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잘 출석하던 성도가 어느 날부터 안 나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담임목사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쓴 메일에 대한 답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 꼭 예배에 출석해야하고 교회 봉사를 해야 할까요? 저는 요즈음 저 혼자만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유지를 통해 믿음의 삶이 가능한가를 실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교회 없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할까요?”
목사님이 다시 답신을 썼습니다. 이렇게 쓰셨다고 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군대에서 훈련이나 소집에 불응하는 군인이 정상일까요? 세금을 내지 않고 투표하지 않는 시민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베이스캠프 없이 등정하는 등산가가 정상일까요? 병원이 없이 치료를 구하는 환자가 정상일까요? 학교나 스승이 없는 학생이 정상일까요? 벌집이 없이 날아다니는 벌이 정상일까요? 팀을 생각하지 않는 축구선수가 정상일까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교회 생활은 정상이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을 주는 교회가 있다면 그런 교회를 택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병을 안고 씨름 하는 사람에게 병이 나을 수 있는 교회를 소개해준다면 얼마나 반가워 하겠습니까? 가난을 이기지 못해서 하루하루 피곤하게 사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님에게 오세요. 하고 말하면 그 말 때문에 교회를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성향입니다. 실패하여 주저앉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낙망하지 마세요. 하면서 소망과 희망을 주는 교회로 인도한다면 무척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나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한 다음의 말에 매우 공감합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종교를 찾지 않는다. 그런 행복이면 와인 한 병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만일 당신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는 사람이라면, 나는 굳이 당신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수준을 가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강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대한 세속도시의 한 복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에 대한 비전입니다. 지금 에베소 성도들은 온갖 우상이 난무하고 음란이 가득하고 물질 만능주의로 길들여진 이 거대한 에베소 도시 한복판에 세워진 정말 외형적으로 보면 힘없고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을 것 같은 성도들에게 비전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온 땅에 펼쳐 나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차디찬 감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①.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간구하고, ②. 저들의 삶이 세상에 휘둘리지 않도록 예수가 그들의 마음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③.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4장으로 넘어오면 ‘하나 됨’을 강조합니다. 매우 중요하죠. 성도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무려 7번이나 ”하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4-6절까지 ”한 성령, 한 몸, 한 소망,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 이 7가지 하나 됨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이 하나 되기를 힘쓰라면서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그리고 화평입니다. 이렇게 하나 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몸된 교회에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11-12절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 나타난 교회의 직분은 물론 바울시대의 직분입니다. 모두 5가지가 나오는 데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입니다. 이 직책들은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해 보면 일시적인 직분과 영구적인 직분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직분은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입니다. 이 직분은 시대가 요구할 때 하나님이 불러 일하다가 일을 마치면 사라집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로 1세기 직분입니다. 선지자는 시대마다 하나님이 필요할 때 세운 사람들입니다. 주로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입으로 활동했습니다. 주로 구약에서 이사야, 에레미야, 디니엘같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전하는 자는 주로 신약에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전도한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의 빌립 같은 사람, 현대의 빌리 그래함같은 분들입니다. 목사와 교사는 목사로서 교사를 말합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있어온 직분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대표적인 직분입니다. 문제는 이 직분들을 사람들이 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삼으셨으니” 했는 데 옛날 성경에는 “주셨으니”로 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보면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첫째, 성도를 온전케 하여 여기서 ‘온전해진다’는 말은 본래 ‘뼈를 맞춘다’는 뜻을 갖습니다. 탈골된 사람이 있다고 하십시다. 그가 어떻게 몸을 제대로 움직여 봉사 활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뼈를 맞추고 치유되는 일이 선결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회복의 징후가 보이면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할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이나 여러 교육을 통해 교인을 세워나갑니다.
