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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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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22 함께 세워가는 공동체 ⑥ (엡 2:11-22)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07-22 | 조회: 941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한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도 당신의 관심이 하나 있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희망을 거는 대상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핏값으로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이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교회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게 주목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에 큰 기대를 걸고 계신다면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제자가 된 우리들은 얼마나 더 교회를 사랑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어느 한 작가가 이상적인 교회에 대해 쓴 글을 먼저 소개 합니다. ‘모이는 회중이 500-700명을 넘지 않는 교회가 성도의 교재와 제자훈련과 선교적인 면에서 가장 적당할 것이다. 구성원은 가능하면 전문직을 가진 젊은 층과 설교를 바로 이해하려고 하는 장년층, 풍부한 경험을 가진 노년층, 각 지역 출신들이 골고루 모여 아름다운 일들을 할 수 있는 교회일 것이다. 그리고 찬송하는 교인, 참여하는 교인, 웃음이 있는 교인으로 신앙의 연륜은 7-10년 정도일 때 비교적 순수하여 말씀을 잘 받을 것이다. 담임목사는 교인과 교회를 사랑할 줄 아는 설교가이고 최신의 신학도 말할 줄 아는 신학자, 능률 있는 행정과 유능한 교육자 지혜로운 상담자, 끊임없는 노력과 유머가 있는 현대인이기를 바란다.

 

 

선교, 행정, 교육 등 각 분야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부교역자들을 확보하는 교회는 균형있게 부흥할 것이다. 유명한 회사의 전무이사와 같은 활동력 있는 장로, 어렸을 때 돌아보면 기억되는 고향 이모님 같은 권사, 중대선임하사와 같은 집사, 생명보험을 내게 설명해 주던 전문 보험인 같은 목장지기, 야전 사령탑 같은 남녀 전도회 회장,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 같은 교회학교 교사, 남녀 공학 중학교의 학급대항 합창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중3 어느 학급과 같은 찬양대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조용한 교회일 것이고 평화로운 교회일 것이며 전체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도록 썩 마음에 드는 교회일 것이다참 표현을 잘했다고 생각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동성교회 모습도 이럴 수 있다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함께 대하는 이 에베소 교회는 지역적으로 유리한 곳에 위치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목이 좋아야 하는데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이 찾아오기 쉽고 주차 공간이 넓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에 위치해서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곳이며 무역과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어디든 퍼져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곳에 위치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설립한 목사님, 담임한 목사님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해박한 신학적 지식과 분명한 회심의 경험, 복음에 입각한 신앙과 말씀 교육이 가능한 그리고 한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뜨거운 열정, 선교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는 목회자의 헌신이 머물러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문화와 문명의 지식에 탁월하고 두란노 서원을 세워서 교인들에게 3년 동안이나 가르칠 수 있었던 능력있는 목회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목회자이었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있는 교회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또 에베소 교회는 박해와 고난 중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교인들이 헌신과 수고와 인내로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으면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조금만 어려워도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교인들이 많은데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붙드는 성도들이 있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지적으로 뛰어난 교회입니다. 교회에 이단사상이 들어왔을 때 분별하여서 이단을 밝히고 축출시켰던 능력있는 교회입니다. 이단(異端)이라고 하는 것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단은 우리 삶 속에 애매한 부분에서 명쾌한 답을 주기 때문에 속기도 쉽습니다. 교회에 이단이 들어오면 동조하는 교인들이 많이 생기면서 어려워집니다. 그러다 교회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영적이고 성경적인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분별해 내었던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상적인 교회라고 생각할 때, 주님은 이 교회를 떠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훌륭하고 좋은 목회자가 있고 전통이 있고 신앙의 수고와 헌신이 있다해도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야말로 생명력을 잃은 교회요 소망이 없는 교회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작아도 주님이 계시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떠나시려고 했던 교회. 아니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또한 동성교회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위기가 아니겠습니까. 내 신앙생활의 진정한 위기는 주님이 내 곁을 떠날 때, 우리 가정을 떠날 때가 아니겠습니까?

