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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4 감사 중의 감사 (시116:12-17)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11-04 | 조회: 1047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11월 첫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아침도 주의 은혜가 이곳 가운데 가득하길 축원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타가 대부분 인정하는 어리석은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을 손에 쥐고 있을 때는 그것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것을 잃어버려 손에서 떠나게 되면, 그때서야 ', 그토록 소중한 것을 미처 몰랐구나!' 하고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현재 국가적으로 볼 때 경제상황이 좋지 않고 선진국에 비해 생활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이만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집에, 자가용을 운전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직업을 통해 적절한 보수나 대접을 받으면서 자녀를 키우고, 가정생활을 행복하게 꾸려가고 있다는 것.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에 대해 날마다 감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난 5월에 우리나라 제주도에 정치적 불안과 갈등을 피해 저 중동의 조그마한 나라 예멘 사람이 339명이 난민 요청을 해 왔습니다. 작년 기준으로 보면 내전을 피하여 400여만 명이 자신의 나라를 떠났습니다. 현재도 기근위기로 800만이 고통을 당하고 어린아이 150만 명이 극심한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먼 곳에서 살려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지만, 난민 신청허가가 쉽지 않은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얼만큼 그들의 눈에 잘 사는 것으로 보이면 저런 모험을 할까?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게 보이는 존재인가?'에 대해 다시금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진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갖는 약점이자 어리석은 부분입니다.

 

 

요즘 33세 된 인도네시아 영성이 사우디에서 참수가 된 사건이 일파만파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동에 대해 잘 모릅니다. 석유로 세계적인 부를 가진 나라로 인식을 하지만, 대부분의 중동에 사는 여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과 비교해보면 우리 여성들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디벨트(Die Welt)지가 소개한 중동 지방의 21개 나라의 대부분의 여성들의 생활은 지옥생활과 같음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집 밖에 나가서 일도 못합니다. 집 밖에서 운동은 물론이고 자전거도 타지 못합니다.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 역시 안 됩니다. 교육도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공중목욕탕에도 못 들어갑니다. 베란다에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도 안 됩니다. 가게에 나가서 남자 점원과 값을 흥정해도 안 됩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도 남자의사한테는 진찰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남성과 함께 버스를 탈 수가 없습니다. 택시도 이용하지 못합니다. 무슨 성적인 혐의가 있으면 끌려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중동 여성들의 입장입니다. 그들에게 자유가 있다면 단 하나뿐입니다. 숨 쉬는 자유,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 여성으로서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감사한 줄 모릅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약점중의 약점이요, 어리석음 중의 어리석음입니다.

 

 

이제 11월을 살아가면서 내 삶을 돌아보며 무엇보다 감사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것만큼의 풍요와 행복의 순간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의 내 모습에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최고 단계는 모든 삶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을지라도 부족한 것을 바라보지 않고 내 삶에 채워져 있는 작은 것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풍요롭진 않을지라도 내 삶에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신앙고백입니다.

 

 

스위스 철학자 칼 힐티는 그의 책 행복론에서 행복의 첫째 조건이 감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감사가 행복한 삶의 첫 번째 조건일 뿐만 아니라 감사는 신앙생활에 최고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징검다리입니다. 고난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건너가게 만드는 징검다리가 감사입니다.

 

 

시편 116편은 많은 학자들이 다윗으로 추정합니다. 다윗은 지나온 인생의 발자취를 회고하면서 그 가운데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모든 인생이 다 그렇듯이 다윗의 생애 역시 전적인 하나님 은혜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전쟁에 나간 형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마침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의분한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워 승리합니다. 그 후 이스라엘 군대의 장군이 되고, 사울왕의 사위가 되고,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나 사울왕의 시기 질투를 받고 오랜 세월 망명 생활을 합니다. 왕으로부터 질투를 받아서 이제는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장 피 끓는 젊은 나이에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광야에서 도망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고, 또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시 102:6-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줍니다.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광야의 당아새, 황폐한 곳의 부엉이, 밤새도록 외롭게 앉아 떨고 있는 지붕위에 참새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독하고 처절하였는가를 쉽게 느낄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신 한때의 괴로움이었는데 그 한때라는 것이 수십 년처럼 길어 보였습니다. 누구나 짧은 고통에는 강하지만 긴 고통에는 약합니다. 이 점에서 다윗 역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지치고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왕은 아직도 건강하고 젊어 보입니다. 그 왕이 죽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해 보입니다. 현실은 어디를 가나 쫓겨 다니는 사람에게 냉정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계십니다. 116:3 이하의 말씀에 보면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그리고 8절에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11절을 보면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인생에 희망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말씀의 저자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12-14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이 말씀을 가만히 보십시오. 그 속에 감격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기쁨이 차오르고 있지 않습니까? 무언가 너무 고맙고 좋아서 어찌 할 줄을 모르는 모습을 눈앞에 그릴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감격과 기쁨을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무슨 말입니까?

