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떤 곳이든 탁월한 곳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근간에 산업 스파이들이 신기술이나 신 개발품의 기술을 훔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제시하면서 비밀을 빼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지금 중국에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신기술에 대한 비밀보안에 힘을 쏟고, 어떤 식당들은 사람들이 줄을 서게 만드는 맛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비밀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드러내고 싶은 비밀도 있습니다.
이제 3장에 보면 이 비밀에 대해 나오고 있습니다. 3-4절에 보면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 비밀이라는 뜻의 희랍어 단어가 "무스테리온"입니다. 영어의 미스터리(mystery)가 바로 무스테리온에서부터 나왔어요. 이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는 그냥 숨겨진 비밀이 아닙니다. 계속 숨겨져야 할 그런 비밀이 아니라, 이것은 자랑하고 싶은 비밀입니다. 여러분, 비밀가운데 어떤 비밀을 내가 알게 되면 말하고 싶잖아요? 그 비밀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비밀이야!" 그러면서 얘기하는 것 있죠?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이 무스테리온 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영어로 "Open secret" 이라고 했어요. 나타난 비밀, 공공연한 비밀, 이제는 당연히 나타나야 되고 자랑하고 싶은 그런 비밀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내 구주가 되신 것, 내가 구원을 받은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이것이 놀라운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바울은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4절에 보시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이 비밀은 자신,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문제가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발견하고 난 이후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그래서 고전 9: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엄청난 비밀을 깨달은 자의 무거운 사명감입니다. 8절에서도 바울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날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멩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앞에 선 사람들은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 한분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 길래 역사 속에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도대체 그 이름,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다 내던져 버릴 수 있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비참함, 죄로 인해 파괴된 자기를 못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만나는 그 순간 십자가의 보혈의 희생으로 나의 비참함을 씻겨내시고 허물을 덮어 주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을 결코 포기하지도 놓치시지도, 버리시지도 않으시는 주님의 측량못 할 사랑에 젖어 사는 것입니다.
이 아침!!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 진리 앞에 이 비밀을 깨달았습니까? 그렇다면 이 비밀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게 되면, 세 가지 “말미암아”가 나옵니다.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6절엔 “복음으로 말미암아”, 10절엔, “교회로 밀미암아”, 12절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는 비밀, 곧 복음, 교회, 믿음은 그리스도를 깨다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1. 복음으로 말미암아
먼저 비밀이신 그리스도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6절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다같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우리의 최고의 비밀은 그리스도라고 믿습니까? 그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예수님과 함께 지체가 되고, 예수님과 함께 약속에 참여했습니다. 여기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은 신분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함께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의 소속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함께 약속에 참여했다’는 말은 우리가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달라진 전인적 변화를 말한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내 삶의 ‘관심의 초점’이 바뀝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를 보세요. 마틴 루터가 어느 날 로마서 1장 17절을 읽다가 천기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집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인간적인 몸부림을 치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갇혀 살던 그 시대에는 굉음과도 같은 복음입니다. 이 거대한 깨달음이 오는 순간 한갓 젊은 사제에 불과한 마틴 루터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권력 앞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그러므로 비밀을 깨닫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깨달으면 충격 정도가 아니라 인생이 바뀝니다. 그의 삶에 관심의 초점이 달라졌습니다.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특히 하늘의 비밀을 깨달으면 내 인생의 가치를 그 비밀과 다 바꾸는 것입니다. 진리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 교회로 말미암아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나에게 드러나는 두 번째 통로는 교회입니다. 10-11절입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다같이 “교회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비밀은 먼저 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신분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존재는 죄 속에 있습니다. 계속 배우고 자라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세운 기관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의 비밀이 드러납니까? 10절에,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다른 지혜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존재 목적은 다른 것 없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이 풍조 속에, 사탄의 왕국을 향하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들이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약 10여 년 전에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있는 한 교회의 이야기가 지구촌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2년 동안 6명의 목회자가 모슬렘에게 잔인하게 암살당했기 때문입니다. 모슬렘 문화권에 파고드는 교회의 존재를 탐탁하지 않게 여긴 모슬렘이 이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를 암살했습니다. 