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아실 것입니다. ‘욕심쟁이 거인’ 우리 학창 시절 첫 국어 교과서에 거인이 사는 아름다운 정원을 칼라로 그린 그 교과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분이 “그날 이후”라는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 나타나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나타났으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고쳐 주셨던 사람들이 차례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폐인이 되어 손발을 떨고 있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세히 보니 ‘바디메오’입니다. 나면서 소경이었던 사람을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고쳐 주었는데 그가 폐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형제여, 어떻게 이렇게 되었소?” 바디매오가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건강하게 되니 먹고 살 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거리에서 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그 주변에는 그를 희롱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한때 귀신들리고 창녀였던 마리아,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마리아가 그렇게 되다니, 예수님은 너무 놀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아니, 마리아, 어떻게 되었소?”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주님 떠난 뒤 힘들어 다시 옛생활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또 한참 가다보니 피투성이가 된 불량배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자세히 보니 실로암에서 고쳐준 맹인입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이요?” 했더니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이 저에게 진흙을 이겨 발라 주셨을 때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눈은 떴으나 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에베소 1장에서 3장에 나타난 대로 우리를 위한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4장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4:1, “그러므로”를 넘었습니다. 엡4:1, “그러므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리하여 이제 구원받은 자답게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4장으로 왔으나 아직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받았으나 모든 일이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구원 이후는 쉽지 않습니다. 구원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원받은 다음,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은 자로 살 수 있을까? 바울은 4장 이후 계속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구원 이후, 4:1절, ‘그러므로“ 이후, 우리의 믿음의 삶을 다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 ‘버리고’란 단어와 ‘입으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마치 의복에 비유하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세상적인 삶을 살다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을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마구잡이로 살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세상의 옷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이가 사면이 됐습니다. 석방됐습니다. 죄수에서 자유인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제일 먼저 옷에서부터 변화가 있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옷을 바꿔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섰다면, 이제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철저한 변화'(radical change)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 인간 편에서 '회심'(conversion)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우리를 '재창조'(recreation)하시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지난 날 죄짓기 전에 아담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혁명이요,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마치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옛 사람은 벗어던지고 새 사람을 입는 것과 같다고 말씀 합니다.
1.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야 할 옛 사람의 옷은 도대체 어떤 옷입니까? 22절에 보면 이 옷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의 옷'입니다. 도무지 절제할 수 없는 욕심을 따라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옛날의 나쁜 습관으로 빠져드는 옷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옛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7-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했습니다.
6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허망하다 그랬어요. 목적을 상실합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허무하고 허망한 세상,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를 모르겠어요. 사업을 하나 결혼을 하나 목적이 없어요. 의미가 없어요. 허망함에 빠져듭니다. 그 다음에는 어두움이라 그랬습니다. 디아노이아라고 하는 말은 지성적 결여, 본문 말씀대로 총명이 흐려진다 그랬어요. 판단하는 능력, 총명이 흐려져서 어두워졌어요. 이성의 능력이 어두워졌어요. 그 다음에는 무지함이다 그랬어요. 아그노이안 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선악이 모호해집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지고 그랬습니다. 강퍅해지는 거요. 고집만 남아요.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를 못해요.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감각해진다 그랬어요. 이건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각능력 상실입니다. 무감각해요. 이제는 어떤 자극에도 감각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방임이라고 했습니다. 방임,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Give up, 포기상태입니다. 인간됨을 포기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지존파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들을 재판할 때 그 재판 판결문에 사형을, 사형을 선언하는 판결문에서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됨을 포기하였으므로 사형한다' 그랬어요.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인간들입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브레이크가 터져 나갔어요. 브레이크 터진 자동차, 속수무책입니다.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는 차는 자동차가 아니라 흉기입니다. 왜 이처럼 허망한 자리에 빠지고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지한 자리에 빠집니까? 왜 마음이 굳어져서 감각이 없는 암 같은 상태가 됩니까? 왜 소중한 인생이 더 이상 치료가 안 되는 포기 상태가 됩니까? 여기 진단이 나옵니다. 18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이 말씀을 받는 에베소 교인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정말 핍박과 조롱을 견디며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심령 속에 복음이 들어가니까 인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상 유혹이 그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손해가 나고 고난이 옵니다. 그러다 보니 구원받은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세상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주님께 드렸던 사람들입니다.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까?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 �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왜 이처럼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져 꺼진 불처럼 돼버렸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주님 닮기를 열망하던 우리의 시선은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지 못한 채 땅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십니까? 복음을 위해 죽으면 죽겠다는 헌신과 희생으로 불타던 모습은 온데 간데없고 다 타버린 잿더미처럼 싸늘하게 식어진 채 무력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사는 열정을 상실하고, 열정을 잃어버린 그 비참한 자신의 현실 자체를 직면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인생을 다 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굉장히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삽니다. 늘 만족이 없고 회개가 없고 남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그것이 신앙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데교회를 향해 주님이 이 말씀도 하셨습니다. 계3:1절에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나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주님은 돌직구를 날리시는 것입니다. ‘죽었다’라는 것입니다. 아니 나는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죽었다는 진단이 나온 것입니다. 여기 옛사람의 옷을 입고 이것을 벚지 못하는 것이 바로 타락이요. 신앙의 무너짐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강하게 명령합니다.
