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뜻 깊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가 여럿 있지만, 유독 감사절만 2번 있습니다. 상반기에 맥추감사주일, 그리고 하반기에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감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반면 사람들이 감사를 쉬이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은 영혼에 병이 든 증거입니다. 영혼에 병이 들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결국 모든 게 막혀버립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신앙의 감기?입니다. 감기가 사소한 병이지만 방치하면 만병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도 영적으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감기도 조심해야 되겠지만, 영혼의 감기도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이런 연유로 하나님께서 1년에 2번씩 영혼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라고 감사절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감사절은 신앙의 건강 정기검진일인 셈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 각자의 신앙을 점검해 봄으로 신앙의 건강을 회복하고 감사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맥추 감사주일을 지키지만, 사실 맥추절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 태반일 것입니다. 맥추(麥秋)란 단어는 ‘보리 맥(麥)’, ‘결실할 추(秋)’로서 보리를 수확한 것을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맥추절은 애굽에서 나온 지 50일째 되는 날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양에 와서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므로 신약교회가 태동을 합니다. 맥추절은 구약적인 명칭이고 오순절은 신약적인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이 맥추절은 영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단지 첫 열매를 거둔 것뿐만이 아니라 신약교회가 탄생하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매년 7월 첫 주일에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깊이 감사함으로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큰 축복이 임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7월 첫주를 맞이해서 우리 모두 지난 반년, 6개월을 돌아보며 감사할 제목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봅시다. 오늘 여러분들의 집 냉장고에 먹을 음식이 있습니까? 입을 옷이 있습니까?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지붕과 잠을 청할 수 있는 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오늘날 지구상에 사는 전체 인구의 75%의 사람들보다 더 부자입니다. 여러분, 은행에 저축해 두신 돈이 있습니까? 지갑에 현금이 들어 있습니까? 아니면 거스름 잔돈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 안에 들어가는 분들입니다.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실 때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으셨습니까? 이번 주간에도 어김없이 세상을 떠나게 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 비해서 여러분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은 전쟁의 위험을 한 번도 경험하신 적이 없습니까? 고독한 감옥 생활을 하신 적이 없습니까? 고문을 당하시거나 굶어죽을 위기에 빠지신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은 오늘 전 세계 곳곳에서 가지가지의 전쟁과 투옥, 잔혹한 고문과 기아에 허덕이는 5천만 명 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시는데 어떤 협박이나 방해 없이 교회에 오셨을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수십 억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예배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고볼 때 여러분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이 밖에도 우리가 감사할 조건을 찾는다면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생각해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사할 때에는 대개 무엇인가 눈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감사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스러운 가족들 때문에, 좋은 친구들 때문에, 직장 때문에, 새로 산 자동차 때문에, 더 좋은 집을 샀기 때문에, 건강이 좋기 때문에, 등등… 보이는 무엇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보이는 것들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없을 때에는 감사한 마음도 갖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정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나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까? 세 가지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1.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드리는 중보기도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15-16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에 대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16절을 보면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을 보면 그 감사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바울은 저들과 헤어진지가 벌써 오래됐습니다. 늘 염려가 됐습니다. 여러 해 전에 말씀을 가르치고 떠나왔는데 지금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에베소 교인들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주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믿음에 부응한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상업과 무역이 크게 발달되어 있던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중심지로 고대 7대 불가사이 중의 하나인 로마인들이 다이아나라고 부르는 아데미(Artemis) 신전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인들은 이 신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신전의 제사는 쾌락, 혼음 - 성적 타락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 외에도 에베소엔 한번에 2만 5천명이 들어가는 대형극장이 있었는가 하면 각종 우상종교가 난무하여 축사와 마술 등 악령의 소굴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타락의 도시에 복음이 심겨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에 3년을 머물고 에베소를 떠날 때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며 성도들을 격려하는 말이 사도행전 10:29 이하에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람들을 혼란케 할 터이니 교회를 잘 지켜 달라고 합니다. 말씀의 사역자 사도 바울을 전송하며 에베소 교인들은 바울을 안고 목놓아 웁니다. 행20:36-38절에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 정말 사랑했고,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았던 교인을 두고 가는 목회자 바울의 시정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에베소 교인들을 잊지 못하던 차에 감옥에서 소식을 듣습니다. 15-16절에 “주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음행이 들끓고, 우상숭배가 가득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신앙생활하기 아주 힘든 도시였는데, 이런 세속화 된 도시 한복판에서도 그들은 믿음을 지켰을 뿐 아니라 서로를 격려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핍박을 견디어 나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감옥에서 들을 때, 얼마나 기쁨이 컸겠습니까? 그러므로 영혼 깊은 곳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2.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17-18절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렇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지혜와 계시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늘의 신비한 은혜를 이들이 받게 됩니다. 여기 ‘주사’는 엄청난 단어입니다. 이는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단어입니다.
