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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1 감사절(1) 말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 (눅17:11-1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8-11-11 | 조회: 1012


올해 들어 남북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서면서 남과 북의 만남과 교류가 빈번해 지고 있습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 중에 한라산에 헬기가 착륙을 할 수 있도록 조취를 취하는 구상도 이야기를 합니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대해 잘 몰랐던 사실들이 새롭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자기들의 낙후된 점을 서슴없이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숙박시설이 민망할 수준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의 경제 수준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떨어져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년 기준으로 수출입의 총액은 우리나라의 1/138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국민총소득은 1/45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146만원에 불과합니다. 1년 소득이 146만원이라니 얼마나 어려울까요? 참고로 우리는 3189만원입니다. 제가 몇 차례 매스컴에 방송된 북한 인민들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우선 한 농부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얼핏 봐도 궁핍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옷가지가 남루했고 얼굴은 핼쑥했지만,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님의 영도로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초등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이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얼굴은 새까맣고 교복도 낡아보였습니다. 이 어린이가 학용품을 들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님께서 보내주신 학용품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인터뷰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혹시 시킨 대로 카메라 앞에서 말한 것은 아닐까? 이 사람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넓은 세상을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쨌든 이들의 마음에는 감사가 있어보였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연한 듯이 그 마음이 무덤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에 원망과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분노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저마다의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 감사가 없어 보입니다. 저는 하나의 아이러니를 보고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해야 할 사람 같은데 감사를 하고 있고, 감사해야 할 사람 같은데 원망과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우리가 감사에 대해서 깊이 말씀을 나누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감사를 잘하면 영적으로 상당히 건강하고 성숙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감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 비해 감사를 잘 아는 사람이 그만큼 건강하고 성숙합니다. 영적인 면뿐만 아니라 육적인 면에서도 감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건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가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려면 기도를 연습하고 배워야 합니다. 은혜 받았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알려고 한다면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사도 배우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믿음 좋은 주변 형제들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눈여겨보면서 배우고 연습해 보십시오. 그러면 드디어 나에게도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며 나아가 습관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배워서 습득한 사람은 훨씬 더 감사가 풍성하고, 깊이 있는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일에 감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성공할 때야 어느 정도 감사할 수 있지만, 실패할 때 진정한 감사를 드리기란 웬만큼 배우며 연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힘듭니다. 이익을 많이 남겼을 때는 저절로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손해를 입었는데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평소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굉장한 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10명의 나환자들이 나옵니다. 나환자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비롯하여 일체의 공민권을 박탈당한 채 하루하루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레 13: 45절에 보면 나환자가 동네를 지나갈 때 혹시 사람이라도 만나면 자기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린 채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고 크게 고함을 질러서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가던 나환자 10사람을 예수님이 만났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이들은 율법에 규정한 그대로 성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도 먼저 나는 부정하다!” 하고 고함을 질렀겠지요. 그래서 건강한 사람이 전염되지 않도록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원하는 가장 중요한 부탁을 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외침의 의미를 아십니까?

 

 

놀랍게도 10명의 나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들에게로 가다가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한생을 괴롭히던 질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젠 가족의 품에 친구들에게 갈수 있고 다시 직업을 갖고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꿈에도 일어날 수 없는 이 치유가 예수님으로부터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15절입니다. 읽겠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지금 주님께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17-18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이 질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 감사의 희귀성입니다.

 

