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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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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16 빛 가운데 행하라 ⑭ (엡 5:8-1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09-16 | 조회: 936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이 세상이 얼마나 썩었고, 얼마나 어두운가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영적으로 썩어 냄새나는 곳인가, 또 얼마나 캄캄하고 어두운 곳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눈에 그렇다면 예수님의 눈에는 오죽하겠습니까? 캄캄한 세상을 앞에 놓고, 또 썩어 냄새나는 세상을 앞에 놓고 마5:13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여기에 너희라는 말은 굉장한 강조형입니다. 이 말은 너희만이 세상의 소금이야,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아무리 세상이 썩고 어두워도 나는 너희만을 믿어. 왜냐하면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만 믿어.’ 하는 의미가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빛이 하는 기능이 무엇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빛은 어둠을 밝히는 작용을 합니다. 우리는 한밤중이라고 할지라도 전깃불이 있기에 대낮처럼 생활할 수 있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만듭니다. 생명과 희망을 줍니다. 탄광에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는 광부들에게 빛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빛은 언제나 우리에게 생명과 활기와 희망을 줍니다. 바다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항해사에게 등대는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 됩니다.

 

 

19절은 예수님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요 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세상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그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이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그리고 뭐라고 명령하십니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이는 정말 엄청난 명령이요, 선포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캄캄하고 썩어 냄새나는 세상이라고 하는 괴물 앞에 우리 자신을 놓고 보면 얼마나 초라해 보입니까? 얼마나 작아 보입니까? 무슨 빛을 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조용히 내려다보시면서 나는 너희만 믿어. 왜냐하면 너희는 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야. 너희마저 없다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 절망이야.’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니 한편으로는 부담도 되고, 한편으로는 주님의 우리를 너무 잘 봐 주심에 대해서 감격도 하고 긍지도 갖게 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는 명령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문법적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명령이 현재형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일생에 단 한 번 빛 가운데 행하고 말 것이 아니라,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습관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라는 표현을 묵상해 보기 바랍니다. 여기 자녀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친밀함입니다. 세상에 부모와 자녀만큼 친밀한 관계는 없습니다. 그럼 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를 연결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석을 어떻게 볼 수 있나요? 과학적인 원리로 우리가 보석을 보석으로 보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보석이 고유한 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주는 진주의 빛을 내고, 수정은 수정의 빛을 내며,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의 빛을 발합니다. 우리는 빛을 보고 각각의 보석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에게 빛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빛이었나요? 다른 모든 사람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 하나님은 저런 분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까?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빛 가운데 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선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행하기 위해서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5:9) 세 가지가 나옵니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첫째는 착함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소수네'는 영어로 ‘Good, Nice', 즉 선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를 연관시키면 착함과 선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빛의 열매를 맺는 한 방법입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소개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에서 등장하는 양선이 지극히 선함, 바로 이 아가소수네'라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이 단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의미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5, 10년이 되었음에도 우리 안에 선함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선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악착같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절대 손해 보지 않고, 어디 가서도 챙길 것을 다 챙기는 것은 빛의 열매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고 있는지 판별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착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손해 보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양보하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조금 바보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빛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둘째, “의로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은혜로 받은 하나님의 의'를 뜻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더럽고 추한 우리, 늘 구정물과 진흙탕에서만 놀던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깨끗한 몸과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자는 더 이상 구정물이나 진흙탕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새롭게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몸을 통해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빛은 우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빛이 아닙니다. 이 빛은 바로 하나님의 빛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의의 옷을 입는 순간부터 빛이 발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구원받았다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내 말과 행동, 마음 씀씀이와 인간관계, 사업과 모든 행동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진실함입니다. 이것은 거짓 행동과 반대되는 올바른 행동을 의미합니다. 거짓말이나 거짓된 행동, 남을 속이는 그 어떤 것도 우리는 벗어야 합니다.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빛의 자녀처럼 행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삶에서 이러한 열매들이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야 비로소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시험하다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분간하다”, “아주 자세하게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분간하고 무엇을 조사해서 시험해 보아야 할까요?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삶에 빛의 열매가 있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아닌지를 자세하게 조사해 알아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대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고, 수요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드렸으니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 삶에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빛의 열매가 있는가 스스로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물질의 사용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내 속에 정말 있는가? 