 

 

왜 주님이 떠나려고 하십니까? 2: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하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처음사랑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고 경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자주 보는 드라마에서 희생과 애환과 죽음 등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은 가슴 속에 와 닿습니다. 처음 사랑했을 때 어떠한 마음이었습니까? 주님 한 분만으로 내 인생을 만족합니다. 다른 것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사랑이 최우선입니다.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 죄를 사해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그 구속의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시간과 물질을 드리지 않을 수 없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보니 처음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서나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과의 첫사랑이 남아 있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첫사랑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돈을 써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만 가질 수 있다면 뭐든지 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신앙생활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는 처음 사랑 속에 친교, 봉사, 헌신과 용서가 나옵니다. 그 사랑이 끊어질 때 용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지치고 힘들고 기쁨 없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교회의 본연의 사명을 잊은 자들이 나타나는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가지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라”(11), “이제는”(13) “그러므로 이제부터”(19)아는 단어입니다. 저는 오늘 이것을 가지고 교회가 세워져 나가는 공동체성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11-12).

 

여러분, 안타깝게도 이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 가운데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는 자들과 이방인으로서 살다가 예수를 믿은 자들의 심각한 갈등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11-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여기 보면 그러므로 생각하라로 시작합니다. remember입니다.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까? 너희 과거가 어땠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갈등의 소지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은 믿는 사람들에게 오는 핍박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그리고 우상이 들끓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진리를 가지고 견뎌나간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뿐이지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성도끼리 편견의 벽이 이었습니다. 바로 유대인으로 개종한 그리스도인과 이방인으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의 편견으로 오는 이 갈등은 심각할 정도입니다. 바로 이들을 향해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그들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 앞에 선자들이 이 편견의 벽을 깨드리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편견은 결국 자신의 신앙이 병들게 되어있습니다.

 

 

목회상담학자인 웨인 오츠(Wayne E. Oates)가 쓴 신앙이 병들 때라는 책에 보면, 우리의 신앙이 병들 때 나타나는 몇 가지 심리적 현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병들면 첫 번째로 평안이 없어집니다. 교회에 가도 기쁨이 없습니다. 가정에 들어와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친구나 사람을 만나도 마음에 평안을 못 느낍니다. 모든 일이 짜증스럽고 귀찮아집니다. 두 번째로 신앙이 병들면 화해의 마음이 닫힙니다. 신앙이 병들면 마음이 닫혀 대화가 줄어들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편견과 선입견관 자기주장만 앞세우게 됩니다. 세 번째로 신앙이 병들면 좌절감이 생깁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생기게 되어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이 됩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건강합니까? 우리의 신앙은 지금 병들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병들어 평안이 없을 때, 마음이 닫혀 있어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할 때, 그리고 신앙이 병들어 좌절감 때문에 매사가 비판적이고 부정적이 될 때 우리는 빨리 바른 믿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빨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큰 병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병이 내 몸에 생겼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방치해두면 그 병에 점점 커져 나중에는 큰 수술을 해야 하는 큰 병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생기고 병의 조짐이 보일 때 빨리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빨리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큰 병에 들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습니까?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합니다.(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 무슨 말입니까? 여기 이제는 이란 말은 여러분이 가지는 이 편견으로 오는 갈등을 이제는 더 이상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의 보혈로 인해 일어난 결과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간에 막힌 담을 흔히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은 담을 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우리 안에 만들어진 담, 하나님의 창조섭리인 행복한 삶을 사는데 방해하는 모든 담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 내 본질적 자아를 보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담, 내 이웃과 아름다운 관계를 파괴하는 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 세계 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담, 그 모든 담입니다.

