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추수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모두가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것은 ―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느 한 순간인들 감사하지 않을 순간은 없겠지만 ― 이렇게 특별히 우리가 오늘 추수 감사주일로 정하고 지키는 것은, 모든 오곡백과를 다 거두어드린 이 시점에서 일 년을 함께 묶어 특별한 감사의 제단을 쌓음으로,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더욱 더 그 은혜가운데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1년 중 중요한 명절 3개를 지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이라는 3개의 명절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1년에 3번 추수를 합니다. 겨울 동안 자란 밀을 초봄에 추수할 때가 있습니다. 이 추수기에 맞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교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입니다. 곧 유월절 명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봄부터 시작해서 뿌린 밀과 보리가 자라서 추수를 하는 늦여름이 되면 칠칠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맥추절로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주신 양식을 놓고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늦은 가을이 되면 그동안 열심히 가꾼 올리브나 포도, 무화과 같은 과일들을 풍성하게 소출하는 연말이 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수장절인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이 유월절은 세상에 있다가 죄악에 있다가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은 그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의 또 다른 이름은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에게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오면서 사명을 자각하고 성령의 불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장절인 초막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나서 40년 이상 그런 초막을 짓고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그 광야 생활을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무서운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도와주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셨는가를 회상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초막절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그 광야에서 농사를 졌나요? 어떤 사업을 했나요? 방황하고, 성을 찾지 못해 애를 쓰고, 주리고, 목마르고, 근심 중에 빠져서 하루하루 살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도와 주셨는지, 어떻게 때를 따라 먹여주셨는지, 어떻게 원수로부터 지켜주셨는지, 어떻게 그들의 몸에 질병이 생기지 않도록 은혜를 주셨는지 그것들을 회상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토록 하기 위해 나뭇가지로 초막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살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1년에 3번의 추수가 있었는데, 여기에 맞춰 큰 명절 3가지를 제정하셔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절을 지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신 은혜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매년 몇 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일 년에 3번씩 꼭 감사를 하도록 이야기를 감사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왜냐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망각이 너무 심합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에 대해서는 질기도록 기억력이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는 아주 현격하게 기억력이 쉽게 줄어들고 약합니다. 쉽게 망각하는 증상들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불행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 3절기를 제대로 지킨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찮다는 이유로 절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백 년을 보낸 암흑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적절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선 안됩니다. 감사가 우리에게 체질화되고 습관화 되도록 계속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에게 감사하는 삶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박국’입니다. 하박국이란 뜻은 "포옹한다. 껴안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시대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았던 사람, 고통 한복판에 서서 그 고통을 붙들고 몸부림하며 기도했던 사람,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안과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했던 사람. 그리고 거기서 전능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할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하박국입니다. 여러분, 사실 하박국은 처음부터 감사하며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서두는 원망과 불평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하박국은 지금부터 2600년 전의 선지자입니다. 당시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입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서 11년간 통치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 많은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성경을 읽어주면 칼로 잘라 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유다 나라에는 우상이 가득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한 모습 뿐 이었습니다. 경건한 자들이 핍박을 받고, 악한 사람들이 흥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하박국은 선지자로소 예루살렘 안에 만연되어 있는 악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도시가 이렇게 죄악으로 뒤덮일 수 있습니까, 하고 여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큰 문제입니다. 차라리 몰랐다면 나을 뻔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도덕적으로 너무 병들어서 하나님께 여쭈었더니 불치병이라 이제 곧 바벨론 군대를 보내어 멸망시키려 한다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차피 망할 도시라면 망할 때까지 실컷 먹고 마시면서 죄짓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이 답답함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박국에게 하나님이 다가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그 백성을 구하시겠다. 그러므로 의인은 어떤 경우라도 낙심치 말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이 주의 음성 앞에 그의 마음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던 하박국이 본문 18절 말씀에 보면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기 하박국 선지자는 생존권이 박탈될 정도의 현실적인 위기에 빠졌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며 기뻐하고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절망의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Ⅰ. 하박국 선지자가 원망보다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박국 선지자는 현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환경이나 사물을 볼 때 몇 가지 관점에서 본다고 합니다. 첫째는 환경을 현실 그대로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자기의 가치관대로 판단해서 자기의 마음 관점에서 보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절대자의 관점에서 환경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믿음의 관점이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환경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박국은 주어진 환경을 현실그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관점으로도 보지 않았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믿음의 관점이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환경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환경의 관점으로 보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자기 마음의 관점으로 보아도 비참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감사의 고백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기 보면 부정어가 6번(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반복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3대 과실수가 무화과, 포도, 감람(올리브) 입니다. 