내 안이 더러움으로 가득 찬 채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입히고, 거짓말하고 속이면서 그저 주일날 외서 예배만 드리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삶에서 주를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자세히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 우리가 빛의 자녀로 행하기 위해서는 어두움의 일들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11절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책망하다라는 단어는 지적하라, 비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책망하라를 뜻하는 헬라어 알렉세스테는 진짜 좋은 것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누군가의 허물과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 즉시 달려가 지적하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도 성격인 것 같습니다. 참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전혀 빛을 발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빛을 발하는 성도는 그 형제와 이웃이 잘못을 행하고 있을 때, 당장 달려가서 지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저들이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참된 것 바른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절망의 자리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은 다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고기잡으로 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누구 한 사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뿐이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들이라면 이 최후의 극적인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지, 우리 각자 이 상황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었으며, 나의 마지막 진액이 다하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던 나의 수하들이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나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신이 내게 안겨 준 것은 처참하면서도 고독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배신자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배신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내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라면,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후회할망정 일단 배신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부터 휘두르고 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려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인 채 다시는 인간답잖게 배신자가 되지 말 것을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거나 배신의 원인을 규명하시려거나 훈계하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게 단지 이렇게 물으셨을 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따지거나 훈계를 한다고 해서 다시 배신치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기회만 닿으면 몇 번이고 다시 배신하는 법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주님은 마5:16절에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여기서 주님은 저들의 죄를 지적하라, 책망하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특히 나와 가까이 형제와 이웃의 죄와 잘못을 발견했을 때는 우리의 빛 된 행실, 곧 빛을 발하는 삶을 보여 줌으로, 저들의 죄와 잘못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고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로까지 나아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 우리가 빛의 자녀답게 행하려면 영적인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5:14). 하나님이 당신에게 잠자는 자여라고 하신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충실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 이런 책망을 들었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요나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 멀리 도망가던 도중 배 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선장을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라. 일어나 구하라.” 여기서 말하는 잠은 육체적인 잠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그것은 영적인 잠, 사망의 잠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함으로 삶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던 사람이 경건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망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헛되게 살았는데 이제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전에 어두움의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선 주저 앉아있는 사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5:1-9에 보면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있는 38년 된 병자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영적 어두움 가운데 사로잡혀 오랜 세월 절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오랜 세월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라고 포기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늘도 명령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렇습니다. 오랜 세월 희망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분들이 있습니까?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졸고 있는 사람들 나아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사명을 받았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세월만 보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그렇습니다. 전도하기로 서원했으면 금년에는 꼭 실천하십시오.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 /span>성경 읽기로 작심했으면 금년에는 꼭 실천하십시오.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 미루지 말고 금년에는 꼭 지키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는 명령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일생에 단 한 번 빛 가운데 행하고 말 것이 아니라,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꺼져 가는 등불처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사명 감당하지 못할 때, 촛대를 옮긴다고 했습니다. - 촛대 등잔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들어 온 메사츄세츠의 플리머스라는 항구였습니다. 이곳은 1620년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을 향햐 떠났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처음 도착한 장소입니다. 66일간의 길고도 험난한 여행을 마치고 이곳에 도착과 동시에 이 땅의 이름을 자신들이 살았던 고향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고 지었습니다. 이들이 이곳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도시가 바로 보스톤입니다.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이 있고 세계적 공대인 M.I.T 공대등 신앙적 기반을 둔 유수한 교육기관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청교도들의 신앙의 자취가 묻어있는 열정과 순수함이 베여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보스톤이 4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청교도들의 신앙의 산실이라 불리웠던 메사츄세츠는 지금 미국에서 동성 연애를 가장 먼저 합법화시킨 주가 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것은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과서에는 어리적부터 동성연애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저들의 인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정신에 의해 세워졌던 모든 학교들이 기독교 정신을 수호하지 못하고 공식 과목이었던 성경과목과 교실 내의 기도의 시간은 모두가 금지 되었으며 법정에 세워졌던 십계명들도 모두 철거되었습니다. 또한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셀럼이라는 도시는 한 불락 전체가 사탄을 숭배하는 심령사들의 거리로 변했습니다. 해마다 10/31일 할로원만 되면 이곳은 미 전역과 전 세계 각국에서 축제 한마당을 벌이러 모여든 마녀들의 집합장소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시작하였던 청교도들의 땅이 지금 하나같이 세속의 땅으로 바뀐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점점 그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한국 교회는 점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짐이 되고 점점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교회가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 그들을 찾아 따뜻한 손길을 펼쳐야 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사랑의 빛을 비춰야 하겠습니다. 우리 동성교회는 앞으로 이 세상을 향해 더욱 사랑의 빛을 비추어야 하겠습니다. 이러기 위해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므로 목자 없는 양 같은 이 땅의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따뜻한 사람의 손길을 펼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난 49년 전에 이곳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49년 동안 은혜로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여기 교회를 세우신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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