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청소년 사역에 큰 힘이 되고 있는 파이디온 선교회가 있습니다. 이 선교회를 위해 많은 수고를 했던 정봉채 목사님이 계십니다. 미국에서 목회 하실 때, 제가 신세도 졌고, 이년 전에 일산에 한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그 교회에 제직 세미나를 섬긴 적도 있습니다. 참 건강한 분인데 지난 해 간 암 판정을 받고 우리나라에 암 권위자에게 초기 간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몸이 안 좋아 다시 검사를 했는데 온몸에 암이 퍼진 상태입니다. 처음엔 오진을 한 의사를 원망도 하고 분노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다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지금은 마지막 천국 길을 준비하고 있는데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밭
오늘 아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밭을 보았다. 그렇게 화려하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깊은 산속 오솔길 가에 소박하게 만들어진 이 꽃밭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보인 것은 나처럼 암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한없는 기쁨과 소망과 용기를 주는 향기로운 꽃밭이기 때문이다
이 꽃밭을 만든 분이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말기 암으로 절망과 아픔을 겪고 있는 동안/ 나처럼 외롭고 힘든 암 환자들이 산책을 할 때 미소를 머금게 하고 기쁨과 소망을 갖게 해 주고 싶어서/ 하루 이틀 거친 산을 개간하여 꽃씨를 심고 물어 주고 가꾸었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꽃밭이 되었네요.”
오늘따라 꽃들이 너무 아름답고 예쁘다. 꽃 보다 더 아름다운 그 사랑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게 보이고/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진 것도 없고 초라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배려하는 그 마음이 너무 존경스럽고 아름다웠다.
오늘도 주일인데 내가 섬기는 교회를 두고 요양병원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내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 꽃밭의 꽃들로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 꽃들을 보다가 사랑하는 새 하늘 성도들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꽃보다 몇 만 배 아름답고 순수하고 향기 나는 귀한 성도들이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보고 싶다.
자신은 암으로 죽어가는 데 그 꽃을 보다가 ‘성도들이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부자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만날 수 없었고, 교인의 집을 방문할 수도, 설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가기 원했던 로마이지만, 그는 이처럼 감옥에 죄수로 매여 있는 상태입니다. 에베소 교인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입니다. 비록 바울이 매어 있었지만 기도를 방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1. 속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합니다. 여기 속사람에 대해 나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는 죄의 지배 속에 인격전체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몸과 우리의 기질과 우리의 생활습관 모두 다 죄에 절어 있었습니다. 이런 소망 없는 자가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속사람이 새로워 졌다는 말입니다. 죄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신분의 변화는 이루어졌는데도 우리의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살던 버릇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버리겠습니까? 뭔가 새로워지고 싶은데, 내가 나를 바라보아도 도대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 것일까? 남들은 멋지게 성장하고 은혜를 체험하는 것 같은데, 성경대로 삶을 살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늘 실패하는 못난 자신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는 혹시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지 않는 자가 아닐까? 나는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갈등은 불신자에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고민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갈등입니다. 우리 속에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세력이 있으니까 갈등이 생깁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의 갈등입니다. 이 두 가지가 계속 갈등을 일으킵니다. 여러분!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에는 얼마간 독이 들어 있습니다. 냉면에도 대장균이 우글우글대고, 우리가 먹는 밥에도 독이 있습니다. 심지어 김치속에도 독이 있습니다. 그런데 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이유는 속에 있는 저항력이 몸 안에 있는 나쁜 세균들과 싸워 이기기 때문입니다.
싸움에서 지면 소화가 되지 않고 설사를 하고, 그러다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됩니다. 우리가 병이 들면 ‘투병한다’고 하는데 언제까지 병과 싸울 수 있느냐하면 내속에 생명이 붙어 있을 때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병과의 싸움은 이기느냐 죽느냐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원리가 동일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싸움에서 이 갈등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요?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어떻게 강건해질 수 있을까요? 16절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기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즉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우리의 속사람은 강건해집니다.