과수원마다 애써서 지은 농사가 안됩니다. 밭도 마찬가지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다 짓밟혀버립니다. 이젠 어디를 찾아보아도 먹을 게 없습니다.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니 가축들이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양이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습니다. 인간 조건으로 보면 완전 절망입니다. 끝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감사할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게 정상입니다. 감사의 이유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죠. 건강하던 사람이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부요하던 사람이 물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권세와 지위가 있던 사람이 추락해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때론 우리의 삶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홍해를 갈라 우리로 건너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서 메마른 광야와 같은 고통의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당신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 없어 궁핍함이 우리를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굶주림 가운데 방치해 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고 살았던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로마서 8:3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모든 것을 주십니다. 당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는데, 우리를 위해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한 해를 사십시다.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하는 믿음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 나가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환경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때로는 고통 속에서 눌려 지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현실을 환경으로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도 은혜로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은혜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십시다. 우리에게 결코 무관심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승리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Ⅱ. 하박국 선지자가 원망보다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기 '즐거워하며' = '에엘로자'와 '기뻐하리로다' = '아길라' 이 두 단어는 신뢰와 소망하는 대상에 대해 확신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박국 선지자는 생존권이 박탈될 정도의 현실적인 위기에 빠져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하나님 한 분으로만 만족하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또한 이고백은 아무리 어려운 환란이 닥쳐와도 아무리 어려운 고통이 나를 슬프게 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하박국은 이 짧은 구절에 하나님을 두 가지로 표시합니다.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한번도 택한 자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는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최악의 것을 최상의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베푸시는 구원의 열매를 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이 그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절망의 골짜기에서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요사이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정을 영적으로 격려하고 각 가정을 위해 기도해 드리기 위해서 심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각 가정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간증하시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히려 제가 더 큰 격려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제 마음에 가장 큰 격려와 감동이 된 이야기는 이런 것들입니다. 한 가정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기 집에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가장 감사할 것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이랍니다. 원래 자기 가정은 한 사람도 믿는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예수를 믿게 되고 그 후 세월이 가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예수를 믿다가 이제는 모두가 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것이 무엇보다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회자로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그 무엇보다도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그 무엇보다 가족들이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자!!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적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그는 확신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때로 내게 부딪힌 어려움, 고난,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만 아닙니다. 때때로 고난은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영원한 축복에 이르게 됩니다.
Ⅲ. 마지막으로 하박국 선지자가 원망보다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축복을 발견했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이기도 하고 권력이기도 하고 명예이기도 합니다. 그 중에 물질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돈이 손에 들어오면 힘이 생깁니다. 자신감도 생깁니다. 그리고 남보다 더 좋은 명예나 권력을 얻게 되면 인생을 살아갈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힘들어하고 속상해하고 어려워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것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돈이 없다든지, 목표를 잃었든지, 명예나 권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에게 진정으로 힘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습니다. 돈도 아니었습니다. 권력도 아니었습니다.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외양간에 소도 감람나무에 소출도 없지만 그래도 힘이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인생에서 돈과 명예, 지식의 풍성함이 내가 존경받도록 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하박국 선지자는 깨달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1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은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여기 사슴 하면 그 뿔과 날렵한 다리가 생각납니다. 사슴은 투명한 눈동자로 위험을 감지합니다. 골짜기에서 위험을 느낀 사슴은 그 즉시 날렵한 다리로 고지를 향해 춤추며 오르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골짜기에 서있던 사슴을 어느새 저 높은 고원의 언덕에 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짜기를 굽어봅니다. 그 날렵한 사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 놓은 곳에 있는 사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방금 전까지 우리는 어두움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괴로워하며 고통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절망하고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사슴의 발같이 내 발을 들어 올려 그 위험을 피하게 하시고 드디어 저 놓은 언덕, 나의 높은 곳, 가능성의 고지에 서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위기가 닥쳐올 때 사람들은 다 큰일났다,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담대해야 합니다. 이 시간 기억하십시오. 이제 우리 한 번 더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감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벌떡 일어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자리에 있을지라도 감사하는 삶을 잃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 한 번 더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숙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에로의 초대에 우리 모두가 서시기를 축원합니다.