그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젓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이 마치 폭우같이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고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 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왜 주셨습니까? 여기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3가지입니다. 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②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③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여기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라는 기도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동사는 `동침한다', `동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부가 한평생 동침동거할지라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아니하면 일생 남남으로 살 수 밖에 없거늘,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과 노력없이 어찌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으며, 어찌 그 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지 않으면 언제나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만질 수 있는 것들만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상속이 얼마나 큰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고 계십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은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눈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리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 제가 누구의 것을 토색하였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의 눈이 달라졌기 때문에 기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그때부터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하는 소명을 알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다가 천당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소명이 보이면 과거에 내가 왜 그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지금 내가 왜 이런 환경을 견디어 내야 하는지. 미래 내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이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후 그의 신앙, 가치, 인생의 목적...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맥추감사절 을 앞두고 어제 제가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제가 고1때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제 만 45년이 됐는데, 그 동안의 삶을 회상해 보니까 모든 게 은혜였습니다. 핍박도 있었고, 고난과 역경도 없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한참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일어나서 예배당 밖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제가 부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해서 당장 무엇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게 비단 저뿐이겠습니까! 그 누구든 신앙의 인경을 쓰고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감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감사의 제목이고, 무엇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 된 것 자체가 감사의 제목입니다.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이 한 순간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시각이 바뀐다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일을 당하고 살지만 왜 어떤 사람은 감사하고 왜 어떤 사람은 감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선물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떠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을 불러주신 소망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으셨습니까?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체험하셨습니까? 이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
3. 지금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23절을 보세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당시 바울이 세운 교회는 정말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처럼 수천 수만명이 모이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수십, 수백명입니다. 오늘의 교회처럼 건물이 크거나 재정적으로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처럼 한 도시에 수십 수백개의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작해야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 있을까 말까해서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이라는 것은 정말 미미할 때입니다. 바울은 그 때 장차 이렇게 미미하고 보잘것 없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충만케 하실 것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이 엄청난 비전 앞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기 만물(萬物), 충만(充滿)이란 단어가 반복되어 무슨 말인지 선뜻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수식어를 빼어 버리고 앞의 단어와 맨 뒤의 단어, 주어와 동사만 보면 “교회는 ..... 충만함이니라”가 되고, 무엇이 충만한가를 알기 위해 바로 앞의 단어, 수식어를 붙여 보면 “교회는 ......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가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 곧 그리스도가 충만한 곳입니다. 교회는 충만한 곳입니다. 말씀, 은혜, 사랑, 능력, 권세, 섬김, 축복, ... 모두 충만한 곳입니다. 온 세상 만민이 다 와서 만족하리만치 얻어도 남음이 있는 충만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충만, 충만케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스림의 권세가 오늘 교회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가 바로 오늘 교회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로 세상을 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세상의 지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위엄이 있습니다. 우리의 품위가 있습니다. 당당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능력과 풍성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누릴 마땅한 권세와 충만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가운데 많이 있습니까?
옛날 우리나라에 어떤 재벌 한사람은 당뇨병과 위장병이 있어서 매일 잡곡밥 한그릇 두부 한모 정도를 먹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쌓아놓은 재산과 맛난 음식들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습니까? 오늘 영적으로 당뇨병 들고 위장병 들어서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에 풍요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풍요를 맛보고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며칠 전에 월드컵 축구시합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1위 독일을 2:0으로 이겼습니다. 그것도 후반전 추가시간 6분에 두 골을 넣었습니다. 이 경기를 보면서 국민들이 감동받은 것은 2:0이라는 점수보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나라의 경제가 어렵다 보니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도 여기저기에서 힘들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고통당하는 바울은 보이는 현실 앞에 결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풍성한 역사를 보았기에 감옥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끝까지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남은 후반기를 힘차게 달려 나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만, 감사가 아니라 오늘 맥추 감사주일을 맞아 여러분들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시려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더 깊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숙한 감사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