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두 남녀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비의 연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많은 가정들이 이 신비한 연합의 가정에서 기쁨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그 가정이 아픔과 고통의 현장이 되 버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상적인 배우자를 기대만 했을 뿐, 자신이 그런 배우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앞둔 많은 젊은 남녀들이 일생에 한 번 뿐인 결혼식을 위해서는 그렇게도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들여 준비하지만, 정작 그 결혼식 이후에 있을 결혼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결혼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결혼 이후의 삶입니다.
자! 결혼은 무엇일까요? 행복입니다. 오랜 외로움을 청산하고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행복과 기쁨의 산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결혼은 불행입니다. 어쩌다가 만나서 매일 다투며 함께 살아야 하는, 끊거나 탈출할 수도 없는 불행의 감옥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부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합니다. 혼자 있는 것보다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며 살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행복하려고 결혼한 부부나 가정에 기대하는 것과 같은 행복이 늘 함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부부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라서기도 하고, 어떤 부부는 자식들을 다 키우고 난 후에 갈라서는 ‘황혼이혼’을 불사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부부지만, 졸혼을 결심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하여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그 삶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사랑하기에 결혼하여 함께 살던 부부가 왜 같이 사는 것보다 헤어져 홀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까지 갈라서려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지금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통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 안에서 부부관계, 결혼의 신비를 바울은 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문제를 단순히 두 사람의 문제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잘 들여다보면 바로 부부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Ⅰ. 먼저,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2-2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여기 ‘복종’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타스’라는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상대의 군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에 충실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내들이 남편에 복종한다는 것은 남편의 협박이나 강요 때문에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발적으로 가정의 질서를 위해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23절을 보십시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아내는 어떠한 경우에도 남편의 머리됨의 기능을 인정하고, 그 위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연구하는 기관에서 100명의 남자들에게 아내들에 대한 불만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남자의 불만 1위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내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남편으로서 존중해 주지 않는 것이 남자들의 불만 1위였습니다. 또한 남자가 아내감으로 가장 선호하는 여자는 자기를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남자로 존중해 주는 여자였습니다. 남자는 세상에서 무시를 많이 당합니다. 직장에서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정에 돌아왔을 때, 아내가 자기를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이에요”라고 존중해주기만 하면 그 여자를 마음으로부터 가장 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사랑받는 아내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남편을 세상에서 제일가는 남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아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존경할 만해야 존경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위치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왜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까? 남편이 돈을 잘 벌기 때문에, 남편이 너무나 남편 노릇을 잘하기 때문에, 남편이 사회에서 훌륭하기 때문에 남편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나의 남편으로 주셨기 때문에 존경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내는 훌륭함과 훌륭하지 않음에 상관없이 남편을 존경하고, 그를 자기의 머리로 인정해야 합니다.
고전1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하나님은 어떤 영역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범사에”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모든 일에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를 항상 존중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키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결코 쉬운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남편을 대할 때, 남편만 보지 말고 남편의 머리되시는 주님을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남편 모습만 바라보지 밀고, 그가 약간 부족하더라도 그 부족한 남편을 통해 가정을 이끄시고 내 인격을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편만이 아니라 그 남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때, 범사에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너무나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 예를 극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믿음의 조상이니까 당연히 실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와는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 가정의 일로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사라의 미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습니까? 현대사회의 남편 점수로 매겨 보아도 아브라함은 50점도 못 되는 남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어 떤 부부가 IMF도 겪고 경기가 좋지 않아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아내가 너무 예뻤습니다. 남자들이 눈을 크게 뜰만큼 예쁜데, 하루는 조폭 두목이 다가 외서 ‘‘야, 이 여자 누구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럴 때 보통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달려드는 척이라도 해야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남편이 잔머리를 굴려서 누이동생이라고 말합니다. 그 대답을 들은 조폭이 “그럼, 나와 결혼해도 되겠네”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럼요” 하고는 자신의 아내를 조폭에게 줘 버립니다.
이 남편이 용서가 됩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일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사라는 결혼하고 아이를 못 낳았습니다. 그것을 다 자신의 죄인 것처럼 미안해하면서 사라는 인사치레로 아브라함에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아들을 못 낳으니 여기 내 여종 하갈이리도 취해서 지식을 보시지요.” 그러면 남자가 안 된다고,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날 밤 바로 하갈과 동침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이스마엘로 인해 나중에 가족관계가 얼마나 복잡해졌습니까? 사라가 여자로서, 아내로서 받은 그 상처를 어떻게 지울 수 있겠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이 귀한 이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이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사라가 그 아들을 얼마나 아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어느 날 그 아들을 제물로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적어도 사라를 아내로 생각했다면 상의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여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제대로 들은 걸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날 바로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갔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셨기에 망정이지, 칼을 들어서 그 귀한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만약 그것을 사라가 알았다면 아브라함과 살려고 했을까요? 제가 여자라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열 번도 더 찍었을 겁니다. - 아브라함은 요즘으로 말하면 부인을 하대하고 자기의 고집으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가정적이지 못한 사람입니다. 실수를 많이 하고 남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많이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 었습니까? 아내 사라가 없었다면 가능했겠습니까?
