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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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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4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엡6:5-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10-14 | 조회: 831

 

우리가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아마도 사회에서 직장생활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는 시간을 빼고 깨어 있는 시간의 거의 절반을 직장에서 보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면서 내가 몸담는 이 직장에서 우리가 행복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직장생활을 꼽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행복이 없습니다. 오늘날 사회 문제의 대부분이 직장에서의 갈등으로 말미암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만 해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시끄러웠습니까? 수많은 데모와 파업, 그리고 충돌이 바로 직장문제로 생겨났습니다. 이렇듯 중요한 직장생활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이름답게 영위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 아름다운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직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두 부류의 사람에게 명령하십니다. 먼저 피고용인에게 명령하십니다.

 

 

첫째, 피고용인들이 할 일은 순종이라고 말씀합니다. 5절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미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무슨 말씀입니까? 고용주의 권위를 인정하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기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꼽으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가가 올라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권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우리 사회의 위기입니다. 국가 권력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경찰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음주운전 차량을 경찰이 세우면 치를 세워야 하는데, 오히려 경찰을 문에 매달고 달립니다. 이 세상이서 국민의 자유가 가장 많이 보장되어 있다는 미국에 가 보십시오. 경찰의 권위가 하늘처럼 높습니다. 경찰이 차를 세우라고 하는데 따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방망이로 맞습니다. 심지어 총을 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정의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남편과 부모의 권위가 무너졌고, 직장의 권위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학교에서는 스승의 권위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학생들이 교수를 잡아다가 삭발을 시키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권위도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권위를 인정하라. 순종하라.” 남편이 아내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현재 삶의 여건 기운데 주어진 권위에 불순종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하듯 순종하라고말씀하십니다. 가정과 직장, 학교와 사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피고용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성실입니다. 5절에는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혹시 잘못 읽으면 상전을 볼 때마다 두려워하고 떨리는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전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상전을 무서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특별히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바울이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사용한 바로 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네 마음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권위를 인정하는 성실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실'이리는 단어를 연구하며 이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은 왁스를 칠 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단어가 나왔을까요? 당시에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도자기를 굽다가 실수해서 금이 가면, 도자기를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그대로 팔수도 없어서 표면에 왁스를 살짝 칠했습니다. 포장을 했다는 말입니다. 성실이라는 단어는 포장하지 않은, 순수한 그대로 왁스를 칠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성실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성실과 반대되는 몇 가지 행동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는데, 하나는 6절에 나와 있습니다. “눈가림만 하여" 눈가림만 하는 것, 이것은 성실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eye services’리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사람을 섬기기는 하는데, 눈으로만 섬깁니다. 감독관이 있을 때는 열심히 일하고, 감독관이 없을 때는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 눈가림만 하는 것을 군대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군대에서는 밍을 세워서 상관이 오면 열심히 삽질을 하고, 가고 나면 전부 앉아서 쉽니다. 그러다가 또 상관이 오면 일을 합니다. 군대에서는 아예 그렇게 하는 거리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눈가림만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얼마나 가득한지 모릅니다. 얼마 전 신문에 직장인들이 직장에서 일해야 할 시간의 약 25-30퍼센트를 농땡이 친다는 기시가 실렸습니다. 우리가 이러고서야 어떻게 나라 경제가 잘 되길 비리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사회에 팽배한 악습입니다.

 

 

 

성실한 태도의 반대로 말씀하신 다른 하나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만 좋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비위만 맞추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어디든지 그들은 하나님 면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기독교에서는 일이 곧 예배입니다. 직장 생활이 곧 예배입니다.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 한 주 동안 하는 일이 우리가 주일날 드리는 예배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배시간에 농땡이를 치지 않습니다. 가끔 한 두 사람이 졸기는 해도 대부분은 예배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감격스럽게 드립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생활을 억지로 하지 말고, 열정적으로 하기 바랍니다.

 

 

 

