는 인생의 황혼, 이것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야곱을 복된 인생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야곱을 포기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새롭게 일으켜주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 지렁이처럼 땅을 기어 다니며 미물처럼 의미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던 야곱을 돌아보신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야곱을 통해서 나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을 부끄러워하지도 싫어버리지도 않으마 말씀하시며 야곱을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오늘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에 나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구해 자녀로 삼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환난 당해 씨름하고 몸부림칠 때 가만히 계실 리가 있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벧엘로 돌아갔을 때 그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9-10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 마는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야곱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을 정말 의지합니까? 왜 그렇게 변하지 않으시죠? 교회출입이 몇 년인데 왜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성격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왜 그렇게 변하지 않습니까!
야곱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이 드라빔이나 또 다른 우상 신상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나 외삼촌 집을 향해 갈 때 벧엘에서 꿈에 나타나 약속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야곱의 가정을 지키고 인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야곱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가정의 평안과 행복이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버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해야 할 일은 지금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우상을 버리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49주년을 준비하기 위해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기억을 하십니까? 유명한 거장 화가인 미켈란젤로가 씨스틴 채플의 그 천장 벽화 프레스코를 거의 완성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작품은 이제 끝난 것으로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천장 을 향해서 마지막 그 finish 터치를 위한 손질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도왔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 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젠 끝나지 않으셨습니까?" "자네 눈에는 끝난 것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그리고 몇 달을 더 그는 계속해서 이 작품에 매달렸습니다. 마침내 작업은 완전히 마쳐진 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작업 도구를 치우지 않고 계속 천장을 응시 하면서 그 장소를 맴돌았습니다. 다시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제는 정말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켈란젤로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내 눈에는 끝났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다음 주는 교회 창립 49주년을 맞습니다. 교회는 한 주간 새벽 특새를 합니다. 주제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 영적 대청소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새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옛 성품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는 못된 것들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늘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우리가 새사람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버려야 할 것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답게 사십시다. 그것이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