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끝없이 펼쳐진 평야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낮은 산들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정상에 올라가서 한없이 이어지는 산들을 보고 있으면 숨이 멎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백두산에 올라가서 끝없이 펼쳐진 산들을 보고 있자니 시인의 표현대로 정말 숨이 멎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랜드 캐년에 갔을 때도 그와 같은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습니다.
우리가 다루고자하는 이 에베소를 신학자들은 이런 산꼭대기, 정상에 비유합니다. 모든 성경이 귀하지만 에베소서를 깊이 이해하면 마치 산 정상에서 아래를 바라볼 때 숨이 멎을 것 같은 감동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장엄함과 천국의 진리를 발견하고 깊은 감동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쓴 옥중서신중 하나입니다. 로마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증거하는 에베소서를 쓴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에베소서에는 “은혜”란 단어가 많습니다. 모두 12번이 나옵니다. 여러분 같으면 감옥에서 “은혜”를 말하겠습니까? 은혜뿐 아니라 “영광”이란 단어도 많습니다. 모두 8번 나옵니다. “충만하다”는 단어가 7번, “풍성하다”는 단어 5번입니다. 지금 감옥에서 생존하기도 힘이 드는데 “충만하다”, “풍성하다”는 말이 나옵니까? 내일 모래 죽을 사람이 무엇이 그리 행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다”를 반복해서 말하겠습니까?
에베소서가 말하는 넘치는 은혜가 무엇인지. 1-2장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넘치는 은혜입니다. 핵심은 ‘구원’입니다. 3-4장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넘치는 은혜입니다. 핵심은 ‘성장’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자라가는 ‘성장과 훈련’의 현장입니다, 5-6장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경험하는 넘치는 은혜입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사람과 관계 안에서, 심지어 마귀와 싸우는 영적 현장에서 어떻게 넘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까를 다룹니다. 한마디로 승리입니다.
이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그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왔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베소서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1-2절 말씀은 서론에 해당하는 이주 짧은 구절입니다. 보통 서론은 인사말이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절 안에 에베소서의 핵심 내용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이 짧은 서론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말고, 간증하러 다니는 집사님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말고, 내 옆에 있는 목자나 어떤 사역자에게 임한 은혜 말고, 내게 임한 은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서 당신은 어떤 변화를 겪었습니까? 혹시 오늘도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는 동떨어진 형식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만일 그렇다면, 이 에베소서 말씀에 당신의 온 마음을 쏟아보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읽으십시오. 씹으십시오. 되새김질 하십시오. 그리고 소화시키십시오. “하나님, 에베소서를 공부하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제게 물결처럼 다가오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기도제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에 혁명을 일으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잘 설명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혁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서론에 해당하는 이 두 절 말씀 에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저자, 수신자, 수신 목적입니다. 저자와 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여기 이 아침 묻습니다. 바울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성경을 기록한 사도 중의 사도이자 위대한 기적을 일으켰으며, 세계 복음화에 기여한, 하나님이 높이 들어 쓰신 위대한 하나님의 종 바울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바울에 대해서 이것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그의 다른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곳이 행7장에 스데반의 순교현장입니다. 7장에 보면 스데반이 거기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얼마나 책망하는지 모릅니다. “이 마음이 완악한 자들아, 어찌하여 너희가 성령의 음성을 거스르느냐?” 그래서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그 설교를 듣고, 이를 갈며 분노합니다. 분노한 그들은 스데반을 차마 성전 안에서는 죽이지 못하고 밖으로 끌어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치기 전에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행7:5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람을 죽이는 데는 두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증인들이 돌로 치기 전에 겉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갖다 두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사울이 기획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렇게 스데반을 죽이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고 나서,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죽여야 할 사람을 당연히 죽였다고 여기고,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을 잡아서 죽이고 돌로 칩니다.
사울이 초대교회에게 고통을 안겨 준 것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행8:2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리고 9장에서도 1-2절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 여러분, 사람을 죽인 사람들을 보면 눈에 살기가 돕니다. 이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씨를 말리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요즘말로 하면 한 순간에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성장에 찬물을 끼얹고, 성도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 사울이 어떻게 변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화의 역사를 경험을 합니다. 핍박의 장본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그의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핍박자가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의 증인 자로 바뀝니다.