한편, 본문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라는 말씀은 하나의 마음으로, 갈리지 않는 마음으로라는 뜻입니다. 요령 피우지 말고 이주 열정적으로 맡겨진 일들을 하고, 주님을 섬기듯이 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생활을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휴, 출근하기 싫은데 오늘도 지옥에 가는구나하고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출근을 하면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생깁니다. 운전을 하다가도 성질이 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놀까, 농땡이를 칠까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듯이 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요셉을 기억합니까? 여러분, 구약의 요셉을 잘 알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 하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인 보디발이 그의 그런 성실함과 노련함을 보고 그를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만약 요셉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처럼 주인이 볼 때에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하다가 주인의 눈길에서 벗어나면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농땡이나 치고 그렇게 했다면 그는 결코 가정 총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 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9:4절에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여기 섬기다는 말은 종이 주인을 섬긴다고 할 때도 쓰는 표현이지만, 동시에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종이 주인을 섬기는 모습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을 섬기듯이 주인 보디발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랬기에 주인 보디발이 그 섬김에 감동을 받고 그를 가정 총무로 삼은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들은 주인을 그렇게 섬기지 않습니다. 주인이 보는 데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하다가, 주인이 보지 않으면 대충 대충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보든 보지 않든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요셉의 삶을 통해서 보디발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보디발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바로 왕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며 바로를 호위해 주는 사람이 보디발입니다. 당시 바로 왕은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던 사람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최고의 신이 태양신 라라는 신입니다. 바로는 그 태양신을섬기는 제사장 가운데 우두머리였습니다. 왕을 파라오’(바로)라고 부르게 한 이유도 태양신 라의 자손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태양신의 최고 제사장으로서 바로는 자주 태양신 앞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은 바로가 태양신 앞에 가서 제사를 드릴 때 늘 그 곁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보디발 역시 태양신을 열렬히 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보디발이 요셉의 모습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고, 여호와께서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창세기 39:3) 요셉이 어떻게 했기에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그렇게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예배당에 가서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입니까? 요셉이 부르는 찬송소리가 심금을 울리는 감미로운 찬양이었기 때문입니까? 성경은 요셉이 기도했다거나 찬송을 불렀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디발이 본 것은 요셉이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다른 종들과 달리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면 볼수록 요셉은 그가 믿는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터나 직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찬송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믿는 신앙으로 인해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상관들의 눈치를 보며 일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듯이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보디발은 자신의 집이 복을 받은 것은 요셉 때문이고, 요셉이 믿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가정의 모든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 요셉을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정에 더 복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고용주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9절에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시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6:9). 한 마디로 요약하면 피고용인은 고용주의 권위를 인정하고, 고용주들은 피고용인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피고용인과 고용주의 차이, 사장과 직원의 차이는 기능적인 차이이지 신분적인 차이가 아님을 기억하리는 것입니다. 돈 많은 시장이 돈 없는 직원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장과 직원은 똑같은 인격을 가졌습니다.

 

 

또한 위협을 그치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직원들을 협박이나 공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제대로 일하지 않는 직원에게 장계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회사 규율을 만들지 말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함부로 그들의 인격을 무시해서 위협하거나 협박하지 말리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고용주는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를 시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용주가 착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고용주는 내가 세운 회사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권위를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에 바울은 본문에서 저희(직원)의 너희(사장)의 상전이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그 상전은 하늘에 계십니다.

 

 

피고용인이든, 고용주든 간에 또 한분의 상전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것을 항상 기억하리고 말씀합니다. 고용주인 나도 일개 피고용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삶 아니겠습니까? 내 회사가 아니며. 내 직장이 아닙니다. 내 돈이 아니고, 내 몸이 아니며 내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고용주는 회사를 자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도 한 사람의 피고용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채용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채용되었을까요? 사장으로 채용된 것입니다. 직원들은 무엇으로 채용이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직원으로 채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회시에 자신이 고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과 같은 인격으로 직원을 대하며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 그리고 사장을 대할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권위로 알고 존중하며, 순종하며, 성실하게 자기의 맡은 바 모든 일을 감당하는 직원이 함께 있는 직장, 이런 직장생활이 얼마나 복될지 생각해 보십시오. 직장으로 향하는 출근길 발걸음은 훨씬 가볍고 기쁠 것입니다.

 

 

요즘 재벌들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결코 곱지 않습니다. 재벌들뿐만 아니라 재벌 2세나 3세가 갑질하는 모습들이 언론에 자주 비춰지고 있습니다. 운전기사에게 막말은 물론이거니와 부당하고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요구조건을 지키라는 것 때문에 값질 논란이 빗어지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실수했으면서도 정상적으로 일한 경비원을 폭행한다든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종업원을 폭행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뜨거운 사회적인 이슈 가운데 하나가 갑을관계입니다. 힘을 가진 갑이 힘이 없는 을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갑의 횡포가 갈수록 심화되면서 우리 사회를 뜨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갑의 횡포에 대해서 힘이 없는 을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당하기만 하는 사회는 결코 공정한 사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아직도 그런 갑을관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갑을관계의 부조리를 바꿔보자는 운동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해 말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개별난방 전환공사 도급계약을 체결하면서 로 되어 있는 표기를 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동행이라는 말은 같이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계약을 체결하면서 , , 으로 단어만 바꾸었을 뿐인데,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관계도 달라지 고, 서로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습니다. 얼굴 표정도 달라지고 심지어 삶의 질까지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북구청에서는 앞으로 체결하는 모든 계약에 갑과 을이 아니라 동과 행으로 표기하기로 했습니다.

 

 

동행이라는 말은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함께 살아갈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고 이 땅을 떠나갈 때까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인간은 인간의 거짓된 욕망과 잘못된 생각 때문에 누군가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동행하야 할 사람과 동행하지 못하고 누군가를 짓밟으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청지기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요 베스트셀러 작가인 조지 와인버그(George Weinberg)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거나 퉁명스럽고,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공경한다면 당신은 평생 자신을 이등 시민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일등 시민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에서 기꺼이 동행할 줄 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동행은 같은 길은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마음으로 가는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의 삶은 진리를 따르는 삶이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불의함이 없습니다. 죄악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에 생명과 평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노사 간의 갈등이 사라지고 함께 이 어려운 사회를 지혜롭게 극복하는 삶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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