저는 어릴 때 참 힘든 가정에서 성장을 했습니다. 이미 두 분 다 고인이 되셨지만, 우리 아버지의 주벽은 온 동네가 다 알 정도입니다. 술만 드시면 어머니를 개패 듯 때림, 온 동네가 구경이라도 난 듯 그렇게 어머니를 심하게 대하셨습니다. 저는 학교 끝나고 늘 두려운게 하나 있었는데 집에 가까이 올 때 또 어머니를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 그래도 어머니는 우리 두 남매를 잘 키우셨습니다. 아마 우리가 아니면 열 번이라도 이혼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저희를 키울 때, 가정이 무너질 까봐 무조건 참고 견디셨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생각합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향해 “주”라고 칭했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라가 아브라함만 바라보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어떻게 믿음의 가정이 된 줄 아십니까? 그것은 아브라함 혼자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는 사라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라는 자기 남편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현재 모습만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부족한 게 많지만 언젠 가 그를 가장 좋은 남편으로 만들어 주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바라본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남편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그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아내들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내들은 범사에 남편을 자신의 머리로 인정해야 합니다.
Ⅱ.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하나 되어 살아가려면 무엇보다 남편의 아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아내를 향한 교훈과 남편을 향한 교훈이 동시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시면 바울사도는 아내에게 보다 훨씬 더 많은 지면을 남편에게 할애하고 있습니다.(25절 이하에서 33절까지) 부부관계의 온전한 연합을 깨트리는 쪽이 아내라기보다 남편이기 때문입니다. 남편들의 아내사랑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사랑의 방법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28절에 보면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할지니”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몸을 사랑합니까? 몸을 사랑하려면 몸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에 필요에 민감하지 못하면 무의식속에 몸을 학대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스스로 자기가 아내를 학대하고 있다고 생각치 않지만 아내들은 남편에 의해 학대당하고 느끼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들이 아내의 정서적인 필요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자기주장으로 아내를 이끌어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시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가치감을 존중함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3:7에서 “남편된 자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자로 알아 더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남편이나 아내가 다 그릇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다 깨지기 쉬운 그릇 상처받기 쉬운 그릇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아내들은 더 그렇다(더 깨지기 쉬운 그릇)는 말입니다. 정서적인 감수성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수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남편들의 무례함으로 아내들이 상처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 사랑의 시작은 이런 아내의 마음을 보호하려는 배려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귀히 여기라’는 말을 ‘보석처럼’ 여기라는 말로 번역한 학자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사도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사랑의 단어를 헬라어로 아가파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인간을 향해 보여주신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육체적인 매력 때문에 일어나는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우정을 뜻하는 필리아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이 사랑은 연민이나 궁휼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스토르게의 사랑도 아닙니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은 죽는 사랑입니다. 아내를 위하여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격이 죽어야 합니다. 거친 태도가 죽어야 합니다. 자존심이 죽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친밀감’이라는 책에서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세 가지의 특성으로 묘사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진실함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거짓이나 꾸밈이 없어야 합니다. 투명한 유리처럼 모든 것에 진실해야 합니다. 두 번째 특징은 부드러움입니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탈취하거나 움켜 쥐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무장해제입니다. 사랑이란 상대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약점과 부끄러움까지도 내보이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무장해제를 당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 보이셨습니다. 온몸이 찢기시며, 조롱당하시며,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이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삶의 회복과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꿈과 목표가 생겼습니다. 이제 부부도 남편은 아내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육체와 마음과 생각까지 다 열어놓고 서로를 섬길 때 남편과 아내에게 허락하신 연합의 신비와 은총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아내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고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던 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능력이 무척 뛰어났고 크게 인정받았던 이 남편이 IMF 경제 위기를 만나 조기 퇴직 대상이 되어서 하루 아침에 직정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존심이 깨어질대로 깨어진 그는 누구 앞에서도 자신의 무너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매일 양복을 입고 나섰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하루 종일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들어오는 것이 그의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여러 달을 반복해야하는 자신의 이 모습 앞에 그 남편은 드디어 견딜 수 없는 마음에 어느 날밤에 갑자기 집에 들어와 아내 앞에서 흐느끼며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이후 남편은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아내에게 처음으로 토로했습니다.
이 상황 앞에 아내는 뜻밖에도 실직한 남편에 대하여 놀라거나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따뜻하게 남편을 품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보 결혼 30년만에 비로서 우리가 제대로 된 부부같고 나는 당신의 진짜 아내가 된 느낌이예요...” 이 일로 그 남편은 자신의 실직이 그들 부부를 진정한 부부가 되게 하여 가정이 회복되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복이 어떻게 시작된 것이었을까요? 한없이 연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내가 기대했던 것은 잘 나가는 남편이 아니라, 진실함과 부드러움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남편들이여!!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십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진실함과 부드러움과 무장헤재의 사랑으로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을 전합시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 속에 허락하신 새로운 생명과 회복의 은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비밀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우리의 부부생활 이상이 없습니까? 이번 30일 인도네시아에 일어난 지진은 강도7.5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것입니다. 이 여파로 인한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어느 마을은 손 한번 쓰지 못한 채 800가구가 순식간에 함몰되었습니다. 현재 사상자가 2000 명이 넘어서고 있고 앞으로 얼마나 늘어나게 될지 정확히 예측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터가 무너지면 절망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모든 것이 흔들린다고 하더라도 터는 흔들리면 안 됩니다. 터가 흔들리면 손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란 터가 무너지면 그 여파는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에 부부관계가 심각한 위기상황입니다. 이혼율이 높고 특히 황혼이혼이 급증합니다. 한번쯤은 노년기에 남자보다 여성들이 ‘졸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부부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가정이 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경제회복을 외치고 있지만, 사실 경제회복을 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가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서로 사랑하면 그 가정은 경제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고, 자녀 교육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든 축복이 가정을 통해서 오기 때문입니다. 요즘 수많은 가정들이 깨어져 시회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이 말씀을 가슴에 담읍시다. 그리하여 깨어지고 금이 간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