이는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없는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행전의 두 가지 큰 사건이 있다면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요 다른 하나는 사울이 예수님 만나 회심한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 땅을 복음으로 흔들어 놓은 사건이라면 사울의 회심은 이방세계, 저 로마 세계를 복음으로 변화시킨 놀라운 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금 바울, 이 한 사람의 회심을 통해 핍박받은 교회는 다시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행9:31절에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의 가치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울은 어떻게 바울이 되었나요? 바울이 전하려는 이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사울이 바울된 것이 그의 공로 때문이었나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도로 삼으셨다는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바울의 간증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였다는 고백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에게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 나타난 이 혁명이 그에게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변화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아마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무언가 변화를 위한 갈망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져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정말 위대한 인생을 살 것인가?' 변화 받고 싶고 변화되고 싶지만 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오늘 사도 바울처럼, 사울이 바울이 됨으로 이 세계사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변화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여러분을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여, 내 삶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예수를 핍박하는 자였고, 예수 믿는 자들을 감옥에 기두는 자였으며, 의인 스데반을 죽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자였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내 삶에 이러한 혁명이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내 인생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나를 변화시켰다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나 사울을 바울 되게 하셨다면, 그 하나님의 은혜가 능히 여러분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사울은 나름대로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신념이 굉장한 사람이었어요.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613가지의 모든 율법을 다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그를 의롭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율법을 지킨 결과 의인을 죽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사울이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바울로 변화된 것이 언제입니까? 율법으로 살았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밀려왔을 때였습니다.
이 은혜를 갈망하십시오. 에베소서를 통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너무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제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 줄 일고, 저 잘난 줄 알고 함부로 가족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 병균이 들어와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저는 아닌 체하고 다녔지만, 제 미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부어 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삶에 혁명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기적을 일으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수신자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그런데 수신자에 대한 표현은 너무 간단합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이 말씀이 간단한 것 같지만, 에베소라는 도시가 어떤 곳인가를 알면 이 말씀을 그냥 읽고 지나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에베소라는 도시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유리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아주 큰 신전이 있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시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매년 3-4월이 되면 각국에 흩어졌던 수많은 사람이 에베소에 모여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깁니다. 그런데 축제 기간에는 어떤 법에도 저촉되지 않고 남녀가 맘에 드는 사람과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즉, 혼음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쾌락을 즐기려는 숱한 사람들이 에베소에 모여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고 난 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혼음을 했습니다. 아내를 바꾸고 남편을 바꿉니다.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엄청난 타락의 도시였습니다. 음행이 들끓고, 우상숭배가 가득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신앙생활하기 이주 힘든 도시였는데, 에베소 교인들은 어땠습니까? 성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말합니다. 성도라는 말은 ‘부름을 받다’, ‘분리된 삶을 살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신앙을 지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오늘날 왜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거룩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너무 많이 세상을 닮아버렸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교회의 가치처럼 여겨지고 있고, 교회는 그것을 따라 갑니다. 세상적인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여 성도의 수가 많아지고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면 박수를 쳐줍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박수를 쳐 주지 않습니다. 때로는 신앙인들조차도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리석게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유별난 신앙을 가졌다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교회도 그대로 따라 합니다.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가 가야할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와 성도들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마태복음 7:13-14)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달려가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공과 출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거룩해지기 위해서 믿음을 경주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에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2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처럼 평강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비해 삶의 여건은 나아졌지만 우리는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질병 때문에 죽는 경우보다 스트레스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음식은 좋아지고 생활은 편해졌는데, 사람들은 자꾸 피폐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마음에 평안이 없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축복을 빼앗긴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주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여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은 바울의 모든 편지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바울이 쓴 13권의 서신에 이 말은 항상 서두에 등장합니다. 또한 순서도 바뀌지 않습니다. 항상 은혜가 먼저 나오고 평강이 뒤에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가 와야 평강이 오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 믿음의 뿌리입니다. 평강은 우리 믿음의 열매입니다. 은혜는 우리 믿음의 시작입니다. 평강은 결과입니다. 은혜는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평강은 땅에서 누려 집니다. 은혜는 받는 축복입니다. 평강은 누리는 축복입니다. 왜 평강이 없습니까?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오면 어떻게 됩니까? 평강이 임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평강을 주기 위해 에베소서를 썼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방향을 바꾸고 싶습니까? 삶에 혁명이 일어나기를 원합니까?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까? 이 메마른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소낙비같이 쏟아져 하나님의 축복을 자손 대대로 나누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합니까? 바울은 그 비결을 우리에게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나와 에베소 성도들의 체험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 얻은 계시의 모든 진리로 여러분을 권면하노니,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은혜 앞에 서십시오. 그분은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끝까지 여러분을 온전한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 부르심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사울이 바울이 되어 역사를 바꾼 사도 바울처럼 오늘 여러분의 가정을 바꾸고,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고, 여러분이 속한 이 사회를 한번 바꾸어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날마다 세상에 패배하며, 죄에 지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까? 우리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다. 오늘 당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이 광진구와 서울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를 다시 쓰실 것입니다. 이 운혜가 여러분위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