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가운데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말을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라는 장군은 갈리아 지역 총독으로서 켈트족과 8년 전쟁을 치러 마침내 갈리아 지역을 로마의 영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당시 로마가 정복한 땅 중에 갈리아보다 넓은 곳은 없었기 때문에 시저는 전쟁 영웅으로 로마 시민의 인기를 한 몸에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원로들은 시저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시저와 그의 부하들에게 로마로 귀환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로마로 들어올 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시저가 로마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갈리아 지역과 로마의 경계인 루비콘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반드시 무기를 다 버리고 비무장 상태로 강을 건너와야 하고, 만약 무장을 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시저는 8년간 충성을 다하며 자기를 따른 병사들을 이끌고 루비콘 강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반역죄’ 때문에 강 건너기를 망설였습니다. 그러자 시저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병사들은 시저의 이 말에 마음을 정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여 로마 군대를 격퇴시켰고, 결국 시저는 로마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말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도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왔습니다. 무슨 루비콘 강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 시간 좌우에 게신 분들과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자꾸 건넜던 강을 되돌아 갈려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1-3장까지는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혈통으로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두 가지 변화를 갖게 됩니다. 하나는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수준의 변화입니다. 신분의 변화는 즉각적이지만, 수준의 변화는 성도마다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말 그의 삶 속에서 예수 향기를 발하는 근사한 신앙의 모습을 갖고 사는 분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옛사람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출애굽은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데는 40년이 걸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해방은 순간이지만, 노예근성을 버리는 데는 40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겉 사람의 변화는 쉽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변화, 의식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노예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무사히 편하게, 잘 먹고 잘 살자 입니다. 그러다보니 책임성도 없고 공동체성도 없는 것이 노예근성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노예의 특징은 항상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드림이 없습니다.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노예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것을 훈련시킴으로 노예근성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없는 사람은 한번 생기면 그 애착이 대단합니다.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거룩하여진 성도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바울은 지난 4장에 이어 오늘 5장에서도 계속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3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거룩한 성도가 된 자들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여기서 본받는 자란 뜻의 헬라어 ’미메테스‘는 ‘따라하다’, ‘모방하다’, ‘흉내 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을 따라하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조직신학을 가르치던 차영배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네덜란드에서 유학할 때, 네덜란드의 유명한 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 교수 밑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바빙크 교수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강단에서 강의할 때마다 바빙크 교수의 말을 인용합니다. 바빙크 교수가 좋아하던 취미를 따라하고, 바빙크 교수가 좋아하던 음악을 듣곤 했답니다. 우리가 시험을 치룰 때, 바빙크 교수의 논지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면 여지없이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차교수님을 차빙크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저렇게 따라하게 되는구나....’ 좋아하면 따라하게 되어있습니다. 더 좋아하면 그 사람과 비슷해지는 것 아십니까?
부부가 살아가면서 비슷해지는 지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을 따라 하기 때문입니다. 음식도 따라 먹게 되고, 말하는 표현도 따라하게 되고, 살아가면서 습관 마저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이가 들면서 부부의 얼굴의 인상도 비슷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사랑이 너무도 크고 놀랍기에 그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그 사람에 감복하며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좋아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성품을 따라하게 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한 표현은 흉내를 내보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어떻게 우리가 그 사랑과 자비를 완전히 본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지만, 자꾸 흉내라도 내볼려고 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속에 잊혀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 하나님의 형상이 다 심겨져 있습니다.