모슬렘 국가에서 태어나면 평생을 모슬렘으로 살다가 모슬렘으로 죽습니다. 모슬렘을 떠나는 것을 최고의 반역죄로 여겨 사형으로 처벌합니다. 물론 모슬렘 국가에서도 ‘자기의 종교나 신앙을 자기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세계 인권선언문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슬렘 신앙을 떠나는 것을 문화적으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슬렘 국가인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교회가 세워지자 모슬렘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못하도록 박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를 암살했습니다. 그런데도 살해된 전임자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목사가 그 교회에 부임했고, 그 역시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담임목사가 살해되자 또 다른 목사가 부임했고, 그도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살해된 목사가 2년 동안에 무려 6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담임목사로 간다는 것은 곧 암살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목사가 부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2년 동안에 6명의 목사가 살해당했는데도 그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10여 년 전에 약 400여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목사가 살해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 죽임당할 것이 자명함에도 계속해서 목사가 부임하자 사람들이 궁금해졌습니다. ‘교회에 뭐가 있기에 목숨을 걸고 사역하려고 하느냐?’ 하는 궁금증이 생긴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고,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디 목사만 살해 위협을 당하겠습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모슬렘 사회에서는 자기들의 신앙을 버리고 다른 신앙으로 개종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하면 엄청난 불이익은 물론이고 핍박과 살해위협까지 시달려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핍박을 받아도, 심지어 잔인하게 살해를 당해도 계속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성도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 분명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해당할 위기 앞에서 살해를 모면해야만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해를 당해도, 순교를 당해도 순교를 각오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는 것,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하는 현장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습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당신의 권능으로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때로 부족함이 있고,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그리고 세상은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며 교회의 존재의미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게 뭐 교회야!’ ‘교회가 이것 밖에 안 돼!’ ‘이런 교회는 세상에 필요 없어!’라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그렇게 부족한 것이 많아도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를 당신의 권능으로 보호하시고, 그런 연약하고 부족한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그런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교회를 들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지막인 믿음입니다. 복음에서 교회가 나오고 교회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12-13절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다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다면, 교회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한다면,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 중요한 단어가 “담대함”입니다. "담대함"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거절감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기가 감옥에 있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자신이 감옥 안에 붙잡혀 있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잡혀 있는 것은 로마의 죄수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붙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감옥에 있어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에베소서는 로마의 네로 황제 치하의 감옥 안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감옥 안의 죄수가 기록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당당하고 평온함이 넘칩니다. 다른 옥중 서신인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행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고, 고난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이 느껴집니다. 죄수인데 권위가 있고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Ⅱ. 그러므로 바울은 이 복음의 비밀을 알고 7-9절에 왜 자신이 일꾼이 되었는지를 이야기를 합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오늘 본문의 편지를 쓴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주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복음전도의 일을 감당하면서 힘든 경험도 참 많이 했습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어야 했고, 매를 맞는 일이나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일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오히려 8절에서 자신을 “모든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로 소개합니다. 이런 나에게 이 비밀을 맡겼다면, 이 땅에 그 어떤 누구도 이 비밀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을 겸손하게 말한 것도 있지만, 나와 같이 이렇게 부족한 자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다면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깨어지기 쉽고 볼품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가슴에 품고 존귀한 존재로 사는 우리는 욱여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당당하십시오. 박해를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거꾸러뜨리려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지금 내게 맡겨진 일이 내게 너무 버겁다는 생각을 해 보진 않으셨습니까? 왜 나에게는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맡겨 주셨나 하고 불평하고 싶은 때는 없으셨습니까? 아무리 무겁고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즐거움으로 감당하면 어떤 일이든지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일을 맡았든지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하려 할 때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