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는 49년 전 1969년 6월 8일에 창립되었습니다. 당시 노른산 시장 끝자락에 점포 두 칸을 터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날이 6월 두 번째 주일이었습니다. 50년 전 당시 한국 사회는 아주 어수선하며 환경이 열악하고 미래가 암담할 때였습니다. 그때 이 교회의 초석이 놓였습니다. 그때 이 교회 초석을 놓으면서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이웃을 섬기는 교회를 표방하고 교회를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만하더라도 나라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기 이전에는 목회란 어려운 일이었고, 그 당시 신학교에 간다는 것은 굉장히 큰 결단이었습니다. 목사님이라고 하면 검정 양복 하나로 사계절을 입고 궁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목회적인 면에서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 땅에 교회를 세워가는 영광스러움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교회 간판만 달아 놓으면 사람들이 몰려왔고, 허름한 개척교회라도 어린아이들이 와글와글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목회는 순수함과 보람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많지 않을 때에는 신앙인들 안에서 민족의 지도자도 나왔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은 심각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예전처럼 자신의 삶을 드려 헌신 할 만큼 희생을 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 인구가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은 교회가 세속화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기독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세상적인 가치를 따라 가버린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보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교회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신뢰한다’는 응답보다 두 배 이상 많이 나왔습니다. 한국사회가 교회에 대해서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인정은 고사하고 신뢰받지 못한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교회답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도답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니까 교회가 존경받기는커녕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야 하는데 오히려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자본주의의 논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가치기준이 되어버렸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고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교회가 얼마나 크냐?’ 하는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복음에 합당한 사역을 하느냐 하는 것에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가 창립 49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교회도 많은 일들을 겪고 여기 서 있습니다. 이제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우리는 어려운 이 시대에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로 생동력이 넘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이 포함 된 창49장은 야곱이 죽기 전 자기 자손들을 불러 모아 그들이 장차 열두 지파 공동체로서 누리게 될 예언적 축복을 유언의 형식으로 들려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한 것이 본문입니다. 요셉은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는 복잡한 가정에 태어나 형제들에 의해 팔려서 외국인 노예로 11년, 그리고 감옥에 죄수로서 2년이 그가 적을 수 있는 이력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대 근동지방에 문명을 자랑하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는 축복받은 사람이며 성공한 사람임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삶에서 총리대신까지 오르는 사건 즉 세상적인 성공보다 더 가치 있게 평가되는 모습은 바로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쓰라린 고통과 기억 그리고 환경에서 벗어나서 평안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첫째 조건이 됩니다. 그에게는 총리대신으로서의 영향력이 있지만 그보다도 그는 더 놀랍고 풍성한 영적인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가 가진 축복은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축복을 넘어서서 영원하며 지속적인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즉, 창세기49:22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축복이 자신의 경계선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담장을 넘어서 이웃에게로 뻗어나가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의 삶을 통해서 성공하고 복된 인생을 사는 원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 진정한 이 땅에서의 축복이 영원한 축복으로 그리고 온전한 축복이 되는 삶의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17세에 애굽에 팔려가서 30세에 애굽 총리대신이 된 요셉의 삶을 살펴 볼 때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 요인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요셉이 누리는 이 축복은 오늘 우리 성도에게도 정말 필요한 모습입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자수성가했다는 소위 성공신화를 써내려갔기 때문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노예의 신분에서 이 한사람의 영향력 때문에 세상이 바뀔 수가 있습니까? 저는 모두가 힘들다, 어렵다 할 때, 우리 교회가 이 세상을 변화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1. 요셉이 받은 축복 : 무성한 가지
그러면 요셉에 받은 그 축복은 과연 어떤 것인가요? 본문 22절을 보면, ‘무성한 가지’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막성 열대 기후의 지역에서 샘물은 문자 그대로 오아시스입니다. 그곳에 심겨진 나무에서 가지(덩굴 같은 것)가 뻗어 무성해진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축복에 관해서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은 아마 없을 겁니다. 23절 이하를 보면,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인지 언급합니다. 마르지 않는 샘은 나무가 자라는데 제일 필요한 필수조건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곳입니다. 요4:13-14절에는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물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물이 되셔서 모든 것을 살리시고 모든 것과 함께 하십니다. 교회의 생명은 이 영원한 생수를 끊임없이 흘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날마다 구원의 역사, 그리고 회복과 사명의 역사가 끊어지질 않습니다. 여기 요셉의 축복은
첫째로, 요셉의 축복은 풍성한 축복입니다. 25절(하)을 보십시오!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여기 ‘하늘의 복’은 비와 햇빛, 공기 등을 가리킵니다. ‘아래의 복’은 물의 근원 샘의 원천을 가리킵니다. 우기가 짧고 건기가 긴 사막 지방에서 이런 복은 정말 귀중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은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가리킵니다. 지금이야 분유가 있어서 괜찮지만 옛날 우리나라도 어머니 젖이 안 나오면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었잖아요. 그래서 젖동냥이란 게 있었습니다. 젖이 안 나오면 옆집 아주머니에게 가서 얻어 먹이고, 미음을 끓여 먹이고 그랬습니다. 젖이 나오는 것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특히 고대 농경사회에서 다산(多産)은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요셉의 축복은 월등한 축복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 더욱 큰 축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26절.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야곱이 지금 축복하는데, 자신이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큰 축복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아들들에 비해 월등한 복을 받을 것임을 증거합니다. 실제로 요셉과 그의 자손들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몫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땅을 분배할 때 두 지파 분량의 기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요셉 지파라고 하지 않고 요셉의 두 아들 이름을 따서 므낫세 반(半) 지파, 그리고 에브라임 반(半) 지파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각각 한 몫씩 차지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자는 다른 형제들보다 두 몫을 얻게 되는 규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자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셋째로, 요셉의 축복은 안정된 축복입니다. 여기서 ‘안정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고난이나 풍파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노라면 누구나 고난과 시련을 겪게 됩니다. 물론 누구나 안정을 희구하죠. 하지만 아무런 고난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가장 안정된 곳이 있기는 하다고 ... 무덤! 그렇죠. 그곳에는 아무런 고난도 없죠. 그러나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요셉과 그 후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할 정도로 큰 힘을 주신다는 겁니다. 23-24절에.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 활 쏘는 자는 대적을 의미합니다.
