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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 마리아(눅 1:46-56) 2009. 12. 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09-12-08 | 조회: 2050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맞는 12월에 들어섰습니다. 벌써 12월이 되기가 무섭게 세상은 성탄 분위기를 내느라 야단입니다. 번쩍거리는 트리, 요란한 캐럴... 물론 장사 속으로 그런 거지만 교회보다 세상이 더 빨리 더 열심히 성탄절 준비를 하나? 그런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이 주도권을 쥐고서 성탄절 문화를 점점 세속화시키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예수님이건만 그분은 온데간데없고 흥청거리고 먹고 마시며 노는 게 주류를 이루는 듯합니다. 그래서 마치 성탄절은 1년 중에 ‘제일 잘 노는 날’로 낙인찍힌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태와 달리 성탄절은 가장 경건하게 보내야 할 신앙 부흥의 계절입니다. 또한 가장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되는 전도의 계절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세상의 들뜬 분위기에 편승해서 엄벙덤벙 지나갈 게 아니라, 세속 문화에 경건한 신앙으로 맞불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성탄절의 기쁨을 맛보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먼저 성탄과 관련된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사9:, 11:, 마1:~2:, 눅1:~2:, 요1:를 비롯해서 복음서를 많이 읽을 것) 그러면 성탄의 참 의미를 발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는 특별히 불신 이웃에게 성탄의 의미를 적어 전도 성탄카드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성탄절을 가장 성경적으로 보내는 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부터 3주에 걸쳐 성탄 메세지를 전해 드립니다. 특별히 성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성탄의 참 의미를 되새겨 보시고 구체적인 신앙의 결단과 실천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은 교회사회에서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워지는 아주 유명한 대목입니다. ‘The Magnificat’ 라고 불리워지는 마리아의 찬가, 마리아의 송가. 이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를 잉태하고 불렀든 기쁨의 노래의 찬양입니다. 이 찬양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 하나님이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가를 아~노래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녀가 경험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50절 말씀입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또 54절 한번 보겠습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여기서 두 번씩 반복된 단어가 긍휼이라는 단어죠? 자, 마리아의 잉태 경험에 있어서 그가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경험했든 하나님, 그것은 긍휼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저와 여러분에게 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긍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긍휼이란 비참함의 상태 속에 그 상태를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Mercy,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이 긍휼하고 비슷한 단어가 하나가 있어요. 이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아주 비슷한 내용이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은혜보다는 사실 긍휼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강도가 진한 단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 죄 때문에 자격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을 나타낼 때 그것을 은혜라고 Grace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긍휼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빚어진 그 비참함을 향해서 비참한 상태나 비참한 인생을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성경은 긍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사건이 바로 성탄입니다. 사도요한은 요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좀더 하나님을 잘 알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좇아오신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오늘 그 주님은 이 높고 높은 곳에서 이 낮고 천한 곳에 골짜기를 넘어서 올 수 없는 환경을 넘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오셨듯이, 넘어져 있고, 지쳐있고,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서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허무와 저주 가운데 죽어갈 영원히 멸망할 우리 자신들을 주님은 자신의 아들 독생자를 죽여서까지라도 구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따라서 아들까지 죽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하지만, 아들을 보내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아들이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인데, 그것도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을 것인데, 죄의 저주를 뒤집어 쓰고 죽을 것인데, 그 아들을 보내는 하나님의 마음은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숫자는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여기 소개 되는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48절에 보시면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비천한 계집종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천하다는 단어는 아주 낮은 신분, 낮은 상태를 나타내어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 단어 속에 열등감이 배어있는 그런 단어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이스라엘에 많은 도시마을 가운데서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었던 곳이 물론 예루살렘이죠. 그러나 나사렛은 상대적으로 아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든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나사렛 사람, 이 말도 예수님을 혐오하는 단어 중에 하나였습니다, 본래는. 그런데 이런 시골 나사렛에서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든 어린소녀, ‘주님 나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이 단어 속에서 그동안 살아왔든 인생의 자리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던 이 소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우리가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자기를 택하셔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이 엄청난 사건 앞에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양하는 것입니다.

