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고난 속에서 살아온 민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나찌에 의해서 600만명이 학살된 것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에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야드바심’이라고 붙였습니다. ‘야드바심’이란 말은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 기념관 입구에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백악관 건너편에도 유대인 학살기념관을 세웠습니다. 그곳에 갈 때마다 후손들이 그 아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어려움을 잊고 살면 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고 살고 있진 않습니까? 일본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사건이 터지면 쉽게 흥분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는 근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면 아픔의 역사는 반복됩니다. 돌아오는 8월 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 속에서 36년 동안 식민지 생활을 하다가 해방된 지 73년 되는 날입니다. 36년의 일제 때 받은 그 수치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찬탈을 당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쌀을 수탈해 갔습니다. 전쟁물자로 사용한다고 철붙이들을 모조리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이름까지 바꾸고, 자기들의 요구인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수많은 신앙인들을 감옥에 가두고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그런 일제시대에 우리 국민들이 당했던 그 수치와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우리의 모습은 말 그대로 상한 갈대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일제의 압제로부터 독립되고 해방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1919년에는 3.1운동을 통해서 독립을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을 갈망하는 희망들이 점점 사그라들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고통을 이겨낼 수도 없고, 우리 스스로 희망을 만들 수도 없다고 생각하던 그 때에 우리에게 독립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독립이 불가능함을 아시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를 받은 그 고통에서 해방된 것은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독립은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 나라는 정치적 혼란, 그리고 사회의 불안이 엄청났습니다. 결국 북한에 의해서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온 국토가 공산화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UN이 개입함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에서 우리가 UN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쟁은 멈추었지만, 남과 북은 정말 오랜 세월 73년이라는 긴 세월 한 순간도 긴장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적대시하던 대결을 청산하고 남북 정상이 지난 4월 27일에 판문점에서 서로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는 감격을 했습니까? 그리고 회담 내용도 우리에게 흥분이 일어날 정도로 핵을 폐기하고 서로 갈등을 풀고 한민족이 하나되어 나아가자는 이런 이야기는 갈라졌던 남과 북의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역사의 배후는 단순한 정치적 진행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얼마나 오랜 동안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의 과제는 우리가 손을 잡았다, 우리의 마음이 통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부족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통하기 시작한 이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어떻게 진정한 하나 됨으로 연결시켜 나갈 수가 있느냐 라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민족사적인 과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 대답을 배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 됨을 지켜나갈 수가 있는지.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이 강단에서 살인적인 더위 속에 에베소서를 강해하다 잠시 멈추고 광복절 설교를 하려했습니다. 그런데 4장에 하나 됨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을 보고 계속 에베소를 붙잡고 나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에베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3장은 교리입니다. 특히 믿음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4-6장은 이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믿음의 실천편입니다. 그래서 엡4:1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1장에서 3장에 나타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푼 구원의 은혜를 전제합니다. 그 엄청난 은혜를 받은 너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이것이 주제입니다. 바울은 4장에서 6장까지 많은 믿음의 실천을 말하지만 그중 첫 번째가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느냐? 그 첫 번째가 믿는 성도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무려 7번이나 ”하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4-6절까지 ”한 성령, 한 몸,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 이 7가지 하나 됨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사실에 동의하십니까? 믿음을 가진 우리는 모두 하나임을 믿습니까?
오늘날 사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무엇을 고통스러워합니까?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고통의 원인이 가족이 하나 되지 못하고, 사회가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이 왜 고통 받습니까? 돈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해 가정이 깨어짐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잠언 17장 1절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기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돈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조금 작은 집에 살면 어떻습니까? 부부가 하나되고, 자녀와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그러나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도 부부 간에 마음이 갈라지고, 가족 간에 하나 되지 못한다면 그곳이 비로 지옥입니다. 우리 시회가 왜 고통 받고 있습니까? 경제가 어려워서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치계가 분열되고, 노사가 하나 되지 못하고, 남편과 아내, 형제와 형제, 이웃과 이웃이 하나 되지 못해 고통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하나 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 많고 깨어진 세상에서 불러 새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 십자가에서 원수 된 것을 다 소멸하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고, 육체를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우리는 왜 하나 되어야 합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불러내신 고귀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균열과 미움이 많은 세상, 만나기만 하면 깨어지는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셨기에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하나 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결혼식을 올리는 것만으로 부부가 하나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자매들이 하나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지만, 하나 됨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 합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해야 이 하나 됨을 지킬 수 있을까요? 바울은 하나됨의 원리를 말한 후에 우리에게도 하나 되는 일에 힘쓰라고 합니다. 엡4: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유지한다.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힘써 지켜야 합니다.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면서 힘써 지키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그리고 화평입니다. 겸손으로 시작해서 화평으로 끝납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가 흔들릴 때 혹은 성도의 교제가 깨어질 때 상처를 받을 때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 중에 누군가가 혹은 내가 이 5가지 덕목 중의 하나가 우리 가운데 결핍되어 있을 때 우리의 교제는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피차에 사랑으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의 남북 대화에서도 우리가 진정한 평화로운 통일을 지향하는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이 5가지 덕목들이 계속 남북 사이에 강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사랑으로 용납하며 화평을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우리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 이 덕목들을 이루는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5가지 덕목은 따로 떨어진 덕목들이 아니라 이것은 연쇄적이고 단계적인 덕목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이라야 그 다음에 온유할 수가 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라야 그 다음에 오래 참을 수가 있다. 그리고 오래 참을 수가 있는 자라야 사랑 가운데 용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살펴보겠습니다.