열 명 중 다섯 명도 아니고, 여섯, 일곱도 아니고 열 명 중 아홉 명이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만 감사했습니다. 90%가 감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에 나병은 저주받은 병이었고 공동체와 격리되는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불치병이고 사망선고와 같은 끔찍한 병입니다. 독감이나 피부병 정도가 나은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 정도의 중한 병에서 나았다면 열 명 중 한 명이라도 그냥 갈 수 없는 일입니다. 혹 인격에 파탄이 난 사람 한 명 정도가 그냥 갔다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열 명 중에 아홉이 그냥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너무도 당연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감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에게서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의 증상들을 열거하는데 그곳에 감사하지 않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말세의 특징 중 하나가 감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죄인의 특성을 지적하는데 그곳에도 감사하지 않는 것이 언급됩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인의 특성이고, 인간의 본성입니다. 죄인의 심성은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세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이 말씀이 결코 틀리지 않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깔보는 교만이 가득합니다. 마음속에 원통과 사나움을 가득 안은 폭력성이 지배하고, 신앙의 가치보다는 쾌락을 더 좋아하고 추구하는 못된 심성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감사가 점점 말라갑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시큰둥해집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와 응답을 받고 난 다음에 태도가 달라집니다. 죄인의 심성 안에는 축복들을 내가 받을만해서 받은 것이라고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축복과 은혜의 근거는 나에게서 찾아내려고 하지만, 좋지 않은 일은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서 감사가 쉽지 않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감사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2. 감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요인 중 하나는 망각증입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짧습니다. 내가 베푼 것에 대해서는 길고도 질긴 기억력을 가지는 반면에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력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돌아서는 순간에 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질병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체험한 후 3일 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원망을 쏟아냅니다. 40년 동안 매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나님이 먹여 살리셨지만, 나중에는 만나밖에 없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언제 우리를 사랑했느냐고 따집니다.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은 은혜 받은 것이 적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지독한 망각증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잊지 말 것에 대해 자주 명령합니다. 103: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믿음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 더 큰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큰 것으로 부어주셔도 반응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50:22-23절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18절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는 이 말은 주님은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섭섭함을 표현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선민으로 누구보다 선택된 백성으로 자부심을 가지던 그들인데 당연히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은 그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는 은혜요, 회복입니다.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런데 화장실 가기 전과 같다 온 후의 모습이 얼마나 다릅니까?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오늘 2000년 전의 고침 받은 문둥병자에게 한 것만이 아닙니다. 바로 내 모습은 아닙니까?

 

 

오늘 내 자신을 보세요.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택정하시고 부르시고 자녀를 삼아 주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 하나도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한 문둥병자를 보세요. 15-16절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여기 그 중의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했다. 얼마나 자신의 이 병 고침과 회복에 대해 기쁨이 넘쳤으면, 지금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지요.

 

 

지중해를 오가는 한 상선의 선장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죽고 1 1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선원이 된 이후에 모든 삶이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도 잃어버렸고, 성격도 난폭하고 거칠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오는 노예 선에서 일하면서 나쁜 짓만 골라하는 잔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군대에 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하다가 잡혀서 15개월 동안 노예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간신히 노예에서 풀려난 그는 노예매매선에 탑승하게 됩디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노예로 잡아 미국에 파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예들을 미국에 내려놓고 고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품에서 기도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나를 살려 주시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겠노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풍랑에서 그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 가득히 밀려왔습니다. 나 같은 죄인, 정말 죽어 마땅한 나 같은 죄인까지 사랑하시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너무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 찬송이 찬송가 405장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가 바로 존 뉴튼 목사님입니다.

 

 

 

그는 나이 많이 기억력이 점차 쇠퇴할 때에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다른 것을 다 잊어버릴지라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과거에 아주 몹쓸 짓을 한 죄인이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의 나병환자가 감사함으로 얻은 의외의 축복은 더 큰 것이었습니다. 감사를 표현한 그에게 주님은 19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감사를 표현할 때 구원이 완성됩니다. 몸의 치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몸만 나은 것은 반쪽 기적입니다. 영혼까지 구원을 받아야 온전한 치유와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만 나았다고 좋아서 가버린 아홉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병환자로 살면서 입었을 영혼의 깊은 상처는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큰 것입니다. 가족과의 단절, 공동체로부터의 따돌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깊은 절망의 무게가 그들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그들 안에 분노와 아픔으로, 매일 자학하고 원망의 세월을 보내고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몸의 나음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영혼이었습니다.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완전한 치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감사로 반응한 나병환자에게만 덤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덤은 앞에 주어진 것과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외의 축복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자신들이 받은 것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주님은 돌아온 그 나병환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것을 믿음이라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것 중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는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구원에 대해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었다면 다 얻은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사랑을 입고서도 도무지 감사를 드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9명의 나환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눈이 가려져 있기에 우리가 누리는 세상의 모든 은혜가 나 잘나서 그렇게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모르고 늘 불평과 불만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의 눈을 새롭게 떠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이 한해를 돌아보시고 혹시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잊은 것은 없는가? 다음으로 감사하되 넘치게 해야 하겠습니다. 여기 예물을 드리기 전에 우리 감사 제목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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