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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1 새생명 축제 ‘괜찮아’의 은혜 (누가복음 15:17-2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10-21 | 조회: 927

 

오늘 저희 교회 터치 153 새 생명 축제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로 유비가 융중에 있는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다는데 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유비는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에도 두 번씩이나 허탕을 치며 성의를 다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자 사흘이나 목욕재계를 한 후 다시 제갈량을 찾아갔습니다.

 

 

어떤 면에서 삼고초려는 태신자를 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비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제갈량을 찾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유비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제갈량의 탁월한 재능이었다면 우리의 발걸음을 끄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 채 지옥으로 걸어가는 영혼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향 길을 가는 한 아들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소위 탕자의 귀향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청년이 집이 너무 싫은 겁니다. 형제가 둘이 있었는데 형도 보기 싫고 부모의 간섭도 싫고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을 좀 벗어나서 멋지게 살고픈 생각이 있던 차에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물려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그 돈을 받아가지고 고향을 떠나 먼 외국으로 가버리고 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동지역에서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 달라.’고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산은 반드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만 물려받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은 살아계신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했거나, 아니면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불효막심하기 짝이 없는 아들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떠날 때에는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유산으로 받은 것을 가지고 가서, 해보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니라, 떳떳하게 독립된 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을 떠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돈이 그에게서 사라지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아버지께 받아 갔던 유산만 잃은 것이 아닙니다. 돈을 물 쓰듯 할 때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그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돈이 많을 때에는 친구도 많았고, 쾌락을 위해서 예쁜 여인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먼 나라에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혐오하던 돼지들의 쥐엄 열매로 굶주린 창자를 채워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 그의 자존심은 구겨졌고 그는 죄책감과 소외감 그리고 거절 감으로 몸부림쳐야 하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춥고 굶주린 영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굶어죽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맥그래스 교수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책에서 인생을 묘사한 한 구절이 참으로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짧고 상쾌한 산책일 줄 알았던 것이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철이 없을 때는 인생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걷는 산책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좀 더 걷다 보면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마라톤을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탈락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지요. 누가 감옥에 갈 줄 알았다면 그 허무한 권력을 붙잡았겠습니까? 누가 타락의 늪으로 빠질 줄 알았다면 인기에 매달렸겠습니까? 누구나 명예, 군력, 그리고 물질만 거머지면 다 될 줄 알았는데 허무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가는 인생길입니다.

 

 

여러분, 신정아 씨를 아실 것입니다. 예일대 박사라고 학력을 위조해서 대학 교수도 하고 광주비엔날레 예술 감독도 했고, 고위공직자와 스캔들도 있었죠. 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과정들을 쭉 피력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터뷰를 한참이나 하고 맨 마지막에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정아씨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도대체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라는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분이 자신의 과오를 함축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해선 안 될 사랑을 했고, 돈으로 학위를 사려 했다. 땀 흘려 한걸음씩 가야하는데 잘못된 지름길을 선택했다. 성실하지 못했고 내 인생관이 잘못돼 있었다.” “죽도록 창피했다 죽도록 반성했다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

 

 

저는 그 인터뷰를 보면서 본인이 말했던 그 잘못된 지름길을 추구했던 그런 인생관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저는 그 인터뷰 기사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허무한 길을 걷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호소하는 듯 한 소리로 들려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탕자 역시 이렇게 고향을 떠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날 때, 이렇게 살 줄 알았으면, 누가 집을 떠났겠습니까? 좀 편안하게 살아보려고,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떠난 길인데 모든 것을 다 잃고 상거지가 된 것입니다. 그 때 이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굶어죽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본문 17절이 바로 그 고향으로 가는 인생의 전환점을 보여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여기 돌이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본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 왔다는 말입니다. 그는 참으로 오래 만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아버지를 떠나 방황하는 자신의 비참한 실존(죄인 됨)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래 만에 아버지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를 떠난 것을 아파하며 뉘우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아직도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뉘우치는 감정 이상의 의지적인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20절이 바로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때가 바로 고향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주신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로 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이 되어주시기 위한 것임을 아십니까? 그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14;6) 왜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없습니까? 인간과 하나님사이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죄입니다. 죄책감은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모든 사람의 발목을 잡는 무거운 사슬입니다. 탕자도 얼마나 주저했을까요? 과연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받아 주실까? 그는 내게 소리치며 내 집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지 않으실까?