 

 

그 모든 담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헐어버리셨습니다. 16절에 말씀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되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막힌 담장들이 허물어집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십자가의 사랑에 스며드는 곳마다 담장이 헐리면서 잃어버렸던 관계들이 회복됩니다. 막힌 담장으로 인해 왜곡되고 불행에 빠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관계를 회복할 때 그 사람을 가리켜 새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본문 15절에 중간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으심을 받아 평화를 누리는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새 사람이렇게 말하니까 개인 한 사람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알기 쉽게 번역하면, 하나님이 하나의 새로운 인류를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새 인류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로 무엇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저 모였다가 흩어지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이 교회는 완전히 새 사람입니다. 새로운 인류입니다. 새로운 족속입니다. 나의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나의 과거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부르셔서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서로 간에 편견과 갈등이 없고, 서로 소외시키지 않는 새 사람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외칩니다.

 

 

셋째,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여기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권속이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는 가정들이 모여서 큰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식구의 구성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마신 영적으로 예수의 생명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피가 선순환 되기 위해 21-22절에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여기 보면 서로 연결하여”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함께, 서로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함께라는 개념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함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 성전을 지을 때는 생김새가 다양한 돌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에도 보면 성전을 지을 때 정으로 돌을 쪼지 말라고 했습니다.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돌의 모양 그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대로 끼워 맞춰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돌담도 그렇습니다. 다양한 돌들을 끼워서 멋지고 가지런하게 담을 쌓은 것을 보면 참 멋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은사가 다 다릅니다. 성격이나 배경, 경험, 기질, 어떤 일에 대한 관점과 생각이 다릅니다. 이해나 반응, 은사도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절망이 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상대방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어서 사귀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돌담을 만들 때도 큰 돌만 있으면 돌담이 안 됩니다. 튀어나온 돌이 있으면 다른 돌이 들어가면 됩니다. 서로 맞추는 것입니다.

 

 

여기 지어져 간다는 말 - 이것은 공사 중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공사 중이고, 공사 중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공사 중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에 신앙인의 이름표가 붙여 있다면, 그 옆에 이런 글귀가 써져 있습니다. ‘공사 중인 신앙인!’ - 우리의 신앙은 완성품이 아닙니다. 아직도 공사 중입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제작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내 모자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어져가는 내 모습을 기대하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습니다. 그 값없이 받은 은혜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받았다고 그것이 값싼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음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1937년 어느 여름날입니다. 철도 다리의 관리인인 잔 그리피스는 다리 아래로 배가 지나가게 하려고 다리를 들어 올린 다음 그의 여덟 살짜리 아들 그레그와 함께 관제탑 위에 만들어진 전망대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400명의 승객을 태운 멤피스 특급열차였습니다. 그는 관제탑으로 뛰어가서 기차가 지나가도록 다리를 연결시켜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관제탑으로 뛰어내려간 사이 아들 그레그가 다리를 들어 올리는 거대한 톱니바퀴 위에 떨어져서 왼쪽다리가 그 톱니바퀴에 끼고 말았습니다. 너무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저 앞에서는 400명의 승객을 태운 기차가 계속 기적을 울리며 다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다리 아래쪽에서는 사랑하는 아들이 톱니바퀴에 끼어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는 갈등하게 됩니다. 기차가 지나가게 하기 위해 다리를 정상으로 만들려고 스위치를 넣는다면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 있는 아들은 죽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위치를 넣지 않는다면 열차는 탈선하여 강물에 빠져 400명의 승객이 죽고 말 것입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스위치를 힘껏 밀었습니다. 열차는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아들은 톱니바퀴에 끼에 몸이 으스러진 채 죽고 말았습니다. 잔 그리피스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을 때 열차의 차창 속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습이 보였습니다. 한가하게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행복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아이들, 평안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잔 그리피스는 날카로운 창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기차를 향하여 눈물로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을 위해서 내 아들을 바쳤소. 그래도 아무 관심이 없단 말이오?” 그러나 그의 이런 외침은 철다리를 건너가는 시끄러운 기차 소리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그리피스의 고함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를 향해 고함치시는 하나님의 애절한 눈물의 호소가 들리십니까? ‘내 너희를 살리기 위해 내 아들을 바쳤다. 내 너희와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내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였다. 그래도 너희는 정녕 관심이 없단 말이냐?’ 그 주님은 오늘도 내가 성숙해 지기를 기다리십니다. 왜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하십시오. 품으십시오. 기다리십시오.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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