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델센의 미운오리새끼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오리새끼들 틈에 백조새끼 한 마리가 함께 부화를 해서 오래새끼들 틈에 끼어 살게 되었습니다. 외모가 볼품이 없었습니다. 키는 껑충하고 털을 까칠하여 언제나 오래새끼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였습니다. 어느 날 개울가에 백조 떼들이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그 모습은 예술이었습니다. 그 자태하며 늘씬한 다리와 외모가 탁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백조 새끼는 감탄하고 자기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초라함에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이 백조 새끼는 자신도 얼마 있으면 그렇게 하늘을 나를 수 있는 그 백조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동화가 주는 메시지는 자신의 값을 모르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값을 알고 모른다는 것에는 이 같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인가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만족감을 느낄 때가 또 언제인가 하면 그것은 자신의 값을 알고 살아갈 때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깊은 의미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니까 삶에 맛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의미도 확신도 없이 인생을 비관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값을 알게 해 주려는 말씀입니다.
3-14절까지는 우리말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에는 3절부터 14절까지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202단어의 긴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 당시 존재했던 헬라어로 된 모든 책을 다 뒤진다고 해도 단어가 202개나 되면서, 문장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이곳 한 군데 뿐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긴 문장을 썼을까요? 말이 202개지, 당신이 타이핑을 한다고 하면 A4 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 분량을 한 개의 문장으로, 중간에 쉼표도 없이 계속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 긴 문장을 쓸 때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참으로 암담한 환경 기운데 있었지만 그는 이 긴 문장을 “찬송하리로다”(3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한 신학자는 이 문장을 산에서 웅장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폭포수에 비유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연상해 보십시오. 엄청난 물들이 쏟아져 내려와 그 웅장한 폭포를 만드는 나이아기라 폭포 말입니다. “찬송하리로다!,” 바울은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찬송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쓰는 바울은 몸은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오직 찬송과 감사로 기득 찼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폭포수처럼 외치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러고는 남을 향한 원망의 마음을 다 지워버리고 14절까지 단숨에 써 내려갑니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감격에 찬 모습으로 찬양하라고 외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삼위 하나님이 총 동원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나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에 "찬송하리로다"라고 시작되는데, 성부 하나님에게 드리는 찬송이 3-6절의 말씀이요, 성자 예수님에게 대한 찬송이 7-12절까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13-14절의 말씀에 성령께 대한 찬송입니다. 3절에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여 6절에 마지막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다시 12절 마지막에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 마지막에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부 하나님의 예정하시는 은혜를 찬송하고, 이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을 찬송하며, 우리 구원에 대한 성령님의 보증과 인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1.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3-6)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까? 3절에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위하여 신령한 복을 준비하셨는데,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구속은 선택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늘에 속한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구속을 이해해야 하는데, 먼저 우리를 만세 전부터,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생각하신 것은 창세 전부터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 선택의 교리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믿은 것 같은데, 사실은 믿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습니다.
2) 우리의 택하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서 하나님 앞에 스스로 온전하게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죽는 것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이 사실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살아온 것을 다 직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그 사명과 의무를 잘 감당하고 서 있는지 아니면 허송세월하고 방탕하다가 서 있는지 그것은 자기 자신이 먼저 잘 알 것입니다.
4절입니다. 엡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다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여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에서 “흠과 티가 없다”는 구약 시대 성전 용어입니다. 옛날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양이나 소를 잡아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은 반드시 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리 하나가 부러졌거나 눈 하나가 짝짝인 짐승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께 온전한 것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흠과 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흠과 티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흠과 티가 없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흠과 티가 없어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흠과 티가 없으라고 선택한 것입니다. 교회는 흠과 티가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흠과 티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흠과 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흠이 아닙니다. 내가 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흠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나는 죄가 많고 부족해서 교회를 못나갑니다.” 그러나 죄가 없기 때문에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기 때문에 교회 나옵니다. 흠과 티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못 나가는 것이 아니라 흠과 티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흠과 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이런 은혜입니다.
2.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예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7-12)
그러면 흠과 티가 많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은 무엇입니까? 이를 위해 바통을 이어 받은 분이 성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엡1:7,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한 마디로 말하면 구속 곧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으나 아직도 흠과 티가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참 어렵습니다. 보통 “구속한다”하면 “감옥 보낸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법률용어가 아니라 상업용어입니다. “물건을 샀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대가를 주고 물건을 구입했다는 의미입니다. 물건을 샀다고 할 때 성경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노예시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사회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일할 사람이 항상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인력시장을 두고 사람을 사거나 팔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값으로 주고 우리를 샀습니까? 구약에 보면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은20에 팔립니다. 신약에 보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데 값이 은 30입니다. 노예 한 사람 가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얼마에 사셨을까요? 은 20입니까? 은 30입니까?
