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 잡지사에서 '한국사회 불안감 조사'라는 제목 아래 "당신은 불안을 느낍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많이 느낀다"고 대답한 사람이 73%, "조금 느낍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20%가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열에 아홉은 다 불안을 안고 산다는 말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 가운데서 80% 이상의 사람들이 "작년보다 금년이 더 불안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 지수가 더 높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게 불안을 느낍니까?"라는 질문에는, 경제가 점점 나빠지지 않을까, 잦은 구조조정으로 해고가 계속되면 직장을 잃지 않을까, 건강이 잘못되지 않을까 등 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불안의 요인으로 꼽은 것은 교통사고였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20대, 30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데가 점집이라고 합니다. 점을 치는 운세 문화는 사회가 불안할수록 점점 번창하고 퍼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불안하니까 점집에 가서 뭔가 기분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안이 짙게 깔려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을 잊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한군데 몰입하는 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우리나라를 중독 공화국이라고 합니다. 도박 공화국이라 합니다. 일주일 내내 경마와 경륜과 경정이 열립니다. 미사리에 보세요. 주차장에 발을 디딜 틈이 없을 만큼 차들이 서 있는데 조정 경기를 보러 온 것이 아닙니다. 또 술 공화국입니다. 세계 술 소비국가 15개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가 11위입니다. 엄청나게 마십니다. 아시아에서는 술 소비량 1위입니다. 20세 이상 성인이 지난 1년간 마신 맥주가 226병, 소주가 147병입니다. 술 취해서 산다는 것은 그 이면에 엄청난 공허함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본문은 비록 짧은 절이지만 많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 ‘술 취하지 말라’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사실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인 1세기에 주신(酒神)인 디오니소스(Dionysus)를 섬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포도주를 마시는 '주신제'(酒神祭)를 자주 열어서 잔뜩 취한 상태에서 황홀경으로 빠져드는 타락의 축제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누가 바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와 같은 주신제를 방탕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대신에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문장은 현재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에 관해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 가운데 현재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곳은 바로 이 구절과 엡4:30절에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라는 두 군데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하면 한번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성령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합니다. 성령 세례, 성령의 내주하심, 성령의 인치심과 성령과 관련된 많은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성령 세례, 성령의 내주하심, 성령의 인치심을 받으라고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다 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일들은 평생에 단 한 번만 일어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성령이 나를 찾아오셔서 나에게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서 거하십니다. 한 번 들어오신 성령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할 때, 성령이 나에게 오셔서 인치십니다. 그 인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성령 충만이 명령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성령충만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받아야 합니다. 지금 보세요. 이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점령지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마귀와 사탄과 악령을 일컬어 '세상의 신'이라고 요한복음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지 30-40년이 지난 후에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사탄을 일컬어 '이 세상 신', '이 세상 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승리하셨지만 아직 사탄은 병도 안 걸렸습니다. 드러누워서 앓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전히 원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무서운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아직 전쟁 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탄의 세력이 비등해서 서로 파워 게임을 하는 전쟁은 아닙니다. 이것은 일종의 내란입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들어와서 내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초강대국인 미국에 몇 명의 테러범들이 들어와 미국 전체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불러 일으키며 혼란을 일으킨 것처럼, 오늘날 사탄은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큰 우주 속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내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세력을 확보하고 자기가 지배하는 백성들을 여전히 늘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에게 지배당하고, 점령당한 지역들이 우리 주변이나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큰 세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흩뜨려놓아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설령 들었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깨달았다 해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꽉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점령하는 지역입니다. 이런 사탄의 점령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나의 모습은 정말 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보아도 신통치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을 보아도 악하고 무서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도무지 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주님께서는 분명히 명령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난제를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 같은 별수 없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key가 성령입니다. 이 악한 세상을 다룰 수 있는 열쇠가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는 강해집니다. 얼마만큼 강해집니까? 예수님만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도 우리 앞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성령이 key입니다.