두 번째가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은사 발견은 봉사 사역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자기 은사에 합당한 사역을 발견하셨다면 그 일에 충성하십시오. 그런데 그 사역함에 아주 중요한 경고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사역을 결코 일 중심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사역은 철저하게 관계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적 사역은 결국 이웃을 섬기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의 가장 큰 함정은 자기만족의 수단화입니다. 물론 자기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면 거기에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뇌출혈과 뇌경색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뇌에는 수백 수천 개의 실핏줄이 있습니다. 그 기운데 어느 한 핏줄에 콜레스테롤이 쌓이고 피딱지가 앉습니다. 그 핏줄이 자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게 되고 결국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됩니다. 뇌에 피가 가지 않으면 여섯 시간 안에 병원에 가서 그 혈관을 뚫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뇌는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뇌는 영원히 다시 살릴 수가 없습니다. 핏줄 하나가 막히면 그 부근에 있는 뇌가 죽습니다. 그래서 오른쪽 뇌가 죽으면 왼쪽이 마비되고, 왼쪽 뇌가 죽으면 오른쪽이 마비되고,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뇌가 마비되면 말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증상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실핏줄 하나가 자기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 마지막에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 내 직분과 봉사의 궁극적인 초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가를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입니다.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빌딩’(building)한다는 말입니다. 세우는 것(빌딩)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허는 것 곧 파괴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질 때 교회는 진실로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봉사를 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의 섬김으로 우리 교회가 좀 더 든든하게 좀 더 아름답게 잘 세워져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섬기는 분들의 태도나 방식이 잘못되었을 때 교회가 한 사람 때문에 온 교회가 흔들리고 몸살을 앓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래 흔드는 일은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눅22:31에 보면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으나” 세우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세움’은 단순한 조직의 세움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성도를 성숙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성숙하는 교회입니다.(13-14)
13절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이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 기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반대로 어린아이가 되지 말리고 하십니다. 그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순결 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말씀의 기초를 가지고 요동치 말라고 당부합니다, ‘요동하다'라는 단어를 성경학자들은 두 가지에 비유합니다. 하나는 파도, 또 다른 하나는 팽이입니다. 팽이는 채찍으로 때리면 빨리 돌고 팽이 치는 사람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요동치게 되는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그 중 하나는 “사람의 속임수”라고 했습니다. 잘못된 교리에 속는 것을 말합니다. 몇 년 동안 교회에서 공부한 내용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어떤 부흥회나 녹음테이프를 통해, 혹은 기도원에 한번 다녀오고 나서 사람이 확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과 다른 내용임에도 그 가르침에 빠집니다. 이것이 요동치는 사람입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간사한 유혹'이리고 했습니다. 이 유혹은 속임수를 말합니다. 사회학자들이 군중은 어리석다고 말하는데, 교회가 커질수록 어리석은 사람이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이단과 사이비가 설치는지 모릅니다. 2014년 우리 합신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신옥주씨를 보십시오. 이 사람은 ‘모든 성경은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 방언통역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신천지에서 자주 써먹는 비유풀이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이 풀어낸 방법만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 이후에는 사이비종교가 걷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즉 집단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이비가 집단생활을 좋아하는 이유는 강압적인 교육을 통해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외부와의 정보를 차단하고, 감시하기 쉬우며, 재산을 빼앗기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신옥주 씨는 집단생활을 통해서 신도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집단생활 하는 신도들 사이에 자주 폭행이 발생하자 결국 집단을 외국으로 옮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가올 환란을 피하려면 피난처인 남태평양 피지로 가야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400여 명의 신도들을 데리고 피지로 떠난 것입니다.
신옥주 씨를 따라 피지로 떠난 신도들은 가출하고 이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직장과 학업 및 양육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피해자 30여 명이 ‘은혜로교회 피해자대택위원회’를 구성해 문제를 외부에 알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의 비리를 외부에 알리려는 사람이나 집단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은 ‘타작마당’이라는 의식을 통해 귀신을 쫓아낸다는 명목으로 집단구타를 가했습니다. 타작마당을 하면 100대에서 200대 이상 쉴 새 없이 구타를 가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600대 넘게 구타를 당해 거의 완전불구가 되었고, 회복이 안 되자 한국으로 들어왔지만 안타깝게도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혐의 때문에 신옥주 씨는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인천공항에서 들어오자마자 긴급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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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사이비에 빠지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아십니까? 어느 시대이고 사이비 이단들이 활동해 왔지만 오늘날처럼 많은 사이비가 존재하는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사이비들의 꾀임에 넘어가면 가정이 파괴되고, 인생이 망가지고, 영혼이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간사한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서 그럴듯한 말로 선동하여도 어린아이처럼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파도나 팽이와 같이 흔들리지 미십시오. 제자리를 지키십시오. 내 자리, 내 봉사 내 사역의 자리를 굳게 지킬 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다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전하는 하나님의 설계도대로 지어진 교회가 될 것입니다.
3. 은사의 사용을 균형 있게 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섬김의 방편에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방편은 진리와 사랑입니다. 진리 없는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사랑이 없는 진리는 결코 상대방을 감화 시킬 수 없습니다. 14절은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설수 있도록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이웃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이어지는 말씀 15절에서 사랑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고 말합니다. 사랑 없이는 어떤 사역도 열매 맺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실 교인들 가운데 이단에 빠지는 분들을 보면 교회생활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단이 가르친 진리 때문에 이단으로 간 것이 아니라 이단 단체에 가보니까 그들이 찾던 사랑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직 성경을 조금 몰라도 사랑이 있다면 사람을 세우는 사역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건강한 교회, 또 그 안에서 성숙해 져가는 모습은 정말 축복입니다. 영적으로 계속 자라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일평생 영적으로 자라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흥분되는 일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성화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풍기는 향기와 기품이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 앞에 늘 죄송함이 많습니다. 아직도 내 신앙의 현주소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공사 중인 신앙인임을 잊지 마십시다. 때로 세상의 유혹 앞에서 나약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믿음의 길에서 이탈된 채 살 때도 있습니다. 내 안에서는 의롭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 하는데, 자꾸만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내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실수하며 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절규합니다. 롬 7:19-24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니 악을 행했습니다. 마치 노예가 줄에 매여 끌려가는 것처럼, 자신이 죄의 줄에 매여 죄 아래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힘으로 그 죄의 줄을 끊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절규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해방을 얻어 살 수 있음에 감사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교회는 7,8월 무더운 여름철에 신앙교육에 모두가 진력을 다했습니다. 보다 건강한 교회로 서기 위해 자신의 은사를 잘 발견하고 내 유익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유치한 신앙을 벗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무엇보다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사랑으로 섬기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