2. 새사람을 입으라
엡4:23-24,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문법적 형태는 미완료 현재형입니다. 이 말은 새롭게 되는 것은 어느 한 시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새롭게 되는 일이 한순간에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옷을 벗고 입는 것처럼 매일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옷을 입고 영원히 안 벗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아끼는 옷을 그대로 벗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옷은 매일 벗고 매일 입습니다. 아침에 입고 저녁에 벗습니다. 옷을 벗고 입는 것처럼 우리 영혼은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새로워집니다.
또한 ‘입으라’는 말은 수동태입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일은 내가 할 일이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그 일의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도와줘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군가 옷을 벗기고 입히는 것처럼 우리 영혼을 주관하는 분이 있고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따라 그렇게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핵심 단어는 23절에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입니다.
다같이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여기서 “심령”은 문자적으로 말하면 “마음에 있는 영”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하면 “spirit in the heart”, 마음속에 있는 성령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입니다. 이 분이 관건입니다. 단순히 우리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가 결심하고 다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어“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님을 좌지우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좌지우지한다는 뜻입니다.
23절에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말씀하실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마음은 그냥 그대로 두면 항상 부패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선이나 고기를 여름의 더운 날씨에 그냥 밖에 두면 금세 상하고 맙니다.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깁니다. 우리 마음이 꼭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냥 세상 유혹에 방치해 두면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부패하고 썩어져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 마음속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 개의 샘물 구멍이 있습니다. 하나는 썩은 물이 나오는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맑은 물이 나오는 구멍입니다. 하나는 옛 성품이 흘러나오는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구멍입니다. 그런데 두 개의 구멍 가운데 성령의 구멍을 막아놓고 썩은 구멍만이 열려져 있으면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생명수 샘물이 흘러나오는 구멍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심한 악취가 풍겨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썩은 물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 한 번에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순간 순간마다 그 구멍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훈련’이라 그렇게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영적인 훈련을 하기 위해서 고전 15:31절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옛사람의 성품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썩은 물이 나는 구멍을 날마다 막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안에서 새롭게 변해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구멍을 통하여 맑은 물, 세상을 살 맛 나게 만들어 주는 단맛을 내는 물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옛사람에 지배받는 사람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지 않습니다.
3. 이제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바로 성령의 간섭과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30절 보시겠습니까?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성령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합니다. 첫째는 영원히 계십니다.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최후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성령님은 역사합니다. 두 번째는 근심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십니다. 때로 근심하여 기도하고 위로하고 깨닫게 합니다. 세 번째는 “그 안에서”,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요14:17,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이 삶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내 경험이나 내 의지가 작동하면 내 마음에서 썩은 물이 나옵니다. 늘 성령 충만해야 그 은혜 앞에 겸손하고 세상 앞에 담대하게 살 수 있고, 우리의 시선을 항상 하나님께 고정 시킬 수가 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유명한 발레극 <백조의 호수>에 보면 여성 발레리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발레 기술인 ‘32회전 푸에테’가 나옵니다. 가냘픈 몸매의 여성 발레리나가 한 다리로 발끝을 들고서 몸을 지탱하면서, 또 다른 한 다리를 높이 들고는 지탱한 다리 주위를 휘저으며 32회전하는 동작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과 찬사가 절로 나옵니다. ‘어떻게 서른두 바퀴를 돌면서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고난도의 기술을 소화해내는 것도 감탄스럽지만 32회전을 하면서도 몸의 균형을 잃지 않은 균형 감각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발레리나가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에 대한 어느 분의 설명을 듣고서 머리가 끄덕여졌습니다. 발레리나가 회전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중앙에 있는 관객 한 명을 골라 그를 응시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몸이 회전할 때 손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신체가 돌아갈 때 얼굴은 끝까지 그 사람을 응시하다 제일 마지막에 돌리고, 다시 몸과 손이 움직이기 전에 머리를 먼저 돌려 다시 그 사람을 응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32회전을 하는 내내 중앙에 있는 그 ‘한 사람’만 응시하는 것이 넘어지지 않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구원, 그 이후에 나의 삶은 날마다 끊임없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옛사람, 그거 아직도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그 옷 빨리 벗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세마포, 정결한 옷으로 신부 단장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22절과 24절을 다시 한 번 주목해서 보십시오. 헌 옷과 새 옷이 아주 극명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벗어 던져야만 할 옷은 옛 사람의 옷입니다. 과거에 아직도 하나님을 모를 때 세상에서 내 멋대로 살았던 육신의 옷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옛 사람의 옷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옷'입니다. 이 옷은 반드시 벗어 던져야만 합니다! 정반대로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새 사람의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성령을 따라 사는 새 생활의 옷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 옷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옷'입니다. 이 옷은 반드시 입어야만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옷을 입고 계십니까? 옛 사람의 옷입니까? 새 사람의 옷입니까? 낡고 더러운 옷을 입으신 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벗어 던지십시오! 그리고 이제 우리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태신자를 세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한사람이 건강하게 세워질 때,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새롭고 깨끗한 옷을 입고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