여기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이 문장이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는데, 많은 성도가 성령을 내가 가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령충만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체는 성령입니다. 내가 성령을 가져와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체가 되셔서 나에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층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라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을 하면 성령의 길들임을 받는 다는 표현으로 쓸 수가 있습니다. 성령층만은 내가 성령께 길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혀, 눈, 생각, 손과 발, 가치관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시도록 내 생활의 영역을 열어두는 것, 내가 그분께 길들여지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렇게 성령님께 매일 지배를 받고, 성령님께 길들임을 받을 때에 우리의 삶은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성령에 길들여진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시간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내게 그런 능력이나 지식이 없어서 못하기도 하고, 사회적인 지위나 환경이 뒷받침 되어주지 못해서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 앞에 살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자리 어떤 상황 앞에서도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갈5:16절에 보면 ‘성령을 따라 살아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를 위해서 사는 것일 뿐,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은 곧 내 마음대로 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육체의 열매만 맺게 되는 것입니다. 갈5:17절에서 말씀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육체의 소욕대로 살 것이냐?’ 만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거부할 수 있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님께 길들여지고, 지배를 받고,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따라와야 할 삶의 결과를 네 가지로 언급합니다. 19-21절이 18절 말씀에 종속됩니다.
1. 성령 충만할 때, 내 삶속에 찬양이 마르지 않습니다.
19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여기에 씌어진 "---화답하며, 노래하며, 찬송하며" 라는 단어들은 모두 현재분사로 되어있어서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찬송을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양하게 되고, 찬양하면 성령충만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도 성령에 충만하지 않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서 찬양이 고갈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찬양이 샘솟습니다. 가장 위대한 찬송작가들은 시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개혁자 말틴 루터는 여러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나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기도했다. 그때마다 주께서는 내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개 찬송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384장)"--루터가 작시, 작곡한 찬송이지요. 요한 웨슬레 형제도 수없이 많은 찬송을 남겼습니다. 찬송은 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찬송을 바쁜 중에 남길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말씀을 읽은 후 찬양시로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찬송가에 가장 많은 실려 있는 찬송시는 패니 크로스비라는 시각장애인의 찬송들입니다. 무려 8,000곡 이상을 남길 수 있었던 그녀는 "나의 기도가 나의 찬송'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찬송이 나와요.
이차대전 후 독일의 한 간호원이 혀암으로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도 열심히 하고 성령 충만했던 이 여인은 의사가 수술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고 묻자, 이 여인은 그동안 말할 수 있었던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한 후 조용히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그리고 그녀는 이어 이후 "제가 입으로 찬송 못하지만 전 마음으로 찬송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답니다. 이것이 바로 찬송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2. 감사하는 삶입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 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부부가 정신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좀 누릴만하니까,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 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공평하신 하나님이/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외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믿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합니다. 불평은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의 모습입니다.
3.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게 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서로 양보하게 됩니다. 사소한 일로 싸우지 않습니다. 그것이 성령층만의 증거 입니다. 복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불순종의 영, 저항의 영, 누구에게도 지배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자기 고집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복종하고 섬기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을 부리기 좋아합니다. 권세 갖기를,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곳에 어떻게 해서든지 올라가 다른 사람을 통치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십시오. 주님은 제자들과 식사 하시던 자리에서 친히 내려오셔서 세숫대야를 놓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바로 종이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종처럼 섬기며 살았던 예수님을 하나님은 얼마나 높이셨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한 것처럼 너희들도 이렇게 하여야 하리라” 주님은 복음을 섬김이라는 그릇 속에 담기 원하셨습니다. 섬김이 없는 곳에는 복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섬김은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오늘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을까?’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눈, 상대방의 영혼과 내면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야 됩니다. 그 후에 우리 손을 뻗어 행동으로 옮길 때 ‘섬김’이 됩니다. 피차 복종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것은 명백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의 능력으로만 되는 줄 알고, 철저하게 성령님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이 성령의 충만한 인도하심을 계속 받으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