이 형상은 바로 하나님을 본 받는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하나씩< /span>, 둘씩 내 마음의 굳은살과 교만과 죄 된 본성들이 양파껍질이 벗겨지듯이 우리의 말속에, 우리의 표정 속에, 우리의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대해 주님은 요8:12절에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본받는 자에게는 생명의 빛이 비춰집니다. 생명의 능력의 그의 삶을 주관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분들의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얼굴이 예전과 다릅니다. 언어가 바뀝니다.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삶을 보십시오. 세상의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없는 열정과 감격이 있습니다. 분명한 목표와 삶의 가치를 가지고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2.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성도가 된 자들은 그 사랑을 삶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들이실 수 없었습니다. 이에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사와 피를 통해 죄를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린 다음에야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버리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생축과 제물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렇다면 이 사랑을 알았다면 이제 내 삶 속에 그 사랑을 표현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진짜 사랑에 부딪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됩니다. 짝퉁 사랑, 병든 사랑, 함량 부족의 사랑으로 지친 영혼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늘 배고픈 허기진 마음에 안식이 찾아옵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녹아지는 경험이 일어나면 봉사하라 마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라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누가 나를 사랑하니 하지 않니 원망하고 시비하던 것도 다 사라집니다. 내 삶이 변합니다. 이 사랑에 빠지면 주일이 기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연애편지 같고, 내 안의 미움도 내 힘으로는 없앨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내 가슴에 밀려오면 그 미움, 증오, 짜증도 전부 사라집니다. 이젠 누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늘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읽은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두 재벌 회장의 죽음을 앞둔 모습을 비교해 놓았습니다. 하나는 A재벌의 운명의 모습입니다. 운명을 눈앞에 둔 재벌의 병원풍경을 스케치했습니다. A재벌이 의식이 오락가락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의식이 잠시 돌아오면 녹음기를 들고 우르르 몰려와서 아버지 입에 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누굴 후계자로 뽑을지 유산분할은 어떻게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리고 연예인 H씨가 병문안을 올까봐 모든 자녀들이 긴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재벌이 그 연예인을 좋아했는데 정신이 돌아온 그 시간에 혹시 면회를 오게 되면 “얘들아 골프장은 H씨에게 주라”고 할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주치의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재벌이 불쌍해서 혼났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재벌 B씨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재벌은 자신의 죽음을 위하여 삶을 조용히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을 한명씩 불러서 그동안 참 고마웠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아들에게 3천만원을 가져오라고 해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평소 다니던 이발소에 찾아가 그동안 고마웠다고 봉투 하나를 주었고 평소 잘 다니던 음식점을 찾아가 주인과 종업원들에게 봉투 하나씩 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의 장례식날 가장 많이 울어준 사람들이 그 이발사, 음식점 종업원, 양복점 주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일은 대단한 것도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나의 조그만 관심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따뜻한 대화 한마디 나누는 것입니다. 또한 열린 마음으로 상대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나눔이고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나의 필요를 조금 축소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외모를 보지 말고 상대방의 상한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동입니다. 오늘은 가는 곳마다 시끄럽습니다. 갈등이 난무하고 불화와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이웃에서도 어디서나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전제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랑을 받았으니 너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살아도 진짜 사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만나면 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이 펄펄 뛸 것입니다. 인생이 새롭게 시작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바로 이 사랑을 갈망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 앞에 잠잠히 나아가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물밀 듯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본받아 거룩한 성도가 된 자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3-7절을 보세요. 특별히 3-4절을 보면 여러 기지 죄악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밀을 하라.” 여섯 가지 죄가 나오지만 성경학자들은 이 모든 죄가 한 가지 죄를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성적인 죄입니다. 특히 3절의 “음행”이라든지 “더러운 것” “탐욕”은 쉽게 말해 결혼생활 이외에 갖는 모든 성행위를 말합니다.
4절부터는 말에 대한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이 말들은 원어로 보면 모두 성적인 말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성희롱’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잘못된 관계 속에서 성행위를 갖기 원하는 마음으로 치근덕거리는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언급한 누추한 말이고, 어리석은 말이며, 희롱의 말입니다. 이 모두가 음행을 자극하는 잘못된 말들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왜냐하면 5절에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로 ‘거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 중에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내용들이 너무 많이 담겨있다는 우려의 소리들이 높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조차도 음란하고 외설적인 영상이나 글들을 너무나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조차 갖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원인에는 어른들의 잘못이 있습니다. 요즘은 하도 사건, 사고가 많은 시대에 살아갑니다만, 얼마 전 충격적인 사건을 뉴스를 통해서 들으셨을 것입니다. 남편과 아이까지 있는 30대 유부녀인 초등학교 여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초등학교 남학생을 꼬드겨서 성관계를 가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인 사고를 가지고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갈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음란한 문화가 판을 치는 사회로 변질되어 갈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아이들이 사용하는 말들 가운데 욕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욕이 들어가지 않으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가 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자주 보지 못해서 그렇지 영화를 참 좋아하는데, 영화 보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는 배우들이 욕을 너무 많이 사용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매스껍다고 느껴질 정도로 욕이 난무합니다. 영화가 우리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 시대의 언어에서 욕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큽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댓글을 읽다보면 역시 욕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투로 쓴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문화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욕에 노출되고 욕을 습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요즘 우리의 아픔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요즘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 문제입니다. 지금 정부가 소위 인권이라는 이름하에 성경에서 죄라고 규정되고 있는 동성애를 ‘성소수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화려한 미사여구로 둔갑되어 동성애가 확산되고, 동성애를 포용하려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으면 마치 편협한 사고를 가진 사람처럼 취급되고 있습니다.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되어 간통죄가 사라지고, 군대 내 동성애 처벌법인 군형법 92조의 6항을 폐지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물론 소수 약자의 인권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윤리에 어긋나는 것까지도 보호해 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그렇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그것은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인도 사람들에게 그는 가히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자서전이 400권이 넘습니다. 그의 어록만도 80권이 넘습니다. 1948년 1월, 그가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 명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 명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고 한다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이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 그리고 이 어둠에 사로 잡혀가는 이 문화를 위해 기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