1.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행동이 아닙니다. 자기가 높은데 낮춘다고 할 때는 역시 자기 공로를 주장할 여지가 있습니다. 높은데 낮아져줬다는 자기 의를 내세울 여지가 있습니다. 이럴 때 바로 겸손은 교만의 가장된 모습입니다. 겸손은 상대방을 높이는 행동입니다. 상대방을 높여서 어느덧 자기가 낮은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말씀하신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의 다른 사람들 그들을 귀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그들을 높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똑똑하고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존중해 주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사람입니다.
2.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는 약자의 비굴함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강자 앞에서 부드럽게 행동하는 것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는 다시 강퍅함이 드러날 여지가 있습니다. 이럴 때 바로 온유는 거친 자기주장의 가장된 모습입니다. 온유는 강자의 부드러움입니다. 마치 길들인 맹수들이 힘을 통제하여 부드럽게 행동하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힘도 있습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연약한 모습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하는 것을 삼가야 하겠습니다. 교회 안의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3. 오래 참아야 하겠습니다.
참는다는 부당한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모함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약을 올립니다. 억울합니다. 얼마든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견디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한 번 참을 것을 두 번 참는 것이고, 두 번 참을 것을 세 번 참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가 풀리고 자기 입장이 바로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오래 참아야 하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조급함입니다. 현대인의 중병 가운데 하나가 조급증이라는 병입니다. 너무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급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급함이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무서운 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신학자 중에 한 명인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조급함은 마귀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마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급함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조급함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주인이신 하나님과 보폭을 맞추며 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습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한 곳에 머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한정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가라고 사인을 보내실 때까지 몇 날이고 몇 달이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이고,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너무 늦게 간다고 조급해 하지 마십시다. 조급하게 가다가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것보다 조금 천천히 가면서 천천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4.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용납한다는 것은 받아들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 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내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도저히 함께 하기 힘든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나도 받아들이고 너도 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용납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되고 그 사람이 내가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람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용납해야 하겠습니다.
5. 평안을 단단하게 지켜야 합니다.
로마 시대에 죄수들이 도망칠까봐 군사와 죄수를 줄로 묶어서 호송했습니다. 먹을 때고 같이 먹고 잘 때도 같이 잤습니다. 도망칠 수 없게 한 것입니다. 교회 안의 사람들을 이렇게 평안이라는 줄로 단단히 묶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없고 갈등이 없도록 평안을 굳건하게 지키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사이에 평안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73번째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 하나 됨의 실패를 얼마나 많이 하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이제 이 부분에 대해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가장 나라가 위태 할 때 이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 한국 교회가 한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분열의 연속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50년 4월에 장로교단은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로 고신이 갈라져 나갑니다. 그리고 53년 정전 때 기장이 나누어지고 1959년에는 예장과 합동이 나뉘었습니다. 그것도 wcc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로 갈등하다 통합은 받아들이고 반대한 합동이 나누어졌습니다. 이는 정말 한국사의 아픔입니다.
지금도 장로교란 이름의 교단이 수백군 데가 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연합기구도 분열되어 있습니다. 진보진영은 NCC, 한국교회 협의회, 보수진영은 한기총,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한교연, 한국교회 교회 연합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연합의 의사가 없는 데 무슨 연합입니까? 총리가 취임하면 한기총, 한교연, NCC을 세 번 인사하러 가야 합니다. 이제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통일 한국을 기대하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이 민족이 되었으면 합니다.
남북의 정상이 만났지만, 그리고 북미 정상까지 만나 남북이 하나 됨에 기대를 걸었지만, 이 길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해방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들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우리는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다시 회담을 한다고 소삭을 들었습니다. 서로가 다른 체제 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 통일 한국을 위해 이 정부와 국민이 좀 더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상대를 품고 오래 참음의 자세, 더 나아가 좀 힘이 들어도 본질을 놓치지 않고 용납하며 하나님의 평안이 이 민족위에 가득하길 바라며 회담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통일을 위해 눈물을 뿌리며 씨를 뿌려 봅시다.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 봄은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 땅에 해방의 봄을 선물로 이 민족이 받았습니다. 이제 시작되는 남북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보수도 진보도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꿇고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 줄 믿습니다. 반드시 남북 7500만이 하나 되어 세계 복음화 앞장 서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