7절 중간을 보십시오. 엡1:7, “그의 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우리를 사신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의 “피”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사실 때 몇 푼 돈 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그의 피로 샀습니다. 피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피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나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사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 엄청난 값을 십자가의 보혈로 치르신 것입니다. 화해의 제물이 되어주셨으며 속죄의 제사를 지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죄의 노예가 되고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셨습니다. 내가 훌륭하게 생활하여 자녀가 아니라, 신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것인데, 다 지불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 값을 지불할 수도 없지만, 공연히 다 지불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값을 지불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는 성령을 찬송해야 합니다. (13-14)
엡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그 안에서” 는 누구 안에서 입니까? 성령의 사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안이요 예수님 안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하신 창조와 선택의 일, 예수님이 하신 구원과 죄사함의 일을 계승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안에서 확인하고 지속하게 합니다. 중요한 단어는 “인치시고 보증하사”입니다. “인”은 도장입니다.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보증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새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 성자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 마음 속 심비에 도장을 찍습니다. 확인하고 확신하고 확증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보증합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이 악하여 부모형제간에도 보증하려고 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보증을 잘못서서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설령 보증을 선다고 해도 자신의 이익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아침 묻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이 보증을 서 주기에 조금도 문제가 없는 사람입니까? 보증을 선다면 분명 가치가 있는 것이 투자하는 게 상식이 아닙니까? 미스코리아선발대회에서 한 사람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십년 전에 일억 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억 오천만원정도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옷부터 시작해서 화장품, 마사지까지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어떤 사람을 선발합니까? 원판이 괜찮은 사람을 뽑습니다. 원판이 별로인 사람은 투자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공로와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롬 3:10-12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지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맞습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치우쳐 악을 행하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까? 우리가 거룩하거나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의로운 생활을 해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요, 하나님의 싫어하신바 된 부족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보증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나를 택했다면 성령께서 인을 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 앞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내 인생을 연주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의 아름다운 인생을 연주하시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내 삶을 연주하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에 엉뚱한 음을 들려드리는 인생이 아니라 조화와 아름다운 소리로 하나님께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아침!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에베소서 1장을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유도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만 닿으면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천국의 거문고와 같습니다. 성도는 이미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살맛나지 않습니까? 이제 구원의 감격을 담아 찬양의 삶이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날씨가 조금만 흐려도 우울해져서 상대방에게 우울한 말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눈을 뜨면 “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송을 드립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환경이 어려워도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이러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환경을 초월해서 샘솟듯 하는 기쁨! 폭포수처럼 감동이 터져 나와 하나님 앞에서 감격하며, 가문이 대대로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이 구원의 은혜를 아는 자는 바울처럼 감옥에서도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내 인생을 한낮 보잘 것 없는 하루살이처럼 살게 하지 않고 정말 완벽하게 만드시고 또 삶의 현장에서 어떤 처지, 심지어는 고난의 파도가 밀려와도 그것 때문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삶이 퍽퍽해도 감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해의 절반을 보내는 주일을 맞습니다. 특별히 다음 주는 맥추 감사주일로 하나님께 감사의 시간을 갖습니다.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가 여럿 있지만, 유독 감사절만 2번 있습니다. 상반기에 맥추감사주일, 그리고 하반기에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감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반면 사람들이 감사를 쉬이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은 영혼에 병이 든 증거입니다. 영혼에 병이 들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결국 모든 게 막혀버립니다. 이런 연유로 하나님께서 1년에 2번씩 영혼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라고 감사절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감사절은 신앙의 건강 정기검진일인 셈입니다. 이제 한 주간 지난 반년을 돌아보며 감사 일기를 써 봅시다.
듀크 대학의 제프리 웨인 라이트 박사는 "신학의 최종 목저, 또는 지향점은 영광의 찬송이다"고 했습니다. 어찌 신학뿐이겠습니까? 목회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인생도 그렇습니다. 지금 공부하시는 학생도 사업하시고 직장 생활하는 것도 우리들이 교회를 나오고 신앙 생활하는 것도 다 영광의 찬송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찬송에 대한 목표가 빠지고 나면 무의미해지고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우리 주님의 영광, 성령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였지만 이에 주님을 영접하고 나니 전혀 새로운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쓰레기와 같은 존재였지만, 하나님은 새롭게 만드시고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모든 사업이 영광의 찬송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