요셉을 핍박하는 자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형제들은 그를 미워하여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살이,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살이,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고난을 이기고 나니까, 보디발의 집에 끌려갔던 것도 감옥에 들어갔던 것도 나중에 보니까 그가 대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는 지름길이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그의 축복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중단시키지도 못했습니다. 26절(하).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여기서 ‘영원한 산’ 같다는 것은 항상 변함없이 서 있는 산처럼 사라지지 않고 영원무궁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요셉이 받은 안정된 축복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육적으로 풍성한 축복, 조상보다 형제들보다 월등한 축복, 그리고 고난이 와도 이겨내고 영구히 지속되는 안정된 축복! 요셉의 축복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제 49년이 된 우리 교회가 앞으로 받아야 할 복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을 어떻게 누릴 수가 있습니까?
2. 요셉이 축복을 받은 비결 : 하나님의 임재
복은 인간이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24절(하)~25절 보세요! “24 ...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 ” 요셉이 받은 축복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의 인생 가운데 임재하시면서 도와주시며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기록을 잘 살펴보면, 요셉의 생애 기록 가운데 계속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 그는 감옥에서도 노예로 사는 그 비참한 자리에서도 그를 따라다니는 단어가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단어가 ‘형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면, 그 길이 고통의 길이겠습니까? 형통의 길이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깊은 수렁이나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뜨리기 위해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앞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주시면 모든 게 풀리게 됩니다. 여러분, 인생이 꼬이고 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겁니다. 죄는 영적인 절연체 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란 말이 바로 영적인 사망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본문 22절에서 ‘무성한 가지’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나무가 아무리 크고 좋아 보여도 샘물 곁에서 멀리 떨어져 보세요! 어떻게 됩니까? 점차 시들어 죽고 마침내 말라 죽습니다. 결코 무성한 가지가 뻗어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까? 죄 문제를 해결해야합니다. 진정한 회개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모든 게 잘되는 것 같아도 정직하거나 거짓의 삶을 버리지 않는데 잘 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저주일 수 있습니다. 요셉은 늘 겸손과 희생과 섬김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 우리 안에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도 잘 견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나시나요? 창46장에 보면 자기를 팔아먹은 형들이 자기 앞에 나타납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자기들이 팔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꿈에도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 앞에 선 자가 바로 요셉입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요셉이 옹졸한 인간이라면 그들을 한칼에 벨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보십시오. 창46:7-8절을 보면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형제들을 진심으로 용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판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시고,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명이 있음을 자각합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형제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오히려 용서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은혜 앞에 죄사함을 받은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용서와 사랑과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3. 요셉이 축복을 받은 목적 : 나눔의 사명
하나님은 더 높은 차원의 축복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나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복 주실 때 분명한 뜻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을 축복하신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 목적은 ‘나눔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겁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잘 보십시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가지가 얼마나 무성한지 담을 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 축복이 차고 넘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겁니다. 요셉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축복을 받는데, 그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방에 펴져나갑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복이 임합니다. 보디발의 집에 복이 임하고, 감옥에 복이 임하고, 총리가 된 후에는 그를 팔았던 형들을 포함해서 온 가족을 애굽으로 이민 초청하고, 7년 기근을 잘 대비해서 여러 나라와 애굽을 구제하고, 그가 있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평생 자기 집 담을 넘지 못하는 인생을 살다가 끝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한 몸둥아리 붙들고 씨름하다가 인생 다 보내고, 조금 나아보았자 자기 자식들 붙들고 그들 뒷바라지 하다가 인생 다 보내고 담을 넘지 못하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언제 담을 넘어 보시겠습니까? 내 가정의 담을 넘고 우리 민족의 담을 넘고, 우리 교회의 담을 넘고, 한국 교회의 담을 넘어 열방을 끌어안은 인생, 이것이 은혜 받은 인생들이 살아야 할 삶의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성장되었으면 지역 사회와 민족 앞에 나누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한 교회,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49주년을 맞이하는 우리교회의 비전입니다. 이제 사업장이나 목장,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선교에 대해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선교하면 복 받습니다. 주중 사역인 실로암대학과 실버대학 - 이 나눔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250,00명의 주민과 37만의 광진 구민을 끌어안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더 나아가 대한민국과 세계에 우리가 받은 은혜를 아낌없이 나누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교회 오면 생수인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여기서 쉼을 얻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 받고 당당하게 세상에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