 

 

그런데 보십시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아들을 보고는 아버지가 달려 나와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탕자가 오면서 수도 없이 외쳤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자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아들로 맞아주신 것입니다.

 

 

이 모든 행동 - 아들에게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 맞춘 것, 제일 좋은 옷을 입혀준 것,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겨준 것, 그리고 큰 잔치를 베푼 것-의 배후에는 괜찮아.” 라는 말 한마디가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 고개조차 들기 부끄러운 아들에게 네가 어떤 짓을 했건 괜찮아. 나는 네가 무엇을 했는지 따지지 않을 거야. 네가 왜 돌아왔건 괜찮아. 잘 왔어. 넌 여전히 내 아들이야. 괜찮아. 네가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다 용서할 수 있어. 괜찮아!’ 네가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다 용서할 수 있어. 괜찮아!’ 여러분, 돌아온 탕자를 향하여 괜찮아. 나는 너를 다 용서했어.’ 라고 말씀하시는 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용서하시면서 괜찮아!’ 라고 말씀하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지난날의 죄를 따지지 않으시고 괜찮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난날의 부끄러움 때문에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괜찮아. 나는 다 잊었어.’ 우리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저는 어린 시절 가난한 달동네라고 하는 미아리에서 살았습니다. 이곳엔 이곳저곳 똥을 묻어둔 웅덩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이들이 놀이 할 만한 운동기구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뛰어 다니는 것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뛰다가 이 똥통에 빠지면 골 아픈 것입니다. 저 역시 우리 집이 부산에서 이사를 와서 그 때만 해도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고, 화장터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산에 똥 밭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다방구를 하다가 내 친구가 똥통에 빠진 것입니다. 가슴까지 들어갔습니다. 어릴 때라 우리는 그냥 지켜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저 밑에 옹달샘이라는 곳에서 물을 길러왔던 친구 어머니가 본 거예요. 뭐 순식간에 달려오더니 아들을 들어가서 그냥 건지는 거예요. 그리고 샘터에서 '이 녀석아! 이 녀석아!' 울면서 씻기는데 그 똥 냄새가 문제가 아닙니다. 역겨움이 문제가 아녜요. 지금 어머니의 눈에는 다만 사랑하는 자식이 똥독이 오를까봐 비벼 가며, 끌어안으며 울면서 씻기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셨나요? 무엇을 요구하셨나요? 아닙니다.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내가 받을 죄를 떠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습니까?

 

 

오늘 바로 그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곳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연약한 인생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세요. 두 팔을 벌리시고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에게는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절대적인 초청과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초청이요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수고와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 하는 분이 안계십니까? 여러분, 연약한 자리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실까?’ 염려가 되신 분 있습니까? ‘상한 갈대처럼 꺾여져 있는 우리의 삶이 완전히 꺾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분 계십니까? ‘내게 남은 마지막 남은 불씨마저 꺼져버리지 않을까?’ 걱정되신 분 계십니까? 8:32절에 보시면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는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무엇인들 안 주시겠냐는 말입니다. 목숨까지 던지신 분이 무엇이 아까워서 당신의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외면하시겠습니까?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 괜찮아 하시는 그 주님의 품에 안겨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때 아버지가 뛰어와서 안아줍니다. 과거도 묻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 품 안에 안기면 참 안식을 얻고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나하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그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으시렵니까?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를 초대하시기를 원하는 그 길을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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