1. 마리아의 찬양은 지혜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51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여기 마음의 생각이라는 단어가 나오죠? 사람들이 마음의 생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고 소유하려는 그 끈질긴 행복의 노력 구원의 노력을 하나님은 무의로 돌리셨다라’고 오늘 마리아는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18절에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파워라고 바울사도는 증언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든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 당시 아테네와 함께 아직도 지식의 현란한 프라이드를 자랑하고 있든 지성의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 지성의 도시 고린도에 살면서 지식 최고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고를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보시면 지식은 교만하게 할 뿐이라고, 하나님을 떠난 지식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 되지 못하는 지식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지 못하는 지식은 인생을 교만하게 할뿐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이렇게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사람들을 오히려 흩어놓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지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당이 있습니다. 예수탄생교회(The Church of Nativity)입니다. 그 교회당도 그 앞의 광장도 제법 큼직합니다. 그런데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의외로 작습니다. 높이가 1미터 20센티, 폭이 80 센티에 불과합니다. 「겸손의 문」이라 불립니다. 원래는 문에 컸는데, 말을 타고 왕이나 귀족들이 쑥쑥 들어오고, 도둑들이 쉽게 들어와서 작게 줄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인간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도 교회당 안에 들어오려면 꼼짝 없이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합니다. 제가 성지순례 갔을 때 흥미로운 것을 보았습니다. 순례객 중에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누군가 그 문 입구에 한글로 쪽지를 붙여놓았습니다. “머리 조심!” 여러분! 마리아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식이 행복의 길이라면 지식이 구원의 길이라면 저 나사렛 땅이나 베들레헴 땅이 아닌 예루살렘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한 소위 랍비들이, 허다한 랍비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산해드린 이라는 종교회의 안에는 당당하게 공부를 한 수많은 학자들이 존재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저 희랍의 아테네나 고린도에서 공부하고 있었든 아니 로마에서 키케로(Cicero) 를 위시한 수많은 지성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위한 구세주를 보내고자 하실 때 이런 모든 지식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은 하나님의 신비, 나사렛 땅에 살고있었든 무명의 한 여인, 소녀 마리아를 선택한 하나님의 신비를 바라보십시요. 이것은 지혜의 추구가 지식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지식이 대답이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를 통해서 아기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건은 비로소 복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권력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52절의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이 비천한 자라고 했을 때 마리아는 자기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48절에 보시면 마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하나님 어째서 나를 선택하셨나요?

만약 권력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권력자가 이 세상에 소망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 올 것이 아니라 가이사의 황실을 통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가이사는, 시저는 강력한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의 황실을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사렛 땅에 살고 있었든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든 한 어린 소녀, 이 소녀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시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놀라운 작정의 신비, 이 선택의 신비를 어떻게 우리는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이런 배경에서 다시 말씀을 읽어 보십시요. 권세 있는 자들을 오히려 그 위에서 내려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를 쓰시는 하나님, 나같이 비천한 소녀를 쓰셔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는 놀라우신 주님을 지금 마리아는 찬양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권력이 크다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죠.제가 이따금씩 교인들에게 이런 부탁을 받습니다. 종종 자주 받는 부탁중의 하나가 이런 것 입니다. ‘목사님 이분 아무개 있죠? 목사님 좀 관심을 좀 가져주세요. 이 분이 한번 제대로 믿으면 아주 큰일을 할 사람이니까 목사님 잘 봐 주세요’ 어떤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은 셋 중에 하나에요. 어떤 사람? 첫째로 좀 많이 배운 사람이라든지, 이 사람이 가진 지식의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 또 하나는 어떤 생각입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권력이 좀 있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있는 사람, 그럼 이 권력을 가지고 복음 전파에 대단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요? 돈이 좀 있는 분, 그래서 그것 가지고 굉장히 커다란 일을 할 것이라고, 그래서 목사님 좀 관심을 가져주세요. 