그런데 이 속사람이 강건할 때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변화, 그것은 꿈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예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받아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변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라면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으면서도 언제까지나 자기의 꿈만을 고집하고 나를 향한 예수님의 꿈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이것은 불순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꿈은 무엇입니까?--하나님 나라의 꿈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을 높이는 인생을 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수 백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바라보면서 예언한 내용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기쁜 소식을 듣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병들고 상한 자들이 고침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갇힌 자가 놓임을 받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상처입고 고통 당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고 완성되어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이 사명은 너무나 황홀한 것이기에 이 사명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주님 앞에 나실인처럼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숨을 쉽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기뻐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 때문에 세상에서 기가 죽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사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독특한 삶을 선택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성공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로써 예수님의 꿈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인생을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즉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우리의 속사람은 강건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두 번째는
2. 내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위해 간구합니다. (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여기서 “계신다”(dwell)는 말이 중요합니다. 거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삶이 주권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삶이 일어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영리에 보면 이런 그림이 있습니다. 내 마음의 보좌에 내가 앉아 있는 그림이 있고 또 보좌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 예수님은 내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음에 계실 때 모두에게 똑같은 모습으로 계신 것은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앉아 계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 내 인생의 키를 넘겨드릴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생명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유명합니다. 노인이 작은 배를 타고 먼 항해를 떠났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상어를 잡고 신나서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고기 떼들이 상어를 다 뜯어먹어버렸어요. 앙상한 뼈다귀만 남아있었습니다. 헤밍웨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헤밍웨이는 인생을 그렸습니다. 수고하고 애써서 큰 것을 잡았지만, 항구에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는 허무주의(nihilism)가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유복(裕福)한 가정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봄날 그는 뜰에서 자신에게 산탄총을 겨누었습니다. 자살했습니다. 그는 죽도록 수고하고 기가 막힌 감격도 경험했지만, 나중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자신의 인생을 그렸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 열심히 삽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모두 수고합니다. 오늘날 도시의 삶이 얼마나 힘듭니까. 저녁이 되면, 파김치가 됩니다. 저녁에는 모두 지쳐 돌아옵니다. 피곤하다는 말이 입에 늘 붙어있습니다.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거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려운 현실이 아닙니다. 무엇이 남느냐가 중요합니다. 결과주의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의 의미가 무엇인가, 열심을 통하여 어떤 열매를 거둘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학교에서 1등을 하고 두각을 드러내던 친구가 우울증에 걸리고, 삶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승진하고 출세하고 세상에 알려지지만, 나중에 보면 절망하고 비참합니다. 바닥을 긁습니다. 우리는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열심만으로는 안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만큼 열심히 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열심입니다. 프로그램도 많고, 사역도 열심히 하고, 한국 사람은 열심이 특심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빈손이 되면 안 됩니다. 허무해져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가 내 안에 거하실 때, 그 어떤 풍랑 속에서도 균형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17하-19)
마지막으로 바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7하-19절에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로이드 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높이 도달해야 될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면서 성경도 많이 알아야 합니다. 봉사도 많이 해야 합니다. 이것들도 다 중요하지만 가장 높은 곳까지 끊임없이 사고하면서 올라가야 될 정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사모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 바닥에서 엎드려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한 경지까지 계속해서 발전하기를 원하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도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주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평범한 자리에 머물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영적인 여행을 날마다 계속합시다.
교회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예수를 오래 믿었든, 갓 믿었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랑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가볍고 옅은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 293장을 작시한 브렉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의 사랑이 비췰 때에 이 세상은 아름답고 활기차게 다 변하네.'(2절) 이 세상이 아름답고 활기차게 변하는 것을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도 세 아이가 있는데 막둥이가 둘째와 터울이 11살 늦둥이입니다. 이 아들이 4살 때 이 녀석이 막무가내일 때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저녁 집회를 마치고 사택으로 들어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묘해요. 아이가 막무가내로 우는데 할머니와 집사람이 당해내질 못해요. 지하철을 타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야단도 쳐보았지만 안 통해요. 별도리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저녁시간에 막둥이하고 지하철을 타러 나갔습니다. 보세요. 아이가 지하철을 타는 순간 눈빛이 반짝거리며 야경에 비친 창밖에 광경을 보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조금 전에 떼를 쓰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빠 사랑한다는’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이 모습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저에 대해서 때로 얼마나 실망이 많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내 부족함, 내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다 받아 주시고 참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포기하기엔 너무도 값비싼 대가를 치루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자녀 삼으시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기대가 이루기를 소망하며 모든 것을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신지 그분의 눈에 열방은 물통에 떨어지는 한 방울 물과 같다고 말씀합니다.(사40:15)
전세계 200여 개가 넘는 국가들을 다 모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저울추에 앉아 있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사40:17) 그만큼 강대하신 하나님이 나같은 티끌 같은 존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과 감동이 있겠습니까?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감동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사랑으로 기초가 든든하게 다져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기능합니다. 그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날마다 체험하며 깨달아갈 때 우리의 삶의 기초가 다져지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동기가 사랑이 됩니다. 성가대원으로 섬기거나 교사를 해도 시랑 때문이고, 신앙생활을 해도 사랑 때문이며, 가정생활도 사랑의 힘으로 감당하고, 무엇을 해도 사랑이 기초가 됩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법으로도 할 수 없고, 어떤 형벌로도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이 세상에서 두 종류의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내게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이 두 종류의 사람만 보입니다. 당신의 눈에 아직도 남의 잘못이 보입니까? 못마땅한 사람이 있습니까? 보기 싫은 사람이 주위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충만하면 내게 잘못한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쌍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싶은 미음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다 아십니다. 우리 속사람이 과거의 상처로 구겨진 것을 다 아시고, 우리가 낙심하고 고뇌하며 연약한 것도 다 아십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지금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세상은 그를 가두어 놓았지만, 그는 오히려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를 위해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포드 자동차 선전에 멋있는 카피가 있습니다. ‘최근에 포드 자동차를 몰아보셨나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최근에 기도해 보셨습니까?’ 대답하지 못한다면 무능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 상태가 과연 어떠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빌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기도제목으로 동일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성령의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해지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마음을 주장하시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삶의 터가 충만해지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