 

 

사실 그는 지금 도무지 감사할 형편이 못됩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다윗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없기에 감사할 거리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 다윗으로 하여금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그것도 삶에 지치고 힘겨운 그 상황에서도 무엇으로 보답할꼬하는 감사의 고백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지금 다윗은 감사 중의 감사인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고백합니다. 13절에 보면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이는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이 없는 자기를 이처럼 자녀 삼으시고 자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사랑에 감격을 구원의 잔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가 막힌 고백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감사가 있게 했습니까? 그가 이와 같은 감사 고백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짓눌렀던 환경가운데서도 여전히 자기를 지켜 주시고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8절에 그는 내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내 눈을 눈물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왜 우리가 구원받은 자녀로 살아감을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그 무엇보다도 최고로 여겨주십니다. 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장사가 값진 진주를 만나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산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값진 진주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진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우리가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에게 분명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사랑하는 우리가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못 본 체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고통 가운데 몸부림칠 때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물론 때로는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잠깐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실 수는 있습니다.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연단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 고통당하는 모습에 가슴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그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이가 간절한 마음으로 내게 뭔가를 요청하면 그게 그 아이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들어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태복음 7:1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받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왜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 당신이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당신의 자녀가 고통스럽고 빈궁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래서 내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런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고 감사히 살 수 있습니다.

 

 

. 지금 다윗은 고난 중에도 함께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며 서원을 갚겠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8-19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예루살렘아 네 가운데서, 여호와의 전정에서 내가 갚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갚아 영광을 돌리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 서원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서원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서원을 갚으려면 결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급할 때는 약속을 하고도 문제가 해결되면 오리발을 내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드린 서원도 많은 사람들이 갚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차라리 서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서원을 갚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꼭 갚겠다고 말합니다.

 

 

내게 손해가 될지라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신실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회사에 손해가 될지라도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 회사가 신뢰받는 기업이 되고, 그런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해로울지라도, 내게 손해가 될지라도 약속한 것을 지키는 사람은 신실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되고, 그런 사람은 결국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당장 손해가 된다고 약속을 어기고 남을 속인다면 그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 이제 그는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17절 보면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여기 감사제는 구약 제사 가운데 자발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희생 제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 무언가 자꾸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헌신은 내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엄밀히 말하면 헌신되어지는 겁니다. 저절로 이끌려서 헌신하게 됩니다. 감사는 우리로 하여금 내일을 희망으로 보게 만들어줍니다. 아무리 내 앞에 큰 장애물이 놓여 있어 내 삶의 걸음을 방해한다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나아가면 우리의 앞길이 형통하게 열리게 됩니다. 성경에서 자주자주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 중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 오늘 시인은 결코 남보다 나은 상황에서 네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를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걷잡을 수 없는 고난의 파도가 밀려오는 환경 속에서도 그가 놓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을 담아 외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여러분, 아직도 구원받은 감격을 갖고 살고 계십니까? 지난 한 해 동안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얼마나 감사해 보셨습니까? 구원의 감격을 갖고 사는 사람은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가슴 속에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선택하시고 구원하셨다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불렀던 288장은 제이 크로스비(F. J. Crosby) 가 지은 찬송시입니다. 이 자매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실명하여 평생을 앞을 보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앞을 볼 수 없는 처지임에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지금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지만, 내가 처음 눈을 뜰 때 나는 주님의 얼굴을 가장 먼저 볼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찬양시를 썼습니다. 그녀가 쓴 찬송시만 해도 무려 9,000여 편이나 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288장도 그녀가 쓴 찬송시입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3)

 

 

여러분, 우리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크로스비 여사처럼 평생 앞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믿음의 눈으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캄캄한 먹구름이 몰려와도 검은 구름 위에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며 감사할 수 있고, 캄캄한 밤중에도 별을 보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길고긴 인생의 터널을 통과할지라도 터널 저편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박해를 받아 지하 동굴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갈지라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행복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감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은혜와 기쁨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2018년도 10월까지 10개월을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여러분, 지난 10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이제 이 11월 우리의 지난날의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감사모드로 우리의 삶을 바꿉시다. 불평 모드를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감사모드로 삶을 바꿉시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세상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감사는 기적의 씨앗이요 기적을 여는 열쇠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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