엑스트라(extra)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래서 저가 철이 없을 때 관심을 그런 분들에게 많이 가졌든 적이 있습니다. 하하~ 그리고 시간을 써 보았어요. 그런데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아직도 큰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또한 우리는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구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의해야 합니다. 53절 다같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물질의 추구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도 없고 구원 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의 영웅은 부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분, 돈보다도 강력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돈을 추구하느냐, 돈을 추구하고 돈을 따라 다니다가 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요. 성경은 물질 그 자체를 악으로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악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악이라고 말할 뿐이지 돈 그 자체가 악이라고 말하지는 않아요. 언제 돈이 악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돈은 우상입니다. 돈이 나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물리치라고,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탐심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그 마음속에 계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성탄은 우리에게 분명한 희망의 메시지만, 올 한 해 금융위기로 시작한 우리 사회는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이 경색된 모습으로 골이 깊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코 상대를 인정치 않으려는 이 현실 앞에 이곳저곳에 경색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 언론에 많이 등장하거나 회자된 단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신용경색'이라는 단어입니다. 경색이라는 말은 혈관이 혈전 따위로 막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금 전 세계가 신용이라는 혈관이 꽉 막혀 신음하고 있습니다. 경색이 무서운 것은 결정적인 고통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정상처럼 보이다가 일단 조짐이 시작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막히고 닫힌 사회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곳곳에 경색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사회의 곳곳에 막혀 있는 혈전을 녹이고 뚫는 것은 베풂에 있습니다. 주는 삶, 베푸는 삶은 우리 사회가 동맥경화증에 걸리지 아니하고 건강한 피의 순환을 촉진하는 최고의 명약이 아닙니까? 탐욕의 기름기로 범벅이 된 탁하고 끈적한 피는 사회의 혈관을 구석구석까지 돌 수 없습니다.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는 삶에는 기적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를 베풀면 예수님은 거기에 손을 얹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열배 백배의 기하급수적 은혜로 나누시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웠던 오병이어의 사건은 베푸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년 역시 허기졌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숨기고 움켜쥐려는 당연한 욕구와 유혹을 억누르고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을 때, 자신은 물론이요 뱃세다 들녘이 얼마나 기쁨이 넘쳤습니까? 사람들의 배고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조그마한 도시락을 드렸던 이 무명의 소년은 일평생의 삶의 뼈대가 되었을 베풂의 기적을 누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한파 때문에 이 추위와 함께 떨고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white X-mas니 money X-mas니 해서 좋아하지만 추위에 얼어붙은 날씨에 노숙하는 이웃들에게, 전례 없이 도움의 손길이 끊겨있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가족들이 맞이하는 성탄은 매우 상대적인 허탈감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그때는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딤후 3장에 보면 말세엔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때의 증상 가운데 하나가 ?무정하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남이야 어렵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 삶의 저변에 깔려 있어요. 남이야 죽든 산든 나만 안전하면 되고, 남이야 ?든 말든 나만 따뜻하고 행복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내 위주로만 삽니다. 이런 마음에 어떻게 예수님이 오실 수 있습니까?

우리 동성 교회는 성탄을 맞이할 때마다 사랑의 쌀 나눔을 통해 우리 주변의 이웃에 사랑을 주었습니다. 용인에 있는 시각 장애우들을 위해, 그리고, 군부대, 또 태안반도가 기름으로 덮혔을 때, 고통 하는 어민들을 위해서 작은 사랑의 헌금과 드렸고 또 현장에 가서 기름에 쩔은 바위 하나하나를 붙잡고 하루 종일 씨름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쪽방에 가서 노숙자들과 함께 식사도하고 그들에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쌀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지금 나라가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 사실이지만, 그 여파가 우리의 일상의 삶에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그 작은 일 마져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도 우리 주변에 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 함께 